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uble Glass
Written by Rine in Rine's Side
「미안 치하야. 핸드폰 꺼져 있어서 문자로 남길게. 저녁 같이 못 할 것 같아. 미안해 정말.」
촬영 중인지 핸드폰 연락은 도통 안 받아서, 결국 메시지를 남겼다.
혹시 읽음 표시가 뜨지 않을까 싶어 조금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쉬며 전원을 껐다.
“후우…….”
낮에는 기 빨리는 상담을 하고, 졸지에 데이트를 파기해야 하는 야근이라니.
오늘 아침만 해도 이렇게 바쁠 줄 몰랐는데 정말 발등의 불이 이런 거구나.
자리로 돌아가 다시 작업을 해야 조금이라도 빨리 끝낼 텐데, 통 그럴 마음이 안 들었다.
기실, 오늘 저녁 약속이 저번의 카페에서의 만남 이후 처음 만나는 자리였는데.
어째서 이렇게 바빠진 거지…….
“아으아아아아.”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 낮은 소리가 울렸다.
아침에 비춰보았을 땐 환했던 것 같은데, 지금 다시 비춰보니 거울 속 내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됐어. 데이트도 취소된 상황에 지금 눈 밑이 문제야.
촬영 들어가면 종일 현장이며 스튜디오에 나가 있는 데다, 그 외에도 자잘한 프로모션이나 디자이너, 에디터들과의 만남이 잦은 치하야도 치하야지만 나 역시 직업 특성상 시간 싸움이다보니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어떻게 맞춘 날짜였는데…… 치하야는 아무래도 매스컴에 노출되는 직업이니 오픈된 곳은 불편할 것 같아 예약도 했었는데…….
생각해보니 예약 취소를 알리지 않았다. 다시 다이얼을 열어 이번엔 저녁을 예약했던 식당에 전화를 넣었다.
“네. 네, 죄송합니다. 아니요. 네, 감사합니다.”
상냥한 아가씨가 응대해준 것을 네, 네, 연신 반복하여 끊고 보니 어느새 라인 답신이 와 있었다.
「촬영하느라 못봤어ㅠㅠㅠㅠㅠㅠㅠ」
「타이치 지금 바빠?」
「나 이제 끝났는데...」
막 촬영을 마친 듯 보낸 시각이 1분 차도 나지 않았다.
일단 촬영이 끝났으면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답신을 치는 대신 통화를 걸었다.
“치하야.”
[타이치! 미안해. 촬영하느라 못 봤어. 미안.]
“아냐 내가 미안하지. 메시지 봤어? 오늘 안 될 것 같아…….”
뭐가 그리 급한지 치하야는 수신음이 가기도 전에 받았다.
오늘의 죄인은 나인지라 내심 풀 죽은 마음을 숨길 수 없어 조용조용 말을 흐렸다.
많이 실망하거나 삐지지 않을까 싶었던 치하야가 생각 못한 대답을 했다.
[언제 끝나는데? 내가 저녁에 그쪽으로 갈까?]
“너무 늦지 않을까? 피곤하지 않아?”
얼떨떨한 기분으로 묻자 치하야가 쾌활하게 대답했다.
[아니야. 어차피 도쿄 가면 1시간은 지나 있을 텐데 뭐. 근처 카페에 있으면 되지 않을까?]
“너 너무 피곤할 것 같은데… 내가 내일 아침에 집으로 갈게, 오늘은 그냥 들어가서 쉬어.”
방금 촬영 끝낸 애가 집은커녕 카페에서 계속 기다리겠다니. 그러다 쓰러지겠다.
직업상 많이 먹지도 못하는 애가.
[괜찮아 타이치. 나 체력 진짜 좋은데, 너도 알잖아. 도심 들어가면 간단한 거 포장해서 갈게. 몇 시쯤 끝날 것 같아?]
치하야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으며 물어왔다.
정말로 즐거워하는 목소리라 더 이상 반대할 수가 없었다.
다른 마음으로는 나 역시 설레기 시작한 터라 밀리는 척 응하는 답을 했다.
“그럼… 10시 전후엔 마칠 것 같으니까, 그때 볼래? 바로 내려갈게. 아니아니, 마칠 때 메시지 남길 테니까. 중간에라도 피곤하면 그냥 집으로 가, 치하야.”
[응! 알겠어. 타이치 뭐 가리는 건 없어?]
“없어. 괜찮아.”
[알겠어~ 그럼 이따가 봐! 힘 내! 타이치!]
발랄한 말에 절로 웃음이 떠올라 응응, 대답하며 전화를 끊길 기다렸다가 핸드폰을 내렸다.
통화시각은 겨우 5분. 길게 통화하지도 않았는데 다 빠져나간 힘이 꽉 차다 못해 넘치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뭐야. 진짜 중증이다.
혼자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고 또 웃었다가, 다시 일하기 위해 허리를 쭉 펴고 스트레칭을 한 번 했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지. 10시가 뭐냐, 그 전에 끝내고 날아가야지.
⁂
“고생했어요. 다들 푹 쉬고 내일 봅시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무 생각 않고 매달린 덕인지, 9시 반쯤엔 다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날 수 있었다.
일하는 동안 자연히 쌓인 프린트를 정리하고, 먼저 나가는 선배들을 배웅하고, 책상을 정리한 뒤 가방을 멨다.
마지막 자료를 사수한테 넘긴 뒤 바로 치하야에게 라인을 했더니, 그 답장으로 램프가 빛나고 있었다.
「CAFE LOO라는데 타이치 회사 바로 앞」
어딘지 알겠다.
지금 나간다고 보내니까 그럼 자기도 나오겠다고 답신이 왔다.
애초에 계획은 저녁 먹고 공원을 좀 걷자~ 얘기 많이 하고 싶다~ 라는 치하야의 주장대로 짠 것이었는데, 오늘 이미 저녁 식사는 파투났으니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다.
일단 치하야를 만나야지.
“타이치!”
회사를 지나 두 번 정도 모퉁이를 돌자마자 모자를 눌러 쓴 치하야를 발견했다.
치하야도 마찬가지인지 곧장 달려오는 걸 손을 뻗어 잡았다.
“이러다 넘어져 치하야.”
“너무 반가워서……. 많이 힘들었지? 어땠어?”
“그냥 바쁠 때라 정신없었을 뿐이야. 저녁 먹었어? 힘들지는 않았고?”
모자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려 하자 치하야가 웃으며 모자를 잡아 눌렀다.
“안 돼. 오늘 화장 좀 진하게 했었거든. 오면서 손보긴 했는데 그래도 타이치 놀랄지도 몰라.”
모델 화장이 얼마나 진한지 알아? 까르르 웃는 소리가 발랄했다.
기운 찬 모습에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며 맞장구를 쳤다.
“모자 벗으면 다른 사람 나오는 거야? 목소리는 치하야가 맞는데… 흠….”
“치하야는 맞거든요! 이거 봐, 저녁 준비해왔어. 소화 잘 되게 간단한 걸로 준비해서 별로일지는 모르겠지만…… 건강식이니까 그냥 먹어줘.”
한 손으로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을 들어 보이며 치하야가 웃었다.
아. 이런.
얼른 손을 뻗어 가방을 넘겨받았다.
“내가 들 수 있는데.”
“됐네요. 자. 그럼 먹으러 갈까? 너는 저녁 먹었어?”
“아니.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지!”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촬영 마쳤다고 통화한 시각이 6시 반이었으니 세 시간은 꼬박 굶은 상태 아닌가. 촬영 중에 뭘 먹었을 리도 없으니 그보다 더…….
다른 손을 들어 치하야의 모자를 톡 쳤다.
“으이그. 이 아가씨야.”
“아 왜! 같이 먹고 싶었는데!”
“알았어. 알았어. 고마워. 어디로 갈까? 처음 계획대로 공원?”
생각해보니 마땅히 먹을 자리가 없었다. 있어봐야 치하야의 밴? 하지만 아마 매니저가 퇴근하면서 가져갔을 거고.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인데, 치하야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좋아. 가려고 했던 공원에 정자 있는데, 거기 낮에도 막 사람들 와서 도시락 먹고 피크닉 하더라고. 지금 가도 괜찮을 거야.”
치하야가 손을 잡아왔다.
부드러운 손이 깍지 껴오는 것을 화답하듯 맞잡자, 치하야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오. 타이치. 손이 듬직한데. 100점 드리죠.”
“고마워.”
“내 손은? 내 손은 100점 안 줘?”
모자 아래로 반짝반짝한 눈이 보였다.
그걸 내려다보다 정말 진심으로 웃었다.
“그것보다 귀한 걸.”
낯간지러운 말을 해놓고도, 치하야가 얼굴이 빨개지는 걸 보며 웃었다.
손도, 뺨도, 미소도, 네 전부가 무엇보다 귀한 걸.
하루 피곤이 다 가신 상태로 맞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자. 아가씨. 공원으로 가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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