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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短篇]/치하야후루

[타이치하] 너 없이【3】

Soluble Glass            

Written by Rine in Rine's Side

 

 

 

 

아으…….”

 

가볍게 명치를 치며 들어선 집 안은 불이 꺼져 어둑했다.

급하게 구두를 벗고 거실로 들어가 그대로 소파에 뻗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명치며 등이 욱신거리는 통증이 사라지질 않았다.

 

내일은 정말 병원에 들러 약이라도 타야 하나.

월요일 오후부터 얹힌 느낌이 가시지 않는데다 오늘 점심을 먹은 후로는 식도를 막는 느낌까지 든다. 스트레스를 받았나, 증상이 식도염인데 이거.

목 아랫부분이며 쇄골 주변을 살살 문지르다 한숨을 크게 쉬었다.

내일은 금요일인데, 그렇다고 병원 갈 짬이 생기진 않을 것 같고. 결국 토요일 오후에 가야 하나…… 토요일 오후에 시간이 날지는 모르겠다.

항상 바쁘긴 하지만 특히 까다로운 의뢰가 들어오면 철야가 일상인 사무실이라.

돈도 많이 주고 배울 것도 많은 곳이지만 힘든 건 힘든 거지.

이러다간 시간 맞춰 데이트 약속을 해도 만나서 죽만 먹게 생겼다.

 

하루 종일 관련 판례만 뒤지고 있었더니 지끈지끈해진 머리를 푹신한 쿠션에 기대자 이젠 배가 고팠다. 들어오는 길에 야식거리라도 사올 걸 그랬나, 싶지만 이 시간에 뭘 먹어봐야 소화도 잘 안 될 테니 됐다.

내일 아침은 좀 일찍 나가서 스프를 먹어야 하나…… 원래는 아침마다 들리는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먹고는 했지만 시간만 좀 이르게 맞추면 세트 메뉴인 스프도 먹을 수 있겠지. 샌드위치 대신 먹어야겠다.

 

계속 누워 있다간 잠들 것 같아 일단 몸을 일으켜 옷을 갈아입고, 내일 입을 옷을 정리하고, 서류를 꺼내 책상에 모았다. 위장약도 두 알 삼키고.

치하야가 이번 주말까지는 오키나와 로케 때문에 못 만난다고 했을 때는 더없이 아쉬웠는데, 위장병 났으니 차라리 다행이다 싶다. 만났어도 걱정만 끼칠 뻔 했다.

들어오는 길에 우편함에서 꺼내온 잡지 두 개를 집고 비닐 포장을 북북 잡아 뜯었다.

 

둘 다 치하야가 고정으로 연재하고 있는 패션잡지였다.

 

. 이번 달 표지네.”

 

흰 바탕을 두고 가운데에 치하야가 모델로 선 표지.

주황색 머리를 길게 내리고 눈가에 큐빅을 붙인 메이크업, 플라워 칵테일드레스를 입은 채로 무표정하게 정면을 보는 사진이었다.

역시 말하지 않을 때의 박력은 어마어마하구나 치하야.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그랬지.

인형처럼 예쁘게 생겨서는 쌈박질은 또 얼마나 잘하는지 놀리는 남자애들 등짝을 퍽퍽 때리고 다니는 게 치하야였다.

지금도 크긴 한데, 어릴 때는 특히 남자애들보다 성장이 빠르니 키가 커서 반을 주름잡고 다니고는 했다.

깡이 세서 여자애들한테도 인기 있고, 웃는 얼굴에 반한 남자애들은 줄을 선 애였는데.

관심 끌어보려고 알짱대며 괴롭히는 남자애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생각해보니 그중에 하나가 나구나…….

 

표지를 넘기고 목차를 훑어 치하야 코너의 페이지를 확인했다.

표지와 비슷하게 칵테일드레스 컬렉션이었다. 이 잡지의 타겟 연령층 자체가 취업한 젊은 직장 여성이다보니 치하야 외에 고정 연재를 하는 모델들의 의상도 파티룩, 미팅룩 같은 의상.

손가락 끝에 핸드백을 걸치듯 들고 기우뚱하게 선 사진. 첫 쪽에 간단한 코멘트가 있었다.

 

계절이 변하는 것을 느끼는 건 언제고 설레는 일이다. 벚꽃의 만개란 사람이 모르는 사이 지난단 말을 들은 뒤로는 한순간 한순간을 가슴에 새기게 된다. 새로운 직장, 새로운 인간관계, 낯선 것 사이에서 피곤하겠지만, 오늘도 당신은 예쁘다.

 

매일매일 장난치는 모습, 놀라는 모습, 어쩔 줄 모르는 덜렁이 모습만 보다가 얘가 일하는 걸 보게 되면 다른 사람인가 싶다. 생각한 것보다 사회생활 직장생활 잘하고 있구나.

 

다른 잡지는 타겟 연령층이 그보다 낮은 여성이라 첫 번째 잡지보다는 발랄했다.

자연스럽게 흐트러트린 앞머리 위로 올라간 화관. 두 갈래로 둥글게 땋은 긴머리. 오렌지 컬러의 메이크업. 약간 멍한 표정. 테마가 프로방스인가?

흰 천에 다양한 패턴이 들어간 원피스를 입고 돌담벼락에 기댄 모습이 예뻐 그 쪽을 연신 보았다.

이거 스크랩할까…….

 

정기구독해서 받아보고, 책꽂이에 꽂아두기만 했는데 생각해보니 날 잡아 스크랩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코팅해서 보관하든가. 일단 그건 다음에.

넘겼다가 다시 보고를 반복하는 와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 치하야.”

 

[타이치 집에 왔어?]

 

응 아까 퇴근했어. 너는?”

 

[난 오늘 촬영 끝나서 지금 숙소로 가는 중이야. 힘들다. 타이치도 많이 힘들었지?]

 

늘 그렇지 뭐. 정신없어서. 촬영은 잘 돼?”

 

[! 바다 오니까 좋다. 여긴 완전 여름이야. 타이치랑 여름 휴가 가면 좋을 것 같은데.]

 

좋지. 근데 아직 휴가 일정 얘기가 없어서…….”

 

[알아알아. 나중에 되면 같이 가자. 맛있는 식당도 발견했어. 적어둘게.]

 

그래.”

 

피곤함이 없는 목소리로 재잘재잘 거리는 치하야가 귀여웠다. 보기엔 말랐는데 체력 좋다니까. 오므라이스를 먹었는데 맛있었다는 둥, 매니저 언니는 하이라이스였는데 그것도 맛있었다는 둥 치하야가 웃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타이치 목소리 들으니까 좋다.]

 

나도.”

 

[밥 잘 챙겨먹고 잠 잘 자고 있어. 선물 사갈게.]

 

안 그래도 되거든요?”

 

[아니야 내가 사가고 싶단 말이야. 방해하지 마.]

 

선물을 사는 기분을 방해하지 말아달라는 거냐.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니까.

 

[어쨌든, 잘 자 타이치!]

 

숙소에 도착했는지 소란스런 소리가 넘어오고, 치하야가 부지불식간에 쪽소리를 남기며 전화를 끊었다.

 

나참.”

 

얘는…… 얘는 대체 왜 이렇게 귀여운 걸까.

핸드폰을 옆에 두고 잡지 위로 몸을 숙여 혼자 떨었다. 아무도 없는데 큰소리를 내기도 부끄러운 마음이었다. 스물 넘은 다 큰 애인데 왜 볼수록 어려지는 것 같지.

 

초등학생 때는 같은 학교였지만, 그 뒤로 나는 다른 학교로 진학해서 보지 못했다.

아버지 직장을 따라간 것도 있고, 중학교 입시 결과를 따라 편차치 높은 학교로 진학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되었다. 중학생 때는 치하야 생각이 그다지 나지 않았다.

핸드폰도 없었던 때에 헤어져서 번호도 몰랐고, 편지를 쓰거나 집으로 연락하기에는 내심 망설여지는 까닭에 다음, 다음에, 이렇게 미루다 중학교도 졸업했다.

고등학교는 어머니의 반대를 뒤로 하고 평범한 공립으로 진학했다.

치하야와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그 동네의 평범한 고등학교로.

 

진학한 학교에 치하야가 있었다.

3이 되었을 때 나와 치하야는 자연스럽게 사귀고 있었고, 나는 어머니의 의대 권유를 뿌리치고 법대를 선택했다. 의대나 법대나 입시가 치열하긴 고만고만했다.

이왕 갈 거라면 국립대 진학이어야 했다.

어쩌면 그때부터 누적된 스트레스와 불안감이 미래의 갑작스런 이별을 불러온 거름이 된 게 아닐까.

 

옆에 떨군 모습대로 뒤집혀 있는 핸드폰을 보고 있자니 끊임없이 생각이 번졌다.

 

결론적으로, 가장 치열했던 3학년 때는 오히려 문제가 없었다.

치하야는 고교 졸업 전에 뜻하지 않은 기회를 잡아 모델 기획사로 들어가며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나는 원하던 곳으로 진학했다. 순탄하다고 할 수 있을 법한 사회진출과 진학이었다.

 

영 못마땅해 하던 가족들도 한시름 덜었다는 듯 조용해지고, 아니 그때쯤엔 반대로 드디어 내 연애전선에, 치하야에게 평범한 관심을 비추었는데.

 

그러게…… 정말 힘들고 아팠는데.”

 

왜인지는 모르겠네. 뭐가 그렇게 서로 힘들었지. 다시 되짚어도 깜깜하고 답답할 뿐 제대로 된 것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덧없는 이유였나?

쥐고 있는 핸드폰의 잠금을 풀었다.

공원 가로등 밑에 선 치하야의 사진.

혹여나 누군가 보고 시시콜콜 난감해질까 흑백 필터를 덧씌운 사진.

 

충동적으로 메시지 앱을 열었다.

 

휴가 어디로 갈까?

 

지금이 우선이지. 지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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