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가쿠] 변해가는 모든 것 중에서
With You
Written by Rine in Rine's Side
“커플은 사회악이야.”
“뭐꼬.”
내 말을 받은 건 이 부실에 유일하게 같이 있던 녀석이다.
턱을 괸 채 종이에 손장난을 하고 있는 동안, 녀석이 픽 웃었다.
“어리긴.”
의미 없이 끼적이는 펜은 연신 혼자 중얼대듯 종이를 채우고 있다.
심심해, 놀자고, 나쁜놈,
“커플은 좋은 거제. 왜냐면 내도 언젠간 커플이 될 테니까. 당연히 축복해줘야지.”
“뭐래.”
너야말로.
내가 말을 받았다.
부원이 백 단위인 테니스 코트의, 그 중 여덟만 안방처럼 쓸 수 있는 부실 안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그야 오늘은 부활동이 없는 날이니까.
“캐서, 시시도는.”
천연덕스럽게, 알면서 묻지 마.
안 그래도 횡횡한 기분에 눈을 흘기려니 녀석이 짐짓 웃음을 갈무리했다.
“혼자 이래 있어봐야 궁상 밖에 더 하드나.”
그래, 그 궁상 좀 피우겠다고.
오늘은 놀 기분이 아니야. 아까부터 연신 오는 다른 친구들의 문자도 들여다 볼 생각이 안 나.
뭔가 거리가 생긴 기분이다.
입을 삐죽이게 만드는 기쁜 소식.
근데 눈앞의 녀석에게 죽어도 애 같단 소린 듣고 싶지 않아서 표정관리하고 있으려니 아주 죽을 맛이다.
“닌 내 애인들은 괘념찮고 시시도한텐 와 삐죽이는데.”
가스나야. 찡그리지 말고.
휘적휘적 라켓과 잡다한 제 물건 들고 돌아다니며 묻는 목소리가 퍽이나 유쾌하고 무관심해서, 심드렁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랑 료는 전-혀 다르다고. 너야 어디 가서 뜯겨올 리 없지만, 료 녀석은 홀랑 벗겨먹기 좋은 단순함이잖아.”
단순, 열혈, 멍충이. 이렇게 끼적이고 있으려니 유시가 푸핫하고 웃었다.
“하기사 니만큼 앵알진 놈이 아이지, 가가.”
밉상, 변태, 바보. 끄적끄적 이번엔 유시 욕을 풀어내고 있으려니 나름 스트레스 해소가 되는 것 같았다.
“놀러나갈까, 가쿠토.”
자기 짐 정리 다 끝내놓은 녀석이 옆으로 다가왔다.
종이를 슥 훑더니 풋 웃는다. 웃어라 그래.
별로 놀러나갈 기분 아냐.
녀석이 내 머리에 손을 올렸다.
“어구. 가스나 힘이 똑 떨어졌네.”
“어.”
영혼이 방전됐어.
말없이 하는 대답에 녀석이 웃는 채로 머리를 슥슥 문질러왔다. 처음 봤을 때, 료 녀석을.
하지 말라고 쨍알대면서도 기운 없고 기분 나빠지면 머리 쓰다듬어 달라, 놀자 떼쓰는 나 때문에 녀석은 혼란스러워하고, 쑥스러워하다가 일 년 지나고서는 아주 우리들 셋 사이의 엄마가 되었다.
위로 형 밖에 없어서, 성격도 바보라서, 모든 걸 쑥스러워하는 무뚝뚝한 놈이 요즘 걔하고 잘 붙어 있는다 했더니. 일 년 전부터 그 애의 수다에 이끌리던 와중 또 그 듬직한 놈은 어느새 누군가의 남자친구가 돼 있었다.
내 앞의 이런 요령 좋은 놈이 아니니 진심 그대로겠지.
초등부서부터 붙어온 사이에 거리낄 게 생겼다는 게, 그것도 처음 있는 일이라, 그것도 료 녀석이라는 게.
“뭔가 싱숭생숭 해.”
분명 남의 일인데 내 일 같고 기쁜데 기분 나쁘고 그래.
머리를 뒤로 젖혔다.
천장 대신 유시 녀석 얼굴이 보였다.
나를 내려다보는 녀석의 얼굴은 오늘도 알 수 없는 싱글싱글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진지해질 땐 정상인 같은데, 기본적으로 6년간 보아온 이놈은…….
“푼수 같이 쳐다보지 마.”
녀석은 당장이라도 날 놀려먹고 싶은 듯한,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킥킥 웃었다.
쯧쯧. 저거 또 푼수 티 내고 있네.
“선배들, 여기 계셨어요?”
“아안녕ㅡ.”
오오토리가 이상하게 쳐다보든 말든 웃고 있는 놈 손을 잡아 옆으로 밀어냈다.
어색하게 쳐다보는 오오토리의 눈에 비치는 유시의 모습이란 괴짜란 천재족속의 이상행동이겠지만 실상은.
“푼수.”
“예?”
더도 덜도 않고 딱 그만큼이다.
고개를 젓고 화제를 돌렸다.
“기분 나쁘냐, 료 녀석이 솔로 탈출해서?”
“네?! 그럴 리가요,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근데 왜 그렇게 시무룩 해.”
그 말에 솔직한 놈이 뒷목을 긁었다. 머쓱한 듯.
“그냥… 뭔가 서운하고 아쉬워요. 앞으로는 시시도상한테 테니스가 일순위가 아닐 테고, 그만큼 예전만큼은 못 지낼 테고…….”
당사자도 아닌데 제가 이러고 있네요.
그렇게 대답하며 오오토리가 물어왔다.
“선배는 아무렇지 않으세요?”
“그야- 그런 걸로 삐지니 시무룩하니 할 사이 아니잖아. 십 년도 넘었고. 이런 걸로 새삼스러워질 리도 없고, 다 컸는데.”
유시 녀석이 격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연신 웃고 있던 터라 밭은 기침 정도로만 들렸지만.
야, 징징대는 건 네 앞이면 됐잖아. 중학생 때부터 봐온 후배 녀석이래도, 너하고 얘기할 때랑은 기본적으로 다르다고. 시크한 인생의 선배로 놔 둬. 감탄이라도 받게.
비록 나도 별 다를 건 없어도.
“역시 뭔가 다르네요.”
너 들어오기 1초 전만 해도 내가 삐쳐있었지만, 유일한 목격자는 유시뿐이니 상관없다.
나는 웃었다.
“유시, 놀러 가자.”
열여덟 살의 가을은 시작부터 크게 변화를 보인다.
우린 이제 서서히, 다시는 전처럼 지내지 못할 거란 걸 다들 느끼고 있었다.
테니스 하나에 목숨 걸고 덤벼서 끝장을 보고, 어울려서 합숙 가고, 별 거 아닌 걸로도 함께 있으면 웃겨서 좋아 죽고, 같이 하교 하고 같이 놀러 가고 같이 연습하고 일상을 어울리는 그런 걸.
그 와중에도 전혀 변하지 않을 놈은 내 뒤에서 연신 웃고 있다, 푼수 같이.
어쩌겠어, 이 바보 내가 데리고 살아야지.
“닌 내 아님 시집갈 데도 없을 기다, 가시나.”
“계속 웃기나 해, 변태야.”
이미 서로가 너무나 가까워서 떼어놓을 수가 없는데.
가을, 하늘이 높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