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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短篇]/테니스의 왕자

[오시가쿠] 15살의 수줍음

Do you like ?                 

Written by Rine in Rine's Side

 

 

 

숨기려고 했어.

정말로. 끝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려고.

너를 좋아하는 건 전적으로 내 문제니까, 너한테 폐 끼칠 수는 없다고 생각하니까.

너에게 말한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을 테니까.

 

, 사귄다거나 그런 건 전혀. 싫으니까.

정말로 숨기려고 했어.

그저 좋아하고, 때때로 마주치는 눈에 설레는 걸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받아넘기고, 너와 퍽 자연스럽게 대화하고는 홀로 되새기고.

정말로 나는.

그랬는데.

……-그거면 됐는데.

 

 

 

.

.

.

아으 닭살 돋아. 미치겠다.”

 

처음으로 본 로맨스 소설에 처음으로 책 보고 소름 끼친 날.

여러모로 잊히지 않을 날이다.

도저히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어서 나는 책을 덮어 숨기듯 껴안고 계산대로 향했다.

 

영수증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 저도 빨리 끝내줘서 감사해요.

종이 쇼핑백에 넣어준 책을 들고 후다닥 서점을 빠져나왔다.

누가 날 보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이리 혼자 당황스러워 하냐면, 내가 서점에서 몇 쪽 보지도 못하고 사들고 나온 책의 표지가 물씬 소녀 감성이 풍겨서.

 

키도 작고, 머리도 긴 편이라 여자애로 착각당하긴 하지만 어쨌든 난 남자애고, 15년을 남자아이로서 꿋꿋이 살아온 내 정신이 감당하기에 책은 너무나 소녀지심이었다.

, 괜히 샀나.

연습 없는 날. 수업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지나치던 서점에서 나는 예정에도 없던 책을, 그것도, 로맨스 소설을! 사고야 말았다.

 

진짜…….”

 

이거 왜 샀지? 미친 거 아닐까?

이미 샀으면서도 후회와 경악으로 범벅이 된 채 종이봉투를 웬수처럼 꾸깃꾸깃 잡아 쥐었다.

도저히 응시할 수도 없이 부끄러워서, 내가 진짜, 아으.

 

? 가쿠토?”

 

빨리 집에 가서 봉인해 버려야지. 라고 생각하고 걸음을 빨리한 순간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우뚝 멈췄다. 왜 여기서 저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연습도 없고, 반도 달라서 자연히 오늘 같은 날이면 따로 하교하는 저 오시타리 유시란 인간이 왜 이 근처를 배회하고 있는 거냐고.

 

가쿠토! 야 임마!”

 

내가 돌아보지 않자 더 큰 목소리로 불러재낀다.

나는 뒤돌아볼까 말까 망설이는 자신을 탓했다.

나참. 뭘 그렇게 우물쭈물 하는 거야.

내 모습이 겉에서 보기에 어떨지 생각하니…….

그렇게 나를 타이르면서도 여전히 몸에서 긴장은 풀리지 않는다.

 

손에 든 종이봉투를 뒤로 물리면서 나는 주춤거리는 티를 내지 않으려, 휙 돌아보았다.

 

너 왜 여기 있냐?”

 

왜 하필! 이런 때에! 이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냐고!

바득바득 외치지 않은 소리를 죽이며 물었다. 유시, 효테이가 자랑하는 테니스부 레귤러 멤버이자 소문 자자한 바람둥이는 오늘도 도수 없는 안경을 낀 채 뒷머리를 긁적이며 한 손으로는 크로스백을 붙잡고 있었다.

 

세탁소 다녀오라고 신신당부 들었다꼬. 니는 와 여태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니 또,”

 

눈을 가늘게 뜨고 내려다본다.

키 차이가 워낙 분명하니까 어쩔 수 없지만, 나는 꿋꿋이 당당한 표정을 지은 채 ? ?’ 재촉하며 그를 올려다봤다.

 

가출했구마. 그제? 쯧쯧.”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찬 유시가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키도, 손도 모두 큰 녀석이 머리 위를 툭툭 누른다.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아니거든!”

 

넌 내가 가출만 하는 줄 아냐!

그럼 아이가? 맞는데 와 또 소리는 지르고.

아니거든!!!!!!!!!!!

 

웃기지도 않아서. 코웃음을 치며 유시 녀석의 손을 가볍게 쳐냈다.

한사코 아니라고 하니 유시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흠, 하고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내 표정을 살피는 게 긴가민가 하는 모양이다.

 

집 갈 거야! 비켜!”

 

왜 길은 막고 있어!

씩씩대며 유시를 지나쳤다.

내가 뭐 가출 청소년이냐고. 가출 빈도가 높을 뿐이지.

 

가쿠토!”

 

!”

 

두 걸음이나 갔을까. 그 긴 팔로 내 옷깃을 잡아채 멈춰 세운 유시가 싱글싱글 웃었다.

오도 가도 못 하게 왜 연신 불러재끼는 건데.

미간을 찌푸리고 틱틱 대는 태도에 유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다시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미안타. 저녁 먹고 가지 그라노, 멜론도 있는데.”

 

이바라키 현에 사는 친척이 멜론을 잔뜩 보내줘서 처치 곤란일 정도라고 잡아끄는 유시의 말에 솔깃해서 내 옷깃을 잡고 있는 유시 녀석의 팔을 덥석 잡았다.

 

갈래!”

 

,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얼른 집으로 가려고 했지만 예정이야 언제든 변경 되는 거지.

유시의 친척이 재배해 보내주는 멜론은 여태 많이 먹었었지만 항상 달콤함이 다른 멜론들의 배는 돼서, 절대 놓칠 수 없는 것이다.

이바라키 현이 일본 최대 멜론 생산지이니만큼 마트에서 파는 것도 대개 이바라키 현 재배 작물이지만, 유시네 집에 들어오는 멜론과 시장에 널린 멜론은 맛이 틀렸다.

 

그래, 그래.”

 

고개를 돌려 보면, 어쩐지 기분 나쁘게도 웃고 있는 꼴이 요만큼 거슬렸지만.

어쨌든 멜론이다 이거지?

 

시침은 5, 분침은 8을 가리키고 있다.

날씨 좋고, 길가는 한산하고, 옆에 있는 녀석도 나쁘지 않고.

 

근데 들고 있는 건 뭔데?”

 

몰라도 돼.”

 

이 빌어먹을 책 빼고는 다 괜찮아!

 

어머, 가쿠토. 어서 오렴.”

 

안녕하세요!”

 

긴 머리를 머리핀으로 틀어 올린 여성, 유시네 어머님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매우 고운 흰 얼굴에 보드라운 색채의 눈동자를 가진 아주머니는 허스키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분이다. 유시네 아버님은 어딘가 단단한 성인 남성의 느낌이 강하다면, 어머님은 부드러운 성인 여성의 느낌이 강한 타입. 하여튼 간에 말하자면, 두 분 다 선남선녀라는 거.

그런데다 성격까지 다정다감하고 훌륭한 인품이니, 아무리 봐도 유시 녀석은 돌연변이가 분명했다.

 

누나는?”

 

도서관이라고 했는데. 늦지 않게 들어올 거야.”

 

가쿠토 또 가출한 거니? 어쨌든 저녁 같이 먹을 거지?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 유일한 돌연변이는 아니다.

정말로 지적이고 단정한 오시타리 누나는, 이 가정에서 가장 폭력적인 분이니까.

 

가출 아니에요, 이번에는- 진짜로 그냥 만나서 놀러온 건데.”

 

그래, 그래도 오래 있다가 가. 가쿠토, 머리가 좀 자랐네.”

 

, 슬슬 잘라야 할 때고.”

 

내 가방과 쇼핑백까지 자연스럽게 들고 자기 방으로 사라진 유시 녀석을 차치하고, 이틀 만에 보는 어머님과 마주 앉아 도란도란 수다를 떨었다.

꼭 우리 누나처럼, 아주머니는 매우 편한 사람이다.

 

가족 분들은 다 잘 계시고?”

 

. , 히코가 조금 다쳤어요. 무릎을 까서 들어왔는데 안 아프다고 해놓고는 누나가 약 발라주려고 다가가니까 눈이 글썽글썽해지는 거 있죠? 애기 같다고 누나가 엄청 웃었어요.”

 

울었니?”

 

울지는 않았어요. 글썽글썽해져서는 참았거든요. 입 떼면 눈물 떨굴 것 같았는지 누나랑 제가 놀려도 대꾸도 안 하더라고요.”

 

이럴 때 아주머니는, ‘동생 괴롭히면 못 써라거나 울리면 안 되지라거나,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상이 간다는 얼굴로 웃으면서,

 

나도 보고 싶다.”

 

다음엔 사진이라도 찍어올까요?”

 

어딘가 사악한 면이라고 해야 하나, 흔한 어른 같지 않다고 해야 하나. 어찌됐든 굉장히 좋은 어른이라는 건 똑같다. 친구 같은 어른. 어머님과 대화 하고 있으면 누나하고 저녁에 수다 떠는 것 같은 형식으로, 편하게 흘러간다.

가출하면 유시네 집으로 쳐들어오는 데엔, 이런 가정이기에 좋아서라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고. 단순히 유시 녀석이 제일 친한 친구란 건 제외하고.

 

오늘 아침엔 낙엽을 들고 도로 들어오는 거 있지? 학교 가다 말고. 엉뚱하다니까.”

 

설마 책 사이에 껴놓은 건 아니죠? 말려서 코팅하겠다거나.”

 

바로 맞췄네. 가을의 순정은 알 수가 없다니까. 남자는 가을을 탄다더니.”

 

보통은 안 그런다고요, 가을이라도. 그보다 유시는 가을 아니어도 항상 그러니까 유시가 이상한 것 같은데.”

 

. 그건 옛날부터 알고 있었어. 다만 가을이라 더 심해진 것 같아.”

 

맞아, 저번에도 길 가다가 흙 위에서 꼬물대는 벌레를 갑자기 쪼그리고 앉아선 진지하게 쳐다보더라고요.”

 

가쿠토가 고생이 많네. 옆에서 챙겨주려면 힘들잖아.”

 

, 상관없어요.”

 

이야기가 유시의 험담인지 뒷담화인지 그냥 관련된 얘기인지로 넘어갔을 무렵 옷도 갈아입고 샤워도 끝낸 당사자가 거실에 나타났다.

아예 머리까지 감은 유시는 안경을 벗은 채 수건을 목에 걸고 있었다.

 

신났네. 니 집이가?”

 

유시. 멜론.”

 

멜론으로 꼬셔놓고 멜론 구경도 못 하고 있었네. 그 말에 반응한 것은 유시가 아니라 어머님이었다.

 

차도 안 내주고 뭐 하고 있었지, . 그래 가쿠토, 멜론 많으니까 많이 먹고 집에도 가져가.”

 

어머님의 말투는 표준어지만 억양에는 칸사이벤이 섞여 있다. 어머님은 간토 출신인데, 대학교를 오사카로 간 덕에 지금의 아버님을 만나 결혼하셨다고. 표준어와 칸사이벤을 모두 구사하는 어머님은 상황과 지역에 따라 능수능란하게 말투를 변경하곤 했다.

 

핫초코?”

 

마시멜로 넣어서요!”

 

유시는 어머님이 시키는 대로 멜론을 가지러 가고, 어머님은 주방에서 찻물을 올렸다.

내가 찾는 것은 대개 핫초코, 달달한 허브티, 우롱차 같은 것. 녹차는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니까. 조금 자랑해보자면, 내 취향에 맞게 어머님은 아예 핫초코가 떨어지지 않게 구비하고 계신다. 오시타리 집안에서 핫초코 찾는 사람은 없지만.

가쿠토 오면 먹여야 하니까. 라고 말하시며 웃은 어머님은 진정 천사다, 천사.

 

야아.”

 

소파는 놔두고, 그 소파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아 곧 어머니가 따뜻하게 타준 핫초코를 받고 있으려니 멜론 손질을 끝낸 유시가 쟁반을 들고 왔다.

아까 멜론을 자를 때부터 냄새가 장난 아니었는데, 지금 보니 아주.

 

-!”

 

달아. 뜨거워서 향만 마신 핫초코하고는 비교도 안 되게 상큼한 달콤함이다.

냉장고에 넣어뒀던 덕에 차갑고 시원한 멜론은 향기롭고, 달콤했다.

엄청. 정말로.

 

멜론으로 배 채우면 저녁을 못 먹잖니. 집에 갈 때 유시보고 들어다주라고 할 테니까 마음껏 가져가렴.”

 

마음만으론 지금 한 통 더 먹이고 싶지만. 저녁 먹어야지. 어머님이 웃었다.

달고, 부드럽고, 잘 익어서 순식간에 비워버린 접시.

포크를 입에 물고 있으려니 유시가 한 마디 했다.

 

니 그러다 다친데이. 내려놓고 초코나 먹지.”

 

.”

 

별 의미 없던 행동이라 금방 포크를 내리고 머그를 들었다.

통통하고 묵직한 잔은 따끈따끈한 온도를 품고 있다.

 

저녁은 간단하게 만들어볼까. 유시, 누나한테 문자 좀 해보렴, 언제 오나.”

 

시간이 언제 그렇게 빨리 갔지.

벌써 여섯 시 반이다. 유시네 집 왔을 때만 해도 여섯 시가 안 됐었는데.

생각난 김에 핸드폰을 꺼내 누나에게 문자를 했다.

지금쯤이면 집에 오는 중일 테니까 집에 말해주겠지.

평상시에, 우리 집에서 가장 일찍 일어나는 건 나고 가장 일찍 들어오는 건 누나다.

언제나 말하지만, 수험생 주제에 왜 가장 늦게 일어나고 가장 일찍 돌아오는 건데. 어떻게.

 

저녁은 으음, 간단하게 할까. 가쿠토 먹고 싶은 거 없니?”

 

없어요. 어머님이 해주는 건 다 맛있는데, 진짜로.”

 

먹고 싶다고 하면 마트라도 당장 나가실 행동력의 어머님을 말렸다. 주방으로 향하는 어머님을 따라 종종 걸어가니 어머님이 웃었다.

유시 녀석도 키가 크고, 아버님도 키가 크고, 누님도 키가 크고, 어머님도 키가 크다.

이 집안은 죄다 키가 컸다.

170에 가까운 늘씬한 키의 어머님이 항상 입가에 매달린 웃음을 곱게 지으셨다.

 

도와주려고?”

 

그럼요.”

 

다 먹은 포크와 멜론 그릇을 가지고 싱크대 앞에 섰다. 정작 이 집안 장남인 유시 녀석은 소파에 앉아서 하품을 하고 있었다.

어머님이 냉장고를 열어봤다.

 

좋아 그럼, 만들어볼까.”

 

640.

땅거미는 이미 어둑어둑하게 져버린 뒤다.

부엌에 있는 창문으로 한껏 컴컴하진 밖이 보였다.

엄청나게 달콤한 저녁이다.

 

 

 

 

유부초밥(いなりずし)과 면볶음밥(そばめし).

주방에서 저녁 준비하는 어머님 옆에서 투닥투닥 놀다가, 이내 유시 방으로 가서는 투닥투닥 놀다가, 누나가 와서 투닥투닥 놀다가 식탁으로 모였다.

 

유시네 집에서 저녁 먹고 간다고 하니까 ! 잘 놀다 와!’ 가 끝인 답장을 해보인 우리 누나. 아마 엄마도 별 말 없었을 거다. 한두 번이 아니니까.

그게 놀러가는 의미든 집을 박차고 나오는 의미든.

우리 식구만큼은 아니지만, 우리 식구만큼 익숙한 집의 식탁 의자를 빼고 앉으니 아버님 빼고는 모두. 대학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의사인 아버님의 퇴근 시간은 늦은 편이라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단체로 젓가락을 들고 식전 인사를 끝내고 나서는, 연신 떠들며 젓가락을 놀리기 바빴다.

 

누나 공부하려고? 도서관 왜 가?”

 

. 공부. 공부도 하고 맘에 든 남자도 보러.”

 

어쩐지 손톱에 색칠 좀 했더라.

벗겨질까 신경 쓰는 것 때문에 귀찮아서 안 한다는 사람이.

우아하게 긴 손가락으로 젓가락을 놀리는 누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맘에 든 남자라니. 누나가? 엄청난 수재에 잘 생기고 똑부러진 남자인가. 그럼 현실에 없지 않아?”

 

유시가 장난 반 하는 마음으로 쓰는 안경이라면, 누나는 진짜로 낮은 시력 때문에 안경을 착용 중이다. 선호하는 옷은 라운드 티에 촉감이 좋은 단정한 면바지.

오늘도 라운드 티 위에 체크무늬 셔츠에, 유시랑 비슷한 검푸른 머리를 하나로 묶은 누나는 안경 너머로 나를 보며 대꾸했다.

 

잘 모르겠지만, 평범하게 생겼어. 피부가 하얀 거만 빼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으니까. 공부는 모르겠는데, 잘 모르니까. 눈길이 가는 것뿐이지 아직 말도 한 번 못 해봤어.”

 

말 해볼 일도 없잖아. 도서관에서.

누나의 말이 의아했다.

 

그럼 왜 마음에 드는데?”

 

저번에 혼자서,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 빼들고는 아 뜨거!’ 하며 화들짝 놀라서 쩔쩔 매는데 그게 귀여워서.”

 

뭐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심드렁하게 말하는 누나의 표정은 매우 평온했다.

유시는 눈을 반짝였고 어머님은 손뼉을 쳤다.

 

그런 이유였니? 어머나 너도 참, 그이를 닮아선 되게 쓸모없는 취향이구나.”

 

참고로 말하자면 이 집안에서 로맨스를 선호하는 건 어머님을 제외하는 세 명뿐이었다.

 

, 맘에 든다고는 해도 말 걸 일도 없고 해서 별로 다른 일 칠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누나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게 왜 귀여운지 이해가 안 되는 건 이중에 나뿐인가.

어머님도 생글생글 웃으며 쓸데없다고는 하지만 이해는 하시는 모양이고 유시는 흥미로워서 연신 질문을 던지고 있고.

나는 젓가락으로 유부초밥을 꾹꾹 눌렀다.

뭐가 귀엽고 뭐가 취향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 이 집안.

 

우롱차 마시겠냐는 어머님의 말에 주방에서 물이 끓는 동안 놀다가 차를 받아서 유시 방으로 들어갔다.

쟁반에 잔 두 개를 올린 채 기세등등하게 아무 생각 없이 들어온 나는 곧 유시가 골똘하게 쳐다보고 있는 책과 그 옆에 널브러진 갈색 쇼핑백을 보고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

 

손에 든 쟁반 안 떨어뜨린 게 어디야 싶을 정도로 기겁. 심장이 튀어 오른 채로 후다닥 달려 가 녀석의 손에서 책을 빼앗았다.

 

, , 이거, 이거 저기저기 있었던……!”

 

니 책 맞제? 별 일이구마. 니 로맨스도 읽었나? 이거 유명한 작간데.”

 

유명한 건 나도 알아! 추천 도서라고 점원이 들고 온 거라고! 아니 근데 이걸 왜 보고 있어!”

 

니 만났을 때부터 낑낑 댔잖노. 이때다 하고 훔쳐봤제.”

 

뭐 문제 있냐는 듯 안경을 밀어 올리는 모습이 진짜 밉상.

남이 보여주기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오히려 더 훔쳐보는 건 무슨 심보야.

이러니까 니가 나쁜놈 소리를 듣는 거다!

 

근디 가쿠토…… 낯간지러워 못 본다 카든 아가 이기는 왜 곱게 사들고 댕기고 있을까?”

 

건수 잡았다는 듯이 눈동자를 빛내며 입가엔 슬그머니 미소를 올리는 모습이 더더욱 밉상이다. 아오 진짜! 시시도도 아니고, 아토베도 아니고 왜 너야! 너냐고!

잊어버릴 때까지 주구장창 놀릴 거잖아!

잊어버리고 나서도 가끔 기억나면 두고두고 우려먹을 거잖아!

 

내 취향 아니야! 말해두는데 내가 보고 싶어서 산 거 아니라고! 미쳤냐!”

 

내 보곤 맨-날 미쳤다카드니 니는 뭐꼬. 됐다, 말해바라. 뭐 부끄럽노. 고작 로맨스 가지고.”

 

웃기지 마! 넌 부끄러워!”

 

단칼로 잘라냈다. 어디서 나랑 저를 같은 취급을 해.

난 네가 분홍색 표지에 둥글둥글 쓰인 제목의 책 들고, 지적인 사람처럼 다리 꼬고 앉아서 폼 잡고, 안경 올리며 볼 때마다 아는 체하기 부끄럽다고!

심각하게 들여다보다가 금방 여자 쳐다보고는 헤실대는 꼴에 가까이 가서 아는 사람 인증하는 거 부끄럽다고! 보통 중학생 남자애는 그러지 않는다고!

 

그럼 니 이긴 뭔데? 그케 부끄럽다카면서 이긴 뭔데? 증거 아이가, 증거.”

 

이 형님이 다 이해하마. 하며 능글맞은 밉상 표정으로 놀리는 녀석.

일단 빼앗아들은 책은 상한 곳이 있나 확인한 뒤에 쇼핑백에 도로 곱게 넣었다.

, 말이지, 이건 말이야.

 

누나 생일 선물이다 왜! 서점 가서 점원 추천 받고 사온 거라고! 불만 있냐!”

 

안 그럼 미쳤다고 내가 서점 가서 시간 쓰고 돈 쓰고 저거 사오겠냐고!

제대로 건수 잡았다는 듯 신난 기색이 완연하던 표정이 무너지는 꼴이 재밌었다.

나는 역전된 전세 가운데 털썩 앉았다.

 

“3분 신나니까 좋았냐? 저거 누나 선물이거든. 누나 생일이 내일모레라고. 내일은 연습 때문에 서점 갈 시간 없을 것 같으니까 오늘 산 거. 네가 유명한 작가라고 하는 걸 보니까 잘 사긴 잘 산 모양이네. 저거 읽었냐? 볼 만 해?”

 

김빠진 얼굴로 아쉬워하는 녀석을 비웃으며 물었다.

내게서 쇼핑백을 받아 도로 책을 꺼내든 녀석이 말했다.

 

으응. 좋은 글이제, 진부하긴 한데 로맨스니까. 전개나 몰입은 좋데이. 이긴 신작이라 아직 못 읽어봤는데.”

 

그럼 다행이네. 누나도 안 읽은 걸 테니까.”

 

물론 그 점원도 이번 달 신작이라고 하긴 했는데, 그래도 누나가 혹시 먼저 읽은 책일까 봐 조금 걱정하긴 했다. 그래도 온 식구(어머님 제외)가 로맨스 빠인 가정의 유시가 아직 안 읽었다면 나온 지 얼마 안 되긴 안 됐겠?

 

뭐꼬. 이기 갖고 한 달은 놀릴라 캤는데.”

 

네가 그렇지 뭐.”

 

한 김 식어가는 우롱차를 머금은 채로 책을 도로 받아들었다.

진심으로 아쉬운 표정이었다가 이내 털어내는 유시는 무시하고.

 

안개꽃처럼 하얀 그라데이션이 섞인 분홍빛 표지.

뒤표지에는 초록색 풀과 푸른색 하늘이 수채화처럼 장식하고 있다.

어떻게 보아도 로맨스 소설의 모습이다.

 

표지만 봐도 간지러워…….”

 

니도 함 읽어보지 그라노. 괜찮다니까.”

 

안 괜찮아. 언젠간 읽을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지금은 그저 쳐다보는 것만도 간지러워서 도저히 펼칠 수가 없다.

뭐라 그러지. 아직 레벨이 부족해서 던전 입장도 못 한다고 해야 하나.

 

쯧쯧.”

 

뭐라도 된 것처럼 혀 차지 마라. 때린다.

주섬주섬 책을 쇼핑백에 넣는 녀석에게서 받아 뒤로 밀어두고,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며 뒹굴뒹굴 놀다 보니 벌써 8시였다.

 

집에 가야겠다.”

 

움직이기 귀찮긴 하지만, 내일 학교도 가야하고 엄마한테 저녁만 먹고 오겠다고 전해달라 했으니까.

사실 칫솔도 옷도 모두 있어서 여기서 이대로 드러누워 자고 가도 되지만 엄마가 걱정할 테니까 그만 돌아가는 게 낫겠다.

 

가쿠토, 조심해서 가.”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고.”

 

소파에 앉아 늘어져 있던 누나가 배웅했다. 어머님은 얼른 비닐봉지를 들고 와서는 들려주고 걱정했다.

 

무거운데 괜찮니?”

 

들 수 있어요.”

 

멜론이 한가득. 달콤한 향내가 진동을 한다.

엄청 기분 좋은 달콤함. 과일의 싱싱한 달콤함.

 

또 보자.”

 

배웅은 귀찮다고 손을 흔드는 유시를 무시하고, 어머님의 인사만 받아 챙기며 집을 나섰다.

집까지 걸어서 몇 분 안 걸리는 거리.

가로등이 켜진 주택가 골목은 매우 한산하다.

손에는 묵직하게 멜론과 책을 들고 교복 차림새로, 돌아가는 길.

어차피 유시야 내일 아침부터 테니스 연습 때문에 또 볼 테고, 어머님도 누나도 아버님도 일주일도 지나기 전에 또 볼 거다.

 

집이 두 개인 느낌이네.”

 

분홍색이 섞인 것만 같은 멜론 향을 맡으며 돌아가는 길은,

엄청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