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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長篇]/너의 곁에서

너의 곁에서 《1》

Say you love me            

Written by Rine in Rine's Side

 

 

 

 

 

 

 

더없이 화창한 날이다.

 

 

 

하늘은 파랗고, 흰구름은 유유히 흘러가고, 당분간 비 소식이 없다는 일기예보에 딱 알맞은.

완연히 내리쬐는 햇빛 아래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단 둘이 데이트라니. 이보다 즐거운 일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그니까 제가 와 선배랑 놀아야 하는데예.”

 

현실은 그렇게 달콤하지 않다.

 

나름 내일이 준결승인데 와 변덕이고.”

 

위기의식이라든가, 긴장감 같은 정상적인 건 선배한테 기대하면 안 되는 겁니꺼.

방금 저가 한 말에 켁켁거리는 내 옆에서, 녀석은 담담하게 주스를 들이켰다.

 

니도 긴장이라곤 쪼매도 안 해놓고 와 내한테 지랄이고.”

 

아니거든예. 긴장은 안 해도 생각은 하고 살거든예.”

 

도무지 한 번도 곱게 져주지 않는 모습에 손에 쥔 캔만 꽉 쥐고 으윽, 열불을 터뜨렸다. 내일 있을 경기도 날은 좋겠구나- 싶은 토요일. 시내 거리를 둘이서 음료수 캔 하나씩 들고 걷고 있었다.

 

 

 

늘 보는 교복이나, 레귤러복이 아닌 사복 차림새로.

녀석은 검은 나시 위 라운드넥 프린트 티셔츠에 보기만 해도 내가 더워지는 검은색 칠부 바지를 입고, 색색깔의 피어싱을 하고, 다행스럽게도 평소마냥 돌아온 모양으로 내게 간간히 일침을 놓고 있었다.

 

그건 다행이다.

관서대회까지 수월하게, 1, 2R도 제법 여유 있게 올라와 내일이 준결승.

컨디션은 그럭저럭 괜찮아졌는지 녀석은 목요일쯤 해서 평소처럼 돌아왔다.

킨타로가 못 건들고 분위기를 현실로 되돌리는.

 

사감이 섞였는지 나랑 더블스 맞출 땐 조금 멍해졌지만.

뭐야, 파트너가 날 일부러 고생시킨다는 게 너무나 쉽게 이해가 가다니. 나 왠지 불쌍한데.

 

또 와 궁상이고.”

 

아이다…….”

 

다 마신 캔을 쓰레기통에 버리다가 우울해져 잠시 통 붙잡고 악악대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건 말이야- 부장이란 놈과 네 선배고 내 친구란 녀석들의 강압이라고.

난 네 기분 풀어주라고 바쳐진 제물이란 말이다.

 

뭐어, 그 핑계로 만나고 싶어서 나도 순순히 동의한 거지만.

 

그래서 뭐 하고 놀 건데예.”

 

, ?

녀석의 말에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녀석이 특유의 덤덤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정말 아무 생각 없는 건가, 하는 눈빛에 괜스레 뜨끔.

 

가라오케라도 가든가!”

 

싫은데예.”

 

밥을 먹든가!”

 

이 시간에 무슨.”

 

바다 가서 물장구나 치든가!”

 

…….”

 

. 안 되겠어. 죽어야지. 구석에 쭈그려 벽을 쾅쾅 두들기고 싶은 아득함이다.

야 임마 오시타리 켄야. 닌 병신이냐. 작업 한 두 번 해보냐고. 근데 왜 숫총각처럼 매번 이러는 건데. 아으아아! 낯 팔려서 살 수가 있나. 죽어라 임마.

 

선배가 그렇게됐습니더, 할 거 없으면 따라다니기나 하소.”

 

알아. 나 병신 같은 거. 한심하단 소리를 듣고 녀석에게 이끌려 거리를 걸었다.

평소라면 녀석이 내 팔을 잡았단 거에 두근두근 하겠는데 지금은 그냥 벽에 머리를 박고 싶을 뿐이야. 울고 싶다.

 

침울해진 내 팔을 잡고 한낮의 거리를 느긋하게 걷는다. 간간히 아가씨들의 시선이 닿아올 때면, 역시나 녀석은 눈치라곤 전혀 없이 쌩하게 지나친다.

눈길 한 번 못 받은 여자들이 자존심에 홱 고개를 돌리면, 그게 또 만족스러워 금방 헤실대는 바보가 하나.

 

와 변태 같이 여자 보고 웃고 그캅니꺼.”

 

정작 녀석에게선 또 한심하단 눈길을 받아 버렸지만.

 

여긴 와?”

 

필요한 기 있으니께.”

 

방향제 냄새가 풍기는 스포츠 용품점.

아까 있던 데하곤 꽤 거리가 있는 곳인데 언제 여기까지 왔지?

 

그나저나 필요한 거라니.

주변에 널린 농구공이니 글러브니 하는 걸 건성으로 보며 녀석의 뒤를 따랐다.

 

리스트밴드?”

 

지금 건 못 쓰게 돼서.”

 

요즘 디자인은 예쁘네- 아무리 그래도, 핑크색은 전혀 껴보고 싶지 않지만.

뭐냐고 저런 형광 분홍. 호모 페어쯤은 되어야 도전해 볼 수 있는 거네.

 

검은색은 답답하게 와. 여름도 됐는데 좀 환한 색으로 해보래이.”

 

흰 색은 때 잘 타고.”

 

어차피 매일 빠는데 어떻노.”

 

녀석이 고른 밴드로 이렇다 저렇다 놀다가 재미 들려서 장난감이라도 되는 것마냥 이것저것 들고 웃어댔다.

 

그거 해라. 잘 어울리네.”

 

됐거든예. 선배나 저거 해보이소.”

 

본래의 목적은 잊고, 서로 이상한 걸 들이대며 해보라 마라 놀다가, 시간이 꽤 지나고나서야 녀석은 두 종류를 들었다.

 

, 그거 할라꼬?”

 

하나는 검은색에 흰 별무늬가 하나 들어간 거. 하나는 연노랑 색에 검은 별이 하나 들어간 거.

좀처럼 밝은 색을 매치하지 않는 녀석인데(피어싱들은 제외).

 

…….”

 

녀석은 말을 흐리고 계산대로 향했다. 성큼성큼 가는 모습에 얼른 뒤를 따른다.

한 시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구나. 날 버리고 갈까 봐. 하하하.

계산을 끝내고 나오자 그래도 시간이 제법 지났는지 해가 넘어갈 기미가 보이긴 했다.

 

, 이제 뭐 하지?

 

심각한 문제다.

 

 

 

?”

 

불쑥, 내민 녀석의 손에 들린 것에 끙끙대다가 얼빵한 소리를 내뱉었다.

녀석의 표정이 팍 일그러지는 것이 빤히 보였지만, 어떠한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이거, .

 

 

 

 

 

 

나 주는 건가?

 

 

 

 

 

……선물?”

 

방금 전 산 리스트밴드 중 은은한 노란 바탕에 검은 별이 하나 있는 것.

불쑥 내민 녀석에게서 심상치 않은 오오라가 풍기기 시작했지만,

 

그런 짜증지수 알 게 뭐야 지금은 네 손에 얻어터져도 행복할 거라고-!

 

히카루!”

 

거짓말 안 하고 눈물 맺힐 것 같다. 녀석이 손을 덥썩 잡았다.

움찔 빼내려 하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두 손으로 녀석의 손을 움켜쥐었다.

 

와 지랄…… 아입니데이.”

 

내 주려고 산 기가?”

 

그럼 놀리려 샀겠습니꺼.”

 

틱틱대면서! 오늘도 싸가지 없게! 어쩐지 눈은 피하고!

 

나한테 선물을 주는 자이젠 히카루라니. 오늘, 내 삶의 럭키란 걸까.

 

고맙데이, 평생 갖고 있을 끼다!!!”

 

내 격한 행동에 밴드를 포장 그대로 툭 건넨 녀석은 돌아섰다.

또 훌쩍 먼저 가버리려는 건가 싶어 여전히 표정을 무너뜨린 채 따라붙는데, 자그마하면서도 또렷한 녀석의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고생하이소.”

 

 

 

……거의 속삭이는 것 같은, 퉁명스러운 말의 뒤로, 붉어진 네 귀라든가.

 

.

평생 고생할 게.

 

 

.

.

.

 

[닌 그 자랑 할라고 전화한 기고.]

 

.”

 

소중하게 손에 쥔, 리스트밴드가 든 팩을 연신 만졌다.

발그레해졌던 녀석의 귓가만큼이나, 금방이라도 따스하게 달아오를 것만 같아.

 

[안 그래도 지금 전국 떨어져서 싱숭생숭 하구마. 닌 연애자랑이나 하고.]

 

연애자랑은 아닌디 말이제. 연애라…….”

 

내가 녀석에게 고백을 한다.

.

그 뒤의 일이 상상도 안 가네.

 

[- 하는 짓이데이. 내일이 준결승인데 오순도순 데이트.]

 

페어끼리 친목 다지는기 우쨌다꼬.”

 

[니네 감독이 내일 오더에 복식으로 넣어 준다든.]

 

아마 그럴 끼다. , 단식 강화한다고 히카루 빼고 시라이시랑 붙여 놓을 지도.”

 

[꼴 좋데이.]

 

뭐 임마야.”

 

유시 이 놈. 도쿄 강호인 다른 학교에, 1R에 져서 관동대회, 결국 전국 출장권도 따내지 못 하고 3학년 공식 경기를 마무리 했다.

투덜투덜 웃으며 아쉽지만 관동 결승이 기대된다 말했던 녀석.

 

내일 이긴데이.”

 

[그럼 질라고 했나?]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사촌이 답했다.

 

결승까지, 이길 끼다.”

 

[, 열심히 해서 우승하래이.]

 

. 무엇보다……

 

행운의 표지도 있고…….”

 

[아이다. 닌 기냥 공 맞고 뻗으래이.]

 

안 들려 안 들려.

 

오른 손에 쥔 노랗고, 검은 그것을 또 들여다봤다.

 

 

 

 

.

 

진짜 미치겠다.

 

 

 

 

 

# 1,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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