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短篇]/테니스의 왕자

[토리시시] 31일과 30일 下

린느  2017. 1. 31. 17:41

 

Someone love you       

Written by Rine in Rine's Side

 

 

 

 

도서관 들락거리던 어느 날, 문득 두리번거렸더니 녀석이 있었던 것과 같았다.

그 녀석이 온몸으로 좋아한다고 외치고 있던 걸 발견한 건.

어디까지나 발견이었다.

이미 그곳에 있는 순둥이를,

그 순둥이의 전력으로 외치는 좋아해요를 단지 어느 순간 발견한 것뿐이다.

 

 

 

 

뭐 드시고 싶으세요?”

 

…….”

 

반짝반짝 쳐다보는 오오토리의 눈을 시시도는 제대로 마주보지 못했다.

그래. 이것도 어제까지와 같다.

오오토리 쵸타로가 한결같이 저돌적인 것처럼, 시시도 료는 한결같이 낯간지러움에 약했다.

 

규동이나 먹자.”

 

!”

 

대형견과 붙어 다닌 지 어언 한 달여.

하루에 한 번 이상 문자 오가고, 한 번 이상 만나고, 한 번 이상 밥 먹는 것도 익숙해져버렸다.

밥시간 되면 자연스럽게 만나는데, 생각해보니까 나 여자 친구랑도 이렇게 안 만났는데?

시시도가 때마침 깨달음을 얻을까 말까하던 그 순간에, 타이밍 좋게도 오오토리가 말했다.

 

. 선배 식권이요.”

 

후문에서 별로 멀지 않은 체인 덮밥집은 늘 그렇듯 깔끔했고, 혼자 카운터에 서 있는 알바생도 늘 그렇듯 정신없어 보였다.

그에게 동전을 받아 식권을 뽑은 오오토리가 눈앞에서 종잇조각을 내밀고 있었다.

 

선배?”

 

아냐.”

 

그냥 잠깐 넋 나갔어.

차례로 식권을 내고, 곧바로 준비된 쟁반을 들고 파티션 옆자리를 잡았다.

음식 냄새 맡으니까 고픈 배가 더욱 난리를 친다. 식욕 왕성한 청년들답게 두 사람은 밥을 삼키듯 먹어치웠다.

 

다음 강의 뭐 있어?”

 

저 전공이요. 선배는요?”

 

강의는 없고, 연습이나 가려고.”

 

저도 연습 가고 싶어요.”

 

시시도를 따라 쫄래쫄래 들락거린 지 보름 만에 오오토리는 감독의 허락으로 입부했다.

평소에도 하드웨어는 좋다고 생각했지만, 라켓을 쥐자마자 곧장 랠리를 받아치는 폼이 제법이었다.

어쩐지 그 깐깐한 감독님이 나서서 들어오게 하더라니.

체육계열도 없는 대학교의 취미생활 동아리로 그냥저냥 남을 뻔 했던 테니스부를 전국 강호로 끌어올린 건 지금의 감독과 이상하게도 재주 좋은 레귤러들 덕이었다.

 

아침에 뛰고 힘들지도 않냐. 너도 참.”

에이. 그 정도로 수업 못 듣고 그런 일은 없어요.”

 

지금이야 그렇지만, 대회 기간 되면 너 땅을 치고 후회할지도 몰라. 하루 종일 코트에서 살다시피 할 테니까.”

 

괜찮아요. 다들 나오는 거잖아요. 선배 매일 보고 좋죠 뭐.”

 

.

순간 예리한 직감이 왔다.

주문 넣을 때 얻을 뻔했던 깨달음이 훅 다가와 뇌리를 스쳤다.

젓가락을 막 집은 채로 멈춘 시시도는 잠시 오오토리를 응시했다.

 

.”

 

?”

 

……아니다.”

 

혼란에 휩싸인 채 시시도는 툭하니 그를 불렀다가 입을 다물었다.

밥을 삼키듯이 다 먹고 일어나도록 오오토리는 평소처럼 조곤조곤 말을 걸었고, 시시도는 대강대강 대답했다.

사실 수다를 떨고 있을 정신은 아닌데, 본능적으로 별다른 티를 내지 않으려는 대응 덕이었다.

 

그럼 저녁에 봬요. 출석 때문에 가보겠습니다.”

 

오오토리가 손을 흔들며 사라지고 나서야 시시도의 어깨에서 힘이 풀렸다.

반사적으로 크게 숨을 들이켜고, 크게 내쉬었다.

 

,”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짜지. 정말인가. 정말이야. 진짜라고.

아니 쟤는 뭔 감정이 그렇게 물 흐르듯이.

그리고 말이야, 왜 본인은 티나든 말든 아무 생각 없고 오히려 내가! ! !

 

, 으와아아아아아아악!”

 

후문 앞 교정에서 시시도는 끝내 화르륵 타올랐다.

얼굴이 어찌나 빨개졌는지 그가 지른 소리에 돌아본 학생들이 빨간 얼굴을 보고 한 번 더 놀랄 정도였다.

순간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지른 뒤 시시도는 순식간에 제 손으로 자기 입을 막았다.

 

아 정말. 정말로 이게 뭐야. 뭐냐고.

 

…….”

 

자꾸만 입이 뻥긋뻥긋 열린다.

감당이 안 되는 낯부끄러움에 이성이 소리를 토해내려 하고 있었다.

초토화된 머릿속에 단 하나 겨우 생존한 도덕적 사고가 그것만큼은 겨우겨우 막고 있어 그는 입가를 가린 채 발을 재게 놀렸다.

 

일단 이 자리를 피하자. 그래. 일단 어딘가로 처박히는 거야.

 

 

 

 

한 달을 혼자 악악대다 슬그머니 진정한 시시도가 마침내, 변화 없이 계속되는 일상에 그만 너 나 좋아하지 않냐?”라는 말이 목구멍에 차올랐을 무렵.
때는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는 시간.

건물마다 형광등 불빛이 환하고 가로등 아래로 삼삼오오 학생들이 지나다니는 사이로 오오토리가 후문을 돌아 나왔다.

두 사람 다 오후 강의가 들은 날 저녁을 같이 먹는 것 역시 어느새 자리 잡은 무언의 약속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둘이 자주 다니는 카레 가게가 있었다.

 

선배. 오래 기다리셨어요?”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시시도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니. 뭐 먹을래?”

 

, 전 카레 우동하고 주먹밥이요.”

 

오면서 메뉴를 생각해둔 터라 바로 주문을 할 수 있었다.

물을 따르고, 물수건을 펴며 오오토리가 물었다.

 

연습 힘드셨어요? 피곤하신 것 같은데.”

 

아니. 별로 안 했어. 그냥 좀.”

 

크지 않은 가게 안은 계속해서 손님이 들어서고 있었다.

전부 같은 대학 학생들이었다.

카레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며 이것저것 시답잖은 대화가 이어지던 어느 순간, 번뜩 찾아온 직감에 시시도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오오토리를 바라봤다.

오오토리는 언제부터였는지, 시시도를 빤히 보고 있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합 다물었다. 평소라면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을 녀석의 얼굴에 긴장이 드리우는 것을 본 시시도가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거구나!

 

선배.”

 

모르고 들었다면 몰랐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예리한 시시도에겐 영락없이 떨림이 느껴지는 그를 불러왔다.

 

.”

 

평소처럼 대꾸한답시고 뱉은 말은 어쩐지 평소보다 배로 뚱한 목소리였다.

오오토리는 숨을 한 번 들이키고는, 그 말을 내뱉었다.

 

선배 오늘오늘 할 말이 있어요. 밥 먹고 잠시만, 잠시만 얘기해요.”

 

. 그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시도는 이후의 전개가 홀로 연상되어 백지가 된 머리로 고개만 끄덕였다.

 

? 어어. 그래.”

 

식후에 잠깐 대화하자는 말 하나로도 안심하는 오오토리를 앞에 두고, 카레를 먹는 내내 시시도는 번뇌에 휩싸였다.

아무리 봐도 그거지? 그거잖아? 야 드디어 말을 하긴 하는구나!

처음 눈치 챘을 때의 충격은 사라지고 부글부글 끓던 그래서 쟨 언제 말할 생각이지?’가 해소되어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그래. 오늘이구나.

 

식사를 마치고 물을 마시며 이제 막 수저를 내려놓는 오오토리를 한 번 보자, 정반대로 혈색이 핼쓱한 오오토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이 가엾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시시도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배 안 고파?”

 

, 아뇨. 다 먹었어요. 나갈까요?”

 

평소 같지 않게 벌떡 일어나는 모습마저 보고나자 이제는 귀엽기까지 했다.

오오토리의 심적 부담감을 완화시켜주고자, 시시도는 빠르게 가게를 나선 뒤 자리를 옮겼다.

여기쯤이면 괜찮겠지?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까지 빠르게 체크하고, 그는 오오토리 앞에 섰다.

그의 순한 후배는 이젠 아예 죽상이 된 얼굴이었다.

. 쟤도 긴장이라는 걸 하긴 하는구나.

그와 반대로 여유로운 시시도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오오토리가 말을 꺼내는 것에 숨을 죽였다.

 

선배 저 사실은.”

 

.”

 

…… 사실은,”

 

아무래도 말하기 어려운 듯 말하는데 끄는 법이 없는 녀석이 숨을 들이켰다.

시시도는 채근하지 않고 그저 기다렸다.

 

저 사실은 선배를 좋아합니다.”

 

그렇지!

마음 속의 시시도가 주먹을 쥐고 펄쩍 뛰었다.

초조함으로 숨을 멈춘 후배에게, 시시도는 평온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우리 오늘부터 사귀는 거냐?”

 

?”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인 듯 어리벙벙한 얼굴로 입을 벌린 오오토리 앞에서 시시도는 입술을 깨물고 싶은 낯간지러움을 참고 말했다.

 

나도 너 좋아해.”

 

나는 내가 널 좋아하는 걸 알아. 네가 날 좋아했던 것도 알아.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몇날 며칠, 그러니까, 그날로부터 한 달을 생각했으니까.

이미 마음 정리 다 했다는 것을 모르는 오오토리는 강아지 같은 눈을 화등잔 만하게 뜨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귀여워 시시도는 허리에 손을 올렸다.

 

사귀는 건 싫어?”

 

녀석이 부푸는 제 마음을 들고 조마조마 오가는 게 귀여워서 그저 기다렸다. 그 큰마음을 제 손으로 들고 오기를.

오오토리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달려들었다.

 

아니요!!!!”

 

이 무거운 놈이!

떨어져!

선배 거짓말하시는 거 아니죠? 아니죠?

넌 내가 거짓말치는 거 봤냐!

아뇨 진짜 좋아해요!

 

시시도가 무거움에 이를 갈며 밀어내는 동안 오오토리는 어쩔 줄 모르고 꼼지락댔다.

웃는 얼굴을 보며 시시도는 구겨지지도 않은 옷을 매만졌다.

나참. 누가 누구한테 거짓말 아니냐는 거야.

나야말로…….

 

투덜대다보니 확 붉어진 얼굴 탓에 시시도는 버럭 소리질렀다.

 

몰라 나머진 집에 가서 얘기해!”

 

성큼성큼 돌아서는 뒤로 오오토리가 바짝 쫓아왔다.

같이 가요! 선배 화났어요?!

젠장 이 눈치라고는 없는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