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D] 제 13장 [라피스x엘] 꽃과 나비 上
Merry me, El ?
Written by Rine in Rine's Side
솔트레테 제국력 118년.
물의 나라로 유명한 제국은 오십 년만에 내려온 신탁에 술렁였다.
물의 나라지만 너무 강한 물의 기운을 완화하기 위해 불의 용족으로서 제국을 다스리게 한 주신의 뜻에 따라 화룡족을 모시고 있는 국가 솔트레테.
그 나라엔 온 제국민으로부터 사랑 받고 찬양 받는 왕자, 푸른 머리칼의 엘퀴네스가 있었다.
그 아름다움에 홀리고, 향기에 취하며, 마음씨에 반한다는 그는 비단 솔트레테 뿐이 아닌 대륙의 인사였다.
그 엘퀴네스의 궁은 지금, 굉장한 마이너스 기운에 휩싸여 있었다.
“왕자님… 우리들의 여신이…….”
“어흑. 여신님이 가시면 누굴 보고 살라고…….”
눈물을 쏟는 이들은 궁의 시종과 병사들.
그들은 현재 온 제국민과 똑같이 펑펑 울고 있었다.
원인이 된 신탁인즉, 제 2왕자 엘퀴네스를 이번 기원에 제물로 선택한다는 뜻이었다.
그 소식이 나라에 퍼지고 한 시간 만에 온 대륙은 시름에 잠겼다. 그의 인기를 실감케 해주는 일이었다.
그 혼란 속에서, 당사자인 엘퀴네스는 정작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니, 얼떨떨해서 생각을 못 했다는 게 맞을 듯 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기원제가 이뤄지는 날. 옷자락이 긴 예복을 입은 엘은 마지막으로 모든 치장을 다 해드리겠다는 시녀들의 손에 잡혀 온갖 장신구와 향에 휩싸여 있었다.
금실과 사파이어, 은실, 자수로 화려한 예복을 끌며 엘은 울먹이는 시녀들과 인사를 나누고 제단으로 나아갔다.
제단에서 제를 올린 후 엘은 혼자서 제전 뒷쪽, 용족이 현신하는 에바스 에덴으로 이동하게 되어 있었다.
엘은 실감하지 못하는 멍한 상태에서 지인들과 작별했다. 친구인 시벨리우스는 너무 흥분한 탓에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뺄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부모님과 작별한 엘은 근원을 알 수 없는 꽃으로 가득 찬 에바스 에덴에 홀로 서 있었다.
“아…….”
남 일과 같이 느껴지던 정신이 혼자 있는 시간이 지날수록 또렷해 졌다.
헉. 내가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는 거지?
⁂
“라―피―스∼”
한가롭게 누워 파랗기만 한 하늘을 올려보고 있던 붉은 장발의 사내가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점점 다가올수록 인상이 더욱 구겨진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소리의 주체는 새카만 머리칼의 소년이었다.
눈동자 가득 쾌활함을 품은 소년이 노래 부르듯이 말했다.
“오늘 우리 라피스가 신부 맞으러 가는 날이지?”
“헛소리하고 있네, 영감탱이랑 같은 말 하지 마!”
저렇게 아이처럼 웃어도 실상은 제 아비의 친구인 녀석이었다. 청년, 라피스는 자신의 대부에게 버럭 소리 질렀다.
“들리는 말로는 공주라더라, 완전 여신으로 추앙 받는대. 본인은 별 생각 없다는 거 같지만.”
“남잔데 무슨 공주? 얼어 죽을.”
라피스의 외침은 전혀 개의치 않고 그의 대부, 트로웰은 이어 설명했다. 무시가 분명한 태도에 됐다, 됐어, 포기한 라피스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라피스의 대답에 트로웰은 씨익 웃었다.
“헤에, 라피스. 관심 없는 것처럼 굴더니, 안 그런 척 하면서도 신경 쓰고 있었구나?”
그러면서 웃는다. 라피스는 벌떡 일어났다.
“네가 요 일주일간 계속 옆에서 떠들었잖아! 뭔 개소리야!”
“어허. 부끄러워 할 것 없어. 넌 한창 때의 나이니까.”
“난 삼천 살이야! 이건 범죄라고! 인간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괜찮아. 여기에선 다들 준 신체화 되니까.”
뭐라고 외치건 웃으며 받아친다. 애초에 아버지 라이칸을 충동질 해 이 웃기지도 않은 일을 벌인 게 바로 저 작자니 할 말 다 한 거다.
“음… 이제 슬슬 내려가는 게 좋겠다. 라피, 성질부리지 말고 착하게, 알았지?”
트로웰이 하트 모양 보석을 태양에 비춰 보며 말했다. 라피스는 ‘이제라도 이런 미친 짓 무를 생각은 없어?’라 말하듯 그를 쳐다봤다.
트로웰은 못 본 척 그의 등을 밀었다.
“자아, 어서 갔다 와. 예비 신랑~”
‘어차피 양성체인데 뭐 어떠냐.’
처음 라이칸이 그를 불러 다짜고짜 ‘이주 뒤가 네 혼인일이다’라 했을 때, 라피스는 정말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의 건강을 염려했었다.
용족이라도 노망은 피할 수 없군. 하며 선심 쓰듯 아버지 이젠 쉬시라고 부드러운 권유까지 했었다.
그런 라피스의 말을 들은 척 만 척 하며 라이칸은 말했다.
더 이상 네가 어슬렁거리며 쓸데없는 연구에나 골몰하는 꼴도 보기 싫다. 마침 네 나이도 적당하니 고운 사람 데려다 책임감이 뭔지 배우면서 얌전히 살아라.
그에 라피스는 어떤 미친놈이 제 자식 나한테 준대, 라며 시니컬하게 비꼬았다.
걱정 마라, 따를 수밖에 없는 이니까. 라이칸은 그렇게 말하며 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열 받으니 저리 가라고 했다.
제 아비를 대신해 설명해 준 트로웰에게서 그 따를 수밖에 없는 불쌍한 사람에 대해 들은 라피스는 찝찝함을 떨치지 못했다.
이 무슨 쓸데없는 짓인가.
‘뭐, 누구라도 상관없지.’
라피스는 애써 가볍게 생각하며 기분을 띄우려 했다. 어울리지 않게 무슨, 고양이가 쥐 생각해 주는 것도 아니고.
발을 내딛음으로 그들이 그나마 편히 존재할 수 있는 공간, 에바스 에덴으로 내려온 라피스는 물망초를 괜히 밟아 버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초록색 풀밭 위로 형체가 보였다. 앉아있음으로 인해 바닥에 내려앉듯 드리워진 하늘빛, 혹은 시원한 물빛의 머리카락.
하얀 비단에 사파이어와 금실 등으로 장식한 긴 예복을 입은 저 이가 누군지 라피스는 짐작이 갔다.
“엘퀴네스.”
“네?”
성큼성큼 단번에 다가간 라피스가 삐딱하게 서서 말했다. 넋 놓고 있던 그가 부름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쳐다봤다.
흐음.
전체적으로 어린 느낌이었다. 머리색과 같이 푸른 눈은 순하게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얀 얼굴에 대조적으로 입술이 붉었다.
사람과 친한 아기 강아지 같은 느낌.
“괜찮은데?”
덧붙여 아방한 모습이 그의 구미에도 잘 맞았다.
잠시 눈을 깜박이던 엘퀴네스가 말했다.
“뭐가 괜찮아요?”
“너. 이제 일어나지? 슬슬 올라가야 해.”
멍하니 바라보던 그가 정신이 점점 드는지 서서히 표정을 굳혀갔다.
그 모습을 보며 라피스는 심술궂게 한 마디 덧붙였다.
“신부가 늦어서야 쓰나.”
“신… 부? 누가? 저요?”
다급하게 묻는 엘퀴네스에게 라피스는 능글맞은 웃음을 꺼내들며 한쪽 손을 내밀었다.
“사이좋게 남편 손 잡고 가면 더 좋고.”
어쩔 줄 몰라 하거나 새빨갛게 얼굴이 달아오를 거라 생각하며 속으로 피식 웃던 라피스는 예상을 깨고 그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은 채 부들부들 떨기만 하자 의아함에 휩싸였다.
“어이, 이봐, 엘퀴네…….”
“손 치워, 이 사기꾼아!”
철썩.
그에게 뻗은 손이 강한 힘에 타격음을 내며 내쳐졌다.
순식간에 기세가 사나워진 엘퀴네스가 큰 눈을 치켜뜨고 외쳤다.
“무슨 헛소리야! 이게 처음 봤을 때부터 말이 반토막이더니 이젠 사람을 놀려?!”
라피스는 고운 목소리가 자신을 향해 어이없다는 듯, 짜증을 담아 외치는 말에 표정을 굳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퀴네스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듣는 사람 기분 나쁘게 알 수 없는 말만 해대더니 뭐? 신부? 남편? 쇼를 한다, 유괴 처음 해 보냐, 너? 그래서 작업 멘트(?)가 없어? 별 꼴 다 보겠네. 야, 그냥 살던 대로 살아라. 저리 가. 가.”
훠이훠이 손까지 저어 쫓으려 하며 엘퀴네스는 상대하느라 일으켰던 몸을 다시 바닥에 앉혔다.
안 그래도 제대로 못 먹어서 힘없는데 이젠 배고파서 화가 난다.
“엘퀴네스.”
아직 안 간 건가, 그 정신병자.
엘퀴네스는 기운 없이 눈만 그에게 향했다.
마주한 그는 싸늘한 무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가 에바스 에덴이었단 게 생각났다. 그럼 저 사람은… 용족의 사자인가? 아, 이거 뭔가 곤란해지는 거 아냐?
“결혼이 싫으면…….”
하지만 저 사람이 먼저 기분 나쁘게 했단 말이야.
“일단 내 애인해라.”
뭐라고?
⁂
엘퀴네스는 눈가를 따갑게 하며 편안한 수면을 방해하는 햇살에 끄응, 몸을 이불 속으로 굴러 숨었다.
하지만 점점 이불 속까지 환하게 하며 따라붙는 볕에 결국은 벌떡 일어났다.
“졸… 립다…….”
우웅. 눈에 방울방울 맺힌 졸음을 쫓으려 그는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려 수건을 꺼내든 엘퀴네스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크게 대답했다.
“알았어―”
날 때부터 왕족으로 나 직접 자질구레한 일 한 번 해본 적 없는 엘퀴네스였다. 그렇지만 그는, 시종 하나 없는 이 세계에서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나름대로 편안히 지내는 중이었다.
그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이는, 최악의 첫만남, 라피스였다.
무섭도록 굳은 얼굴로 ‘사귀자’고 한 라피스에게서 ‘사귈래, 맞을래, 죽을래’의 기색을 읽은 엘퀴네스는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였다.
그러나 연애 따위 신경도 안 쓸 것 같던 그는 이곳에 들어선 뒤 그 생각을 뒤집는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수장이 준 거처의 동거인은 라피스 라즐리라는 그 자였다. 덧붙여 수장의 아들.
자신을 ‘라피’ 라 부르면 된다는 그는 애인 사이의 애칭이라며 엘퀴네스에게 ‘엘’ 이라 칭하겠다고 했다.
라피스는 첫 날, 여긴 내 방, 저긴 너. 이렇게 공간을 나누는 엘에게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물러났다.
그리고 그 뒤 그가 엘을 대하는 태도는 무뚝뚝했지만 다정했다.
아침, 점심, 저녁의 식사준비. 한낮의 차. 집안 청소. (대개 마법으로 해치웠지만)
서재에 엘이 말한 취향의 책을 준비해 주었고, 다른 이들에게 소개시켜주는 일도 책임져 주었다.
무엇보다 이젠 헛소리를 안 한다는 게 특히 엘은 맘에 들었다.
물기만 대충 털어낸 머리를 비녀로 둘둘 말아 올리며 엘은 주방으로 갔다.
“잘 잤어, 엘?”
아직 적응 못 한 게 있다면 잦은 접촉.
새삼스럽게 붉어지는 느낌에 엘은 또다시 몸을 틀어 피했다.
라피스는 흠, 소리만 내고 돌아섰다.
처음의 오만한 눈길이라거나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홀연히 자취를 감춘 라피스는 의외로 ‘생각’ 을 할 줄 알아서, 엘의 성격에 잘 어울려 들었다.
다정하다 느껴질 배려에 원래 낯을 잘 가리지 않는 엘은 점점 그를 편안히 대했다.
게다가 용족 중에서도 단연 돋보인다는 그의 마법실력은 감탄할 만한 것으로 엘은 물의 운용을 이용한 패턴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었다.
“라피…….”
식탁 가까이 가던 엘은 들리는 말소리에 라피스를 소리쳐 부르려다 입을 닫았다.
“신혼? 뭐? 야, 너 언제 훔쳐봤어. 죽고 싶지?”
라피스는 엘에게서 비스듬히 옆모습을 보인 채 서 있었다. 그는 정면을 보며 누군가에게 짜증을 내고 있었다.
- 아니, 아버지가. 다 소문 났더만, 라피스가 홀딱 반해서 어쩔 줄 모른다고. 아버지가 오죽 놀랐으면 본인 기가 약해졌냐고 물으시더라.
“헛소리 작작들 해. 내가 어떻게 살건 뭔 상관이야. 꺼져.”
라피스는 험한 말을 던진 채 대화를 중단시켰다.
“라피스.”
“엘, 잘 잤어?”
엘은 라피스의 기색을 살피다 그를 부르며 자연스러운 척 식탁에 다가가 앉았다.
라피스가 가볍게 눈짓 했다.
“응. 어… 그런데 누구야?”
엘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척, 지나가는 어투로 물었다. 엘의 물음에 물을 따라 내밀며 라피스가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들었어?”
“아, 으응. 안 되는 거야?”
혹시 엿들었다고 오해 받는 건가(엄밀히 말하면 엿들은 게 맞지만) 싶어진 엘이 소심하게 물었다.
아 귀여워. 풉.
라피스는 엘이 알았다간 또다시 폭주할 푼수 같은 생각을 하며 그의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아니. 괜찮아.”
첫인상과 마찬가지로 소문 자자한 엘퀴네스는 부드러운 성격이었다. 유순한 품성의 그는 라피스와 얽히기 싫어서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라피, 안 먹어?”
집 안에서 피하면 얼마나 피할 수 있다고 볼을 부풀린 채 경계하는지.
“먼저 먹어.”
하나가 예쁘니 다 예쁘고 형이란 놈처럼 멍청한데 말만 많은 것도 아니고, 트로웰처럼 사사건건 귀찮게 하거나 정곡을 찌르는 것도 아니다.
라피스는 이 조용하면서 재밌는, 제국의 여신님께 엘이 짐작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빠져있었다.
엘이 궁금하단 기색을 온몸으로 풍기면서도 꾹꾹 눌러 담으며 그냥 빵만 우물거리는 것을 보며 라피스는 결국 웃고 말았다.
“큭… 엘, 너 그냥 알고 싶다고 물어 봐라.”
“……너야말로 그냥 웃고 싶으면 웃어.”
아침부터 서로 마주 보며 한바탕 웃고 난 후 식기를 이리저리 휘두르는 라피스를 보며 엘은 식탁에 앉은 채 문득 물었다.
“근데 라피스, 나랑 너랑 사귀는 거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라피스의 손끝이 움찔, 반응했다. 그는 애써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넌 내가 한 말들 다 귓등으로 들었냐.”
퉁명스럽게 말한 라피스는 엘의 기색을 살폈다. 어째 잠잠한 게 분위기가 좋지 않다. 말을 너무 험하게 한 건가, 혹은 아직 내가 싫은 건가 싶어 라피스는 답지 않게도 순식간에 침울해 졌다.
“엘…….”
“나 나갔다 올게.”
엘이 거친 소리를 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라피스는 뒤로 돌아 그를 붙잡았다.
“어디 가려고 그래?”
“내가 어딜가던. 내 맘이지.”
그렇지만… 라피스의 당황한 기색에도 아랑곳 않고 엘은 휙 하니 나갔다. 라피스에게 허망한 푸른 잔상만 남았다.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라피스는 처음으로 자신의 머리의 성능을 의심해 봤다.
요근래 자신이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거라도 있는 건가.
⁂
기세 좋게 집을 나온 엘이 있는 곳은 작은 숲 중앙의 샘이었다.
샘물은 엘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곳을 발견한 후로 엘은 매일 같이 샘을 들여다 봤다.
처음에 그가 본 건 친구들의 모습.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엘은 라피스의 모습이 계속해서 나타남에 의아해 했다.
깨닫지 못 했지만 그의 모습이 더욱 많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신경 쓰이기 시작하니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집에 들어가서 마주치는 라피스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괜히 민망해 얼굴이 붉어지려 했다.
이런 일 따위 겪어본 적 없는 엘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깊어지는 증세에 라피스를 피하기 시작했다.
아 더워…….
아침에 나와서 얼마나 있었던 걸까. 머리도, 하얀 피부도 전부 따끈따끈 하다 못 해 뜨거워짐에 엘은 비척비척 일어나 나무 그늘에 누웠다.
겉옷을 벗어 들어 살랑살랑 부채질 하듯 바람을 일으켜 보지만 이미 정수리까지 올라와 있는 볕을 몰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
게다가 배도 고파지기 시작했다. 당장 아늑하고 시원한 집으로 달려가 볶음밥이라도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일단 엘은 아침부터 집을 박차고 나온 입장이라 이제와 슬며시 들어가기엔 거북했다.
배고픈데 갈 곳이 없자 서러워진 엘은 제일 먼저 떠오른 라피스를 탓했다.
“나쁜 놈. 그렇다고 찾지도 않냐. 내가 갈 데가 어디 있다고. 난 저 때문에 집 떠나 여기서 사는데 좀 잘 해 주면 어디가 덧나?”
한 번 입이 떼어지니 엘은 끝도 없이 투덜댔다.
“변태 주제에, 살랑거리기나 하고. 배고파, 심심해, 친구들 보고 싶어… 난 찾지도 않고 또 혼자 책이나 읽고 있겠지, 신경도 안 쓰고.”
말하자니 더욱 서러워져 결국 엘은 눈물을 보였다.
어찌 됐건 다 너 때문이야.
엘은 답지 않게 어린애 같은 생각으로 흐르는 눈물을 합리화 했다. 그렇게 혼자 궁상 맞게 있기도 한 시간 남짓.
결국 엘은 한껏 불퉁해진 마음으로 일어났다. 그 자식이랑 말도 안 할 거야, 다짐하며 향하는 곳은 기세 좋게 나온 두 사람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