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Feeling
Written by Rine in Rine's Side
때때로 당신이 너무나 멀게 느껴진다.
연습을 하다가, 길을 걷다가, 몇 마디 주고받다가, 혹은 그저 보고 있다가도.
당신의 감정은, 때때로 내가 따라가지 못할 만큼 열정적이고, 짚어내지 못할 정도로 다양해서.
⁂
“니 또 뭘 맹하니 있노.”
아….
언제 왔는지 그늘이 진다. 낯설게 느껴지는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코트에 있었는데……?
“어이고.”
라켓을 내 옆에 놓고 그가 미간을 좁혔다.
햇볕에 따스하게 물든 피부색. 인상 좋은 얼굴로 짓는 츳츳 팔짱끼는 표정.
“야 임마.”
손이 다가온다.
햇볕에 낙낙히 익은 따뜻한 손끝이 이마에 닿고.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오시타리 선배, 구나. 조금 뒤늦게, 나는 이미 그가 손을 뗀 이마에 알싸히 퍼지는 아픔을 느꼈다.
“………아.”
“이제 아픈가 보제?”
한 박자 늦었나. 끌끌 혀를 차며 그가 날 쳐다본다.
“와 때리시는 데예.”
“점심시간 다 지났다 임마. 교실 가야제 뭐 하노. 와, 졸리나?”
벌써?
방금 도시락 덮은 것 같은데. 주변을 보니 코트는 이미 사람이 빠지고, 남은 이들은 주섬주섬 저마다의 라켓을 정리하고 있다.
시끌벅적하게 웃으며 테니스장 밖으로 나가는 뒷모습들을 넋이 나간 것처럼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시야가 어쩐지 흐린 느낌. 초점이 현실을 빗나가 맺히는 느낌.
전체적으로 오늘 내 상태는 멍한 것, 같다.
“자이젠, 일나, 일나서 퍼뜩 들가래이.”
딱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나를 제외하고 선배들은 이미 한 번씩은 움직였는지, 시라이시 선배 외엔 다들 얼굴에 땀방울이 맺혀 있다. 킨타로가 저의 상의를 펄럭펄럭 움직여 바람을 일으키며 방방 뛴다.
“끝나고 내랑 치는 거제, 시라이시!”
“어야, 어야. 킨짱. 니도 퍼뜩 움직이래이.”
또 딴 데 정신 팔다가 수업 늦지 말고.
늘 그랬듯 하나하나 챙기고, 모두가 떠나는 테니스장을 둘러보는 시라이시 선배 쪽을 또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다.
해가 적당히 따뜻한 날씨에, 바람도 적당히 분다.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하고 있기엔 오히려 조금 쌀쌀하게 느껴질 바람에, 따뜻한 해라.
오늘이 며칠이지?
“선배. 오늘… 며칠?”
“17일.”
성큼 다가온 손이 손을 잡는다.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닿는 인간의 온도에 옆으로 돌아보자 보이는 건 묵묵히 내 손을 쥐고 위아래로 탈탈 흔드는 그.
“물 뚝-뚝 떨구고, 니, 수업도 안 들었제?”
표정 변화 없이 그가 보통 때와 같은 울림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랬던 것 같은데.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하지 않아도 짐작했는지 그는 가타부타 말없이 내 손을 타고 흐르는 물을 대충 떨궈 버리고 손을 뗐다.
아까. 벤치에 앉아서 쬐던 햇살 보다도 더 기분 좋은 온기가 거둬지는 기분이 이상하다.
언뜻 낯설기만 한 그런 온기.
어쩐지 손을 빼내고, 모르는 척 고개를 팩 돌려야 할 것만 같은 그런.
그런데 떼기 무섭게 바라게 되는 그런.
어딘가 다시 수그러드는 기분으로 고개를 숙일 찰나, 방금 전 사라졌던 온기가 한가득 다가왔다. 호기심에 불 가까이를 얼쩡거렸던 방금이라면 지금은 그 포근한 불이 저를 안아주는 기분.
양쪽 뺨에 와닿은 손에 선배를 올려다봤다.
열네 살과 열다섯 살.
불과 한 살 차이지만, 여태 머리 하나 차이가 나는 키 차이 탓에, 나는 대개 그를 올려다본다. 그건 ‘오시타리 선배’ 라는 말만큼이나 당연히 붙은 행동이다.
선배들이야 뭐, 다 올려다보는 데 특히나 가장 오랜 시간을 그나마 함께 하는 사람인 그는 내게…….
순간 나는 그가 익숙한 가. 라는 생각에 눈을 미미하게 떴다.
“상태 참. 니 이래도 정신 안 차리제, 응?”
양쪽 뺨을 가볍게 두어 번 두들긴 듯한 손을 떼고, 머리 위로 다시금 손이 내려앉는다.
분명 뻣뻣할 텐데. 항상 삐치게 고정 시켜놓는 머리카락.
개의치 않고 문질문질 움직이는 손바닥은 굳은살로 인해 거칠지만 아이처럼 보드랍기도 한 손이다.
열기가 머리에서부터 닿았다.
어딘가 움츠러들게 만든다.
여태까지 유유히 어딘가에 동떨어져 있던 의식이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조금씩 끌어올려지는 느낌.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하면서 차차 시야가 선명해짐과 동시에 혈색이 도는 만큼 그와 비슷하게 움츠러들게 만든다.
뻣뻣한 머리카락을 무시하며 머리를 흩뜨리던 선배는 갑자기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히카루.”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뒤늦게 입을 열어 우물거리는 내 모양을 캐치한 그가 싱그럽게 웃었다. 눈이 마주치게 되면 언제든 환한 웃음을 그대로 지어주는 사람.
정말로 주변이 환해지게, 그렇게 웃는 사람.
그 웃음을 오롯이 내게 지어주는 사람.
“오늘 며칠이라꼬?”
“…17일…?”
그 말에 선배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어딘가 평소보다 더욱 환한, 언뜻 기뻐서 주체 못 하는 표정이다.
고작 대답 하나에 저러진 않는데 왜?
나는 이미 서서히 가동이 돌아오고 있는 머리를 좀 더 재촉했다.
오늘………… 17일. 17일. 무슨 일이라도? 선배는 왜?
“아.”
“어어?”
맞아.
그랬다.
“오늘.”
오늘.
선배는 기대감과 기쁨이 담긴 눈동자로 반짝반짝 쳐다봤다.
그 모습이 어쩐지 나까지 웃음이 나오게 만들어서, 픽 웃었다.
“우예 여태 티도 안 내셨습니꺼. 선배답지 않게.”
“니 기억날 때까지 기다릴라캤지.”
근데 이틀 전부터 니 상태 겁나 안 좋드만. 그렇게 덧붙이며 선배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렇게 서면, 내 키는 그의 어깨를 넘는 정도.
1년의 나이 차이지만, 좀처럼 키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덕택에 나는 또 시선을 올렸다.
“17일. …선배 설마하니…….”
삐진 건 아니겠지예, 라고 말하려다 멈췄다. 그런 말 할 필요도 없이 그는 단지 너무나도 웃고 있어서 괜히 찔렸다.
나도 그렇고 그도 그렇고 딱히 일일이 달력 체크해가며 따지는 그런 섬세함은 조금도 없지만, 굳이 따진다면 생일, 그리고 그의 성화로 올 해 연초부터 들어온 날짜 하나다.
설마 내가 알아채고 언질 줄 때까지 정말로 기다리려고 했나.
그럴 지도 모르겠다. 연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싱글벙글 웃는 잘생긴 얼굴을 물끄러미 보며 생각. 응. 그랬을 지도. 급하고 솔직하고 하여튼 그런 성격이긴 해도- 어쨌든 결심한 건 끝까지 밀어붙이니까.
“아직 학교 끝나기 전이니까 끝나고 어디 놀러 라도 갈까.”
“싫은데예.”
“뭐꼬. 닌 오늘 나랑 하루 종일 놀아줘야 한데이. 기념일, 기념일.”
17일.
“놀아주긴 뭘… 하여튼 사람 많은 곳은 싫습니더.”
“사람 많은 거리에서 조용한 카페 가믄 되잖노. 니 저번에 좋아했던 그 회칠한 집.”
카페야 좋지만. 특히 그 회칠한 벽 느낌에 나무를 배치한 어쿠스틱 카페 좋지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요.
금세 들떠서 어떻게든 날 끌고 가려고 줄줄 별의 별 목록을 읊는 그의 손을 잡았다.
가볍게 주먹 쥐듯 말고 있던 그의 손등을, 손을, 감싸듯 손을 올려서.
단번에 전해지는 그의 열기.
“니 와…….”
“선배.”
어쨌든. 생각난 김에.
절대 늦게 생각해내거나, 관심이 없었던 거 아니고,
“1년 수고하셨습니데이.”
“…………수고는 뭔… 그, 그, 그케……!”
그케 빤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건방진 말 해봐야 하나도 안 기쁘그든?!?!?
어쨌든.
하늘은 맑고, 다시금. 이제는. 온 사방의 소리와 빛이 제대로 들린다.
멍했던 정신은 번지는 웃음에 이미 오래 전에 돌아왔고.
알게 되고 1년, 그리고 당신과 사귀고 1년,
바로 떼어낸 내 손을 잡으려고 날뛰면서, 얼굴을 붉힌 채 왁왁 옆에 있는 선배가 있으니까.
그 사람. 오시타리 켄야의 말이, 웃음이, 현실로 달래주니까.
어딘가 부족한 것만 같은 결핍을 더없이 채워주는 당신이 옆에 있기에.
오늘도 난 마음 놓고 당신과 같은 코트에 서고.
당신과 함께 웃는다.
'단편 [短篇] > 테니스의 왕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시가쿠] 15살의 수줍음 (0) | 2013.09.19 |
---|---|
[오시가쿠] 변해가는 모든 것 중에서 (0) | 2013.09.05 |
[켄히카] 빙빙 돌아 한마음 (0) | 2013.05.01 |
[아카렌지] 당신을 본 노을 (0) | 2013.01.25 |
[오시가쿠] 아르바이트 【1】 (0) | 2013.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