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치하] 너 없이【4】
Soluble Glass
Written by Rine in Rine's Side
“아. 여름 싫어! 여름 싫어!!”
불과 며칠 전, 여름휴가를 생각하며 즐거워하던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우울과 짜증이 한가득 쌓인 여자친구가 앉아 있다.
오늘은 정말 안 되겠다며 폭식하겠다고 하루 종일 투덜투덜거려서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만났는데 직업이 모델인 여자친구의 폭식은 슬프게도 두부 스테이크….
“스테이크~ 스테이크 맛있어~”
그나마도 내일은 비키니 촬영이 없어서 먹을 수 있는 거라는 치하야의 표정은 굉장히 시무룩했다. 그래도 고기 먹는 기분을 내고 싶은지, 아니면 세뇌중인 건지, 연신 ‘고기 맛있다’고 흥얼거리기를 반복하는 중이고. 맛있는 음식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의 직업이 모델이면, 뭔가, 보는 사람조차 안쓰러워진다. 특히 여름 시즌이 시작되면 노출 있는 의상 촬영이 매일이기 때문에…….
“그래도 안 먹으면 쓰러져.”
“내가 여름 시즌 달려보고 깨달은 건데, 안 쓰러지더라. 근데 어쩔 수 없는 게, 아무리 말라도 뭔가를 먹으면 배가 나온단 말이야. 촬영 있을 때는 굶는 수밖에 없어.”
별 생각 없었는데, 패션 계열은 생각보다 매우 가혹한 세계였다.
마음 같아선 팍팍 먹었으면 싶은데 그렇게 말해줄 수 없으니 마음만 심란해졌다.
복스럽단 말이 절로 나올 만큼 행복하게 먹던 치하야는 어느 정도 배가 찼는지 포크를 내려놓고 목을 축였다.
“뭐야. 나 때문에 같이 우울해지는 건 싫어.”
“아니야. 안 우울해.”
“그럼 왜 그래.”
“걱정되니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테이블을 톡톡 치고 내 손을 펼쳤다. 치하야는 곧장 손을 마주 올렸다. 하얗고 가는 손을 맞잡고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치하야가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그냥 타이치… 타이치한테 투정 부리고 싶었던 거야.”
“당연히 그래야지. 치하야.”
내 말에 기분이 풀린 듯 치하야가 실없이 웃었다. 연일 있는 촬영 때문에 얼굴은 좀 더 갸름하게 살이 빠져 있었다. 나름대로 변장이랍시고 낀 약하게 색깔이 들어간 안경은 어색하지 않게 패션 아이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참. 나 내일 무슨 촬영하게?”
“모르겠는데? 왜, 뭔데?”
치하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작게 외쳤다.
“유카타!! 여름 축제 상품. 엄청 화려하겠지?”
“나도 기대되네. 이것저것 많이 입어볼 수 있겠다.”
“응 그래서 기대돼! 예쁜 옷 기억했다 주문해야지. 타이치랑 여름 축제 가게~”
나랑 여름 휴가 가기로 했잖아.
치하야가 어째서인지, 당차면서도 붉어진 얼굴로 소근거렸다.
색안경 밑 뺨이 한층 더 붉어졌다. 나까지 덩달아 얼굴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래. 날만 잡으면 바로 가자.”
오키나와 가고 싶다며?
치하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안경테를 다른 손으로 매만진다.
나는 잡은 손을 더욱 꼭 쥐었다.
계속 이러다간 밥도 마저 못 먹고 얼굴은 터져버리겠는걸.
잡았던 손을 간질이듯 힘을 풀었다.
“자. 내일 힘내려면 다 먹어야지.”
“으응. 타이치 더 안 먹어?”
“난 이거면 돼.”
“그래도 나 때문에 타이치도 두부 먹고. 미안해.”
“미안하긴, 나도 관리해야지.”
“타이치가?!”
타이치가 몸매를 신경 쓴다니 말도 안 돼. 꾸준히 슬랜더였으면서. 치하야가 단숨에 쏘아붙였다. 음 그래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 건지 잘 알겠다.
“타이치 몸선이 얼마나 예쁜데. 골반도 좁아서 정장 입으면 핏이…”
헉.
솔직함이 최대 장점이자 함정인 치하야가 순간 흥분해 마음의 소리를 곧이곧대로 뱉다 입을 연 채로 굳어버렸다.
방금 전까지 달아오른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얼음장이 된 치하야 앞에서, 나는 태연한 척 그러나 당황하기로는 치하야 못지않은 채 대꾸했다.
“아니. 너한테 잘 보이고 싶으니까.”
말을 하는 것까진 좋았는데. 맙소사. 나 역시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얼굴이 뜨거워졌다.
왼손을 들어 입가를 가린 채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라운지 레스토랑은 다들 자신들 대화에 빠져 보는 눈이 없었다. 다행이다.
아마 귀도 새빨개져 있을 것 같은데 귀까지 가릴 수도 없고.
치하야도 말이 없길래 다시 눈을 돌리니 아까 굳은 상태에서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 채였다.
세상에 귀여워.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서 그대로 웃어버리자 좀 정신이 돌아오는지 표정 변화가 생긴다. 귀여워서 어떡하면 좋지.
“아, 아무튼 타이치는 항상 멋지니까!”
본인이 뭐라고 하는지 모르면서 일단 말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주제를 바꿔버리고 싶은지 치하야가 급하게 다른 화제를 끄집어냈다.
“내, 내일 저녁에 라디오 출연도 있어. 들어줘.”
“응. 내가 사연도 넣을게.”
“뭐라고 넣을 건데~?”
“‘치하야씨 너무 예뻐요. 오랜 팬이에요. ‘타이치군’이라고 한 번 불러주세요.’ 이렇게?”
치하야가 으아아아아아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양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까 내가 그랬듯 이번엔 치하야의 양쪽 귀가 새빨개졌다. 가려진 얼굴도 아마 그렇지 않을까? 치하야가 나 때문에 부끄러워 한다는 게 즐겁고 귀여워 절로 웃음이 났다.
치하야의 접시도 비워져서,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러 디저트를 주문했다.
늦은 시간이니 커피 대신 차로.
“너 이렇지 않았잖아.”
“뭐가?”
“엄청 바람둥이 같아.”
“내가?”
난 모르겠는데? 그 말에 치하야는 입술만 부루퉁하니 내밀 뿐이었다.
내가 바람둥이라니, 나야말로 책 말고는 모르는 샌님인데.
하지만 치하야는 전혀 납득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더 설명해주지도 않고.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보였다니 뭐,
“난 치하야 말고 모르는데.”
“안 돼 그만해.”
밖이었으면 입을 막아버렸을 기세로 치하야가 손가락 엑스자를 그렸다.
재밌어서 웃자 치하야가 삐진 채 ‘그만하라니까’ 눈을 흘긴다. 귀여워서 더 하고 싶지만 이쯤에서 그만해야겠지 싶어 더 토 달지 않고 알았다고 대답했다.
“하여튼 라디오 들어줘야 해. 끝나고 전화해서 검사할 거야.”
“알았어.”
치하야는 쇼에 서는 것 말고도 커머셜 활동이 많은데, 약간 천운이 도운 기회를 타 인지도를 조금이나마 알린 덕이었다. 하루에도 수많은 모델들이 데뷔하는 연예계에서 다른 활동 없이 모델로서 인지도를 얻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것도 쇼에 오르지도 않은 신인 때. 하지만 운도 실력인 세계에서 치하야는 나름 괜찮은 실력을 업고 데뷔한 셈이다.
덕분에 TV는 아니더라도 라디오 게스트로 종종 출연하고 있었다.
밝고 말이 끊이지 않는 입담이라 꾸준히 일도 들어오고 있고. 언젠가 라디오 DJ도 해보고 싶다고 하는 걸 보니 본인도 좋아하는 듯싶었다. 어느새 자기 일 챙기며 어엿한 프로로 살고 있는 걸 볼 때마다 기분이 새롭다.
전에는, 그러니까, 전의 연애에서는,
치하야는 감정적으로 힘들어하고 나도 여유가 없어지고 있었다.
단지 우리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환경이 급하고 어렵게 변하고 있기도 했으니까.
모든 게 낯설고 무섭고 그 와중에 상대에겐 여유가 없어져 서로 상처주기만 하고 그게 또 무섭고 했던, 그런 전의 연애와는 또 다른 모습이 서로에게서 보일 때마다 치하야도 나도 더욱 손을 맞잡는다.
지금도 나는 치하야의 손을 다시 꾹 쥐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많이 컸구나. 많이 달라졌구나.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치하야의 눈은 전과 같았다. 치하야가 보는 내 눈도 같지 않을까.
너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모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