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uble Glass
Written by Rine in Rine's Side
“그렇게 모자만 쓰고 나와도 돼?”
챙이 넓은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있으니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긴 머리카락도 숨겼는지 모자 아래로는 목덜미만 희게 뻗어있다.
검은 모자에 하늘색 와이셔츠, 하얀색 루즈핏 스웨터, 분홍색 시스루 롱스커트.
얘가 치하야가 맞나…?
이렇게 옷을 신경 써 입는 애가 아니었는데.
그냥 집어 입었는데 우연히 잘 입었다면야, 음. 이게 가능성 있는데.
“괜찮아. 연예인도 아니고.”
“충분히 연예계인데…….”
“아니야. TV도 안 나오고. 영화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잡지에는 나오잖아. 신문기사에도.”
“그건 그냥 직업 활동이고.”
아무래도 치하야 머릿속에서 연예인은 TV에 나오거나, 라디오에 나오거나, 영화에 나오는 사람인가보다. 그래서 본인은 연예인은 아니라는 거고?
“그럼 모자는 왜 쓰고 나왔어. 그냥 돌아다니지.”
“안 돼. 매니저 언니가 쓰랬어. 안 쓰면 나갈 생각 하지 말래.”
똑 부러진 매니저 만났구나.
지금 들은 게 다지만, 치하야를 잘 파악하고 잘 다루는 사람 같았다. 다행이다.
“그래. 조금 가리는 게 돌아다니기 편할 거야.”
암. 본인만 모르는 인지도가 부를 참사를 굳이 알면서도 초래할 필요는 없지.
보통 좀 뜨면 주변에서 온갖 단 말을 해대니 절로 망나니가 된다는데, 변한 게 없나 싶을 정도로 한결 같네.
너도 나를 전과 같다고 느끼고 있을까?
“그 날은 잘 들어갔어?”
길게 말하지 않았지만 치하야가 즉각 알아듣고 손을 내저었다.
허공을 북북 휘젓는 손이 하얗고 예뻤다.
모자 밑으로 보이는 볼과 목덜미가 순식간에 시뻘개졌다.
“응! 응! 잘 들어갔어! 완전 잘 들어갔어!”
보이진 않지만 지금 저 눈이 마구 흔들리고 있을 모습이 선했다.
살짝 웃다가도 자꾸만 기억 속을 투영하는 내 자신이 무언가 싶어 입매가 다물렸다.
유리잔 겉면에 물방울이 송알송알 맺힌 걸 밀어주자 곧장 잡아채 벌컥벌컥 들이 부었다.
맥주라도 원샷하는 것 같은 박력이었다.
“그래. 잘 들어갔다면 됐어.”
조금 진정할 시간을 줘야겠다 싶어 말을 끊었다.
사실, 딱히 뱉을 말도 없었다.
‘왜 불렀어?’ 그렇게 묻기에는 어려웠다.
무엇이 어렵냐면, 문제집을 펼 생각조차 없으니 그부터가 산이었다.
“타이치는, 음, 잘 보냈어?”
“어? 어.”
전부 들이킨 물컵을 내려놓으며 묻는 말에 간단히 대꾸하며 손을 움직였다.
예전에 나온 더치커피를 쥐니 한 김 식어있었다.
무엇 때문에 보자고 한 건지, 언제 얘기할 건지, 궁금한 것 투성이었지만 묻지는 않았다.
굳이 이 자리를 빨리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고개 숙인 치하야를 좀 더 바라보았다.
직업이 직업이라서일까, 하지만 잡지 인터뷰 같은 곳 보면 대디베어 사랑은 여전한 것 같던데. 오늘 치하야의 모습에서 그 이상한 곰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혹시 가방인가 싶어 슬며시 눈을 돌렸지만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아까 카페에 들어올 때 보지 못했던 기억이 나니 아마 가방 장식도 아닐 테고.
그렇다면 뭐……. 라고 눈 돌리기 무섭게 눈에 띄었다.
모자 아래로 잘 보이지 않았던 귓불의 대디베어…… 귀걸이.
“음… 있잖아…….”
벌써 몇 년 전이지.
고등학교 2학년 내 생일날, 나름 공 들인 포장의 박스를 떠넘긴 치하야가 귀여워 즐겁게 하루를 보내고선 집에 돌아와 풀어보았을 때의 느낌이란.
흰색과 분홍색이 레이어드 된 리본과 연한 분홍의 종이 포장지를 조심조심 뜯고 박스를 열 때까지만 해도 감탄하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포장용 콘 위에 누워 날 쳐다보는 대디베어를 보고는 그만 굳어 버렸다.
그런 눈썰미는 어디서 나왔는지 사이즈마저도 딱 맞았다.
뭐 대충 L-M-S 중 골랐겠지만, 티셔츠 외에도 그 얼굴이 그려진 온갖 물건이 나왔다.
버튼 같이 작은 것부터 만년달력, 아크릴 스탠드, 보틀, 심지어 여름용 부채까지.
이거 혹시, 뭐 그냥 자기가 갖고 싶은 걸 다 사본 건 아니지……?
몇 초 들었던 생각은 정성스럽게도 쓴 손편지를 발견함과 함께 사라졌다.
읽고 나서도 이것을 입어야 하는가, 고뇌는 계속되었지만 적어도 기쁘기는 했다. 정말로.
“뭐 잘 지냈나 궁금하기도 하고… 어떻게 지냈는지랑… 보고 싶기도 했고…….”
그래서 내가 그걸 입었나?
다른 물건이야 어떻게 보여줄 수가 없지만 티셔츠는… 그래… 많은 고뇌와 갈등을 거쳐 결국 입고 나갔었다. 조금 떨떠름했지만은 치하야가 기뻐했으니 됐다….
나름, 커플룩이기도 했고.
“타, 타이치는 뭐… 음… 잘 지냈지?”
“응. 나쁘지 않았어.”
다 마신 물컵을 만지다가 대상을 옮겨 딸기 스무디 잔을 만지작거리던 치하야가 겨우 첫 질문을 던졌다.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말할 듯 말 듯 연신 주저하는 모습에 내가 물었다.
“일은 괜찮아?”
“응? 모델?”
“응.”
“이제 좀 할 만 해. 그렇게 무섭지도 않고,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조금 아니까, 사람 대하는 것도 그렇게 어렵기만 하지도 않고.”
하나도 안 변할 수는 없었겠지. 좋은 쪽으로 성장했다니 다행이다.
무엇 하나 무섭지 않은 게 없고 낯설지 않은 게 없던 때에 지탱해주지 못했던 것은 나였다.
남자친구로서도, 소꿉친구로서도.
“타이치는 완전히 직장인이 다 됐네. 평상시엔 양복 입으려나? 잘 어울릴 거야. 일은? 할 만해?”
치하야가 똑같이 물어왔다.
양복 차림이라. 직업이 직업이다보니 평상시엔 양복이다.
나오기 전 옷장 앞에서 무얼 입을지 조금 머뭇거렸을 뿐인데, 시간이 후딱 가버려서 급하게 나왔던 오늘 아침이 문득 떠올랐다.
“응. 일도 생각했던 거랑 별로 다르진 않아. 매일 자료 찾고, 상담하고, 그런 거지.”
만지던 컵을 들었다. 괜히 손 둘 곳이 비었다.
한 모금 정도를 남기고 삼켜버린 커피를 내려놓자, 무얼 그리 고민하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치하야가 입술을 달싹였다.
스무디 잔 옆에 놓아둔 손이 희고 가늘었다.
어쩐지, 치하야가 할 말이 짐작가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내 자신이 우스워 홀로 고개를 돌렸다.
“타이치.”
언젠가 나를 불러 잡았던 때와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관심 없다고, 누가 그런 걸 하냐고, 듣는 척도 않고 돌아서던 나를 끈질기게 잡던 그때의 기억이 밀려들어왔다.
보진 않았지만, 치하야가 고개를 들고 나를 보고 있다는 건 느껴졌다.
아마 그때와 같은 눈일 거다.
당장에 나를 잡아버리는 눈.
여기에 내가 있다고 외치는 너.
나와 함께 하자고 말하는 모습.
어릴 적부터 하나 주저함 없이 꼿꼿하게 나를 이끌던 모습 그대로일 테다.
몇 년 전, 그런 어깨가 쓰러져 울던 그때와는 다르게.
치하야.
정말로 달라졌구나. 아니. 성장했구나.
“타이치랑 다시 만나고 싶어.”
초등학생 때도, 고등학생 때도, 나는 항상 너를 바라보았지.
어쩌면 저렇게 웃는 걸까. 어쩌면 저렇게 거침없지. 어쩌면 저렇게 강한 걸까.
너는 왜 한 결 같이 강한 걸까.
“나랑… 나랑 사귀자. 타이치.”
한 점 망설임 없이, 함께 가자는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건 왜일까.
늘 그러하리라는 확신을 주는 것은.
실상 한 번 깨어졌던 맹목적인 완전함인데도 다시 한 번 너는 내 눈을 가리고 있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아니, 현실을 어떻게든 헤칠 거라고 내 앞을 강하게 비추고 있어.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환해서. 내가 지금 홀리고 있는 건가 생각할 정도로.
“타이치…….”
그리고 나는 여태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고개를 끄덕이는 거야.
“그래.”
사랑한다고. 이 속절없는 한마디를. 너는 알고 있을까. 1
- 「사랑한다고, 말 한마디 못하는 불타는 듯한, 속절없는 마음을 너는 알고 있을까.」 (藤原実方朝臣, ?~998) 백인일수 5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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