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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短篇]/테니스의 왕자

[아카렌지] 당신을 본 노을

Do I know him ?              

Written by Rine in Rine's Side

 

 

 

 

 

온 세상이 너무나 밝다.

막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태양빛은 느릿느릿하게, 그러나 종종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났지, 싶게 서서히 잠기고 있었다.

 

으레 한창 볕이 따가운 정오쯤의 한낮이 가장 밝다고 인식하고 있겠지만, 야나기 렌지에게 있어서 가장 밝은 때는 단연 지금이다.

 

푸에취!”

 

분타, 역시 머리에 물 뿌리고 다니지 말라니까.”

 

막 연습 끝났을 땐 저절로 생수를 붓게 된다고.”

 

투닥투닥 항상 그랬듯, 항상 그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이 옷을 꿰입는다. 일반 부원들은 이미 우르르 몰려서 하교한 시각. 오늘 뒷정리를 담당하는 몇 만이 남아 있는 시간이었다.

곧 있을 대회 때문에 레귤러들만 따로 연습 후에 남아 브리핑을 했기 때문에, 하교 시간은 평상시의 시간대보다 늦어져 있었다.

 

야나기, 그거, 안 내려놓을 거야?”

 

옆에서 불쑥 나온 흰 손이 그가 쥐고 있는 노트를 가볍게 콕콕 찌른다. 생각지도 못한 상태에서 들린 목소리 때문에 조금 놀란 야나기는, 그러나 티는 내지 않은 채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두고 갈 거니까.”

 

흐음, 그래.”

 

유키무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저를 한 번 쳐다보는 게 느껴지지만, 야나기는 별달리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하려던 일을 떠올리고 부실 벽에 있는 책장 앞으로 다가가 섰다.

 

우왁! 차갑잖아!”

 

실수에요!”

 

분명히 이 파일에. 역시나. 잘 철해 둔 파일을 꺼내든다. 흔한 파일과는 다른 두께가, 책으로 비유하자면 약 400쪽 가량의 두께는 되는 것 같다.

 

정확히는 402. 이제 403쪽이군.’

 

들고 있던 용지를 펴서, 책장의 빈 책꽂이 선반 위에 파일을 펼쳐 놓고 묶어놓은 리본을 풀어냈다. 가볍게 풀린 것에, 용지 윗부분에 들고 있던 것으로 리본이 관통할 수 있는 구멍을 낸다.

 

리본이 많이 삭았군. 곧 끊어질 확률 95%갈아야겠군.’

 

덤덤하게 용지들과 리본끈을 살핀다. 그 사이 마루이와 쟈칼이 제일 먼저 갔고, 오늘 저녁에 일이 있다던 사나다가 뒤를 따라 먼저 간다.

 

야나기, 오늘 뒷정리는 너…….”

 

흐악!”

 

!!!”

 

유키무라가 야나기에게 말을 건네며 자신의 교복 블레이저를 손에 쥐었을 때, 시끌벅적하던 릿카이 테니스 부실은 결국 사단을 맞았다.

 

…….”

 

, 야나기 선배?”

 

……푸릿.”

 

물통을 들고 장난을 하다가 나한테 맞은 건가…….’

 

히이익, 선배, 죄송해요!!!”

 

내가 안 했다.”

 

상태를 보아선 아마 주범은 키리하라와 니오인 듯 했다. 키리하라가 입 열기 무섭게 선수를 치고 부실을 나서는 니오의 모습이며, 안절부절 제 눈치를 살피는 키리하라의 기색을 살피건대…….

 

상의가 흠뻑 젖어서, 들고 있던 용지도 키리하라에게 부딪힌 충격으로 전부 흩어져 바닥을 가득 채운 채 뒤돌아서서, 야나기는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아카야.”

 

, ?”

 

남아라.”

 

……………….”

 

 

 

 

어떡해요, 선배?”

 

그냥 한 쪽에 모아 둬라.”

 

사락사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만 한동안 울린다.

붉어지다 못해 이제는 마지막으로 아련히 그을리고 있는 태양 빛이 부실 안을 은은하게 물들이는 저녁나절.

야나기는 모두가 나간 고즈넉한 테니스 코트의 부실 안에서 온통 바닥에 널렸던 과거 기록이 적힌 파일 종이들을 모으고 다시 리본을 구해 정리 중이었다.

 

사단을 낸 장본인인 키리하라는 모두가 집에 간 시각, 분명 같이 놀아 놓고 나 몰라라 제일 먼저 잽싸게 튄 니오를 대상으로, 속으로만 투덜거리며 주워도 주워도 끝이 보이지 않는 종이들을 모아 테이블에 올린 뒤 다시 웅크려 앉아 흩어진 종이들을 모았다.

 

우와. 이게 다 뭐에요, 선배, 학교 입학하고 데이터만 모았나 보네.”

 

야나기의 지식 보유량이야 단연 톱이고, 그의 냉철한 판단력과 예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임을 모르는 이가 없지만 그래도 막연하게 느끼는 것보다, 이렇게 눈앞으로 그 귀퉁이가 나타나니 새삼스럽게 감탄과 충격이 드는 건 당연한 것이다.

 

키리하라는 우와 하는 감탄을 연신 내뱉으며 종이를 차곡차곡 번호 대로 쌓았다. 끝이 없을 것만 같던 종이들은 그래도 빨리빨리 움직여서인지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그래도 완전 어두워져야 집에 가겠네, 하고 생각하며 그는 얼추 품에 쌓인 종이를 들고 일어서 테이블에 놓았다.

 

야나기 선배?”

 

테이블에 한 손을 올린 채, 서 있는 모습이 평소와는 영 다르다.

평소에도 가장 조용하고, 침착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지금 서 있는 모습은 부실 가득 쏟아지는 황혼과 얽혀 마치 그림 같았다.

 

온통 주홍으로 빛나는 모습으로,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선배의 모습은.

 

선배 왜 그러세요.

라고 물으려고 했지만, 키리하라는 그 말을 삼켰다. 대신 테이블을 돌아 그의 옆으로 다가선다, 조용히.

 

, 야나기 렌지는 어딘가 아련한 모습으로 서서히 끝물을 갈무리하며 산 너머로 잠겨가는 해를 넋을 놓은 듯 바라보고 있었다.

키리하라는 그의 옆모습을 올려다본다. 분명 저보다 큰, 평소 그가 이를 갈며 내가 꼭 엎어버린다고 투지를 불태우던 굳건한 대상이건만, 지금의 그는 어딘가 아스라이 사라질 듯 가볍기만 하다.

 

서서히 어두운 보랏빛에 자리를 내어주는 붉은 빛을 온 몸으로 받으며. 오로지 단 하나, 꺼져가는 태양만을 바라보는 시선은 정말로 그림 같은 분위기의 정점을 찍고 있었다.

 

야나기선배.”

 

이 순간 그와 해를 표현할 말이 무엇일까.

안타깝다. 서글프다. 아련하다. 구슬프다.

가지각색의 단어가 키리하라의 머릿속을 쥐어짜고, 그는 제 부름에도 들리지 않는 듯 이제는 다 꺼진 창밖의 산 너머를 응시하는 야나기의 팔을 붙잡았다.

 

선배. 야나기 선배.”

 

막연한 기분으로. 꺼져가다가 사라진 태양빛처럼, 노을을 응시하며 서 있던 야나기의 모습에도 어둠이 드리워지는 모습에 키리하라는 그를 부르며 팔을 덥석 쥐었다.

첫 말에 들리지 않는 듯, 팔을 잡은 모습에도 저를 돌아보지 않는 모양새에 초조함과 어린 불안함이 섞인 채로.

 

야나기 선배, 왜 그러세요.”

 

말이 없는 상대를 보며, 키리하라는 어딘가 가슴 한 곳이 아리는 걸 느꼈다.

그것이 초조함과 불안함에서 기인한 것임은 알아채지 못 했다.

불과 한 살 터울이지만, 야나기와 키리하라의 사이엔 판이하게 다른 성격과 감성의 벽이 있다.

 

그것을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는 키리하라지만, 지금도 딱히 심도 있게 생각하고 있진 않지만, 이 순간의 키리하라는 저를 보고 있지 않은 야나기와의 사이에서 어떠한 벽을 처음으로 체감했다.

내가 느끼지 못 하는 것을 보고 있는 선배. 나는 보이지도 않은 채, 홀린 듯이 무언가를 보고 있는 선배. 그것은 초조함과 불안감과 어떠한 어린아이 같은 심리를 불러왔다.

 

해가 다 지고, 어둑어둑한 가운데 멀리 인공의 불빛만 보이는 가운데에서도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먼 곳을 바라보는 선배의 모습에 키리하라는 어딘가 부루퉁한 표정이 되었다. 입술을 얕게 깨물고 야나기의 팔을 두 손으로 붙잡는다.

 

선배. 저 안 보면…….”

 

지금 안 보면?

 

키리하라는 저 스스로 뒷말을 못 찾고 웅얼웅얼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야나기 선배. 뒤에서 확 밀어버려? 몸통박치기라던가? 테니스로 덤비면 아직 질 텐데.

 

, 혹시 이길 지도. 지금은 제정신이 아니신 것 같으니까. 아니 근데 제정신이 아닌 선배한테 그런 말로 협박해봐야 아는 체나 해주실까?

역시 몸통박치기라도 하는 게 좋겠다.

 

때릴 거예요. 는 조금 강하니까 달려드는 의미를 담는다면 역시,

 

저 안 보면 덮칠 거예요! ………?!?!?!!!!!!”

 

뭐라구요?!!?!

 

자신이 말하고도 기겁을 한 키리하라의 눈이 번쩍 뜨인다.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펄쩍 뛰다시피 기겁을 하고 순식간에 한 걸음 물러나서는 짧은 비명. 경악을 외치기 무섭게 자기가 놀라서 입을 틀어막는다.

 

아카야.”

 

효과는 있었다. 당초 목표했던 것은 달성했으니까.

키리하라의 경악한 얼굴을 보며, 키리하라가 그의 팔을 붙들고 고민하던 순간부터 잠시 넋 놓았던 정신을 갈무리하던 야나기가 낮게 그를 불렀다.

, 하고 입을 닫았다가 키리하라가 폭풍처럼 말을 쏟아낸다.

 

그게 아니고요! 그냥 야나기 선배를 때릴까 해서! 근데 때린다고 하면 이상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제멋대로 입에서! 그렇다고 선배를 진짜 때리려고 했단 것도 아니고요?!?!”

 

야나기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네가 평소 읽으란 책은 안 읽고, 뭘 보는지 충분히 알 것 같다.”

 

그게 아니라니까요?!”

 

먹물처럼 번진 부실 밖의 어둠으로부터 멀어지며 야나기는 온갖 난동을 부리는 키리하라를 놀리며 테이블로 돌아갔다.

늦었군.

 

야나기 선배, 제 말 듣고 계세요?! 선배?! 선배 또 딴 생각 하세요?!”

 

오늘 석양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실언이에요! 죄송하다니까요! 선배 대답 좀 해주세요!?”

 

활기차고. 어딘가 아련하면서 익살스럽고.

 

선배!”

 

야나기는 키리하라의 머리를 툭툭 가볍게 토닥였다. 으응? 난데없는 행동에 키리하라가 의아한 듯 눈을 둥글둥글 크게 뜬다. 콧잔등을 찡그리는 걸 내려다보며 야나기가 말했다.

 

알겠다.”

 

. 오해에요. 오해.”

 

순순히 납득하는 모습에 키리하라의 눈이 약간의 의심을 머금는다. 이럴 때만 제법 눈치가 사는군. 야나기는 저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미 다 모아놓은 용지를 리본으로 질끈 동여매고, 원래 있던 책꽂이에 놓으며 집에 안 갈 거냐, 하고 한 마디 하자 키리하라가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다가 부리나케 가방을 집어 든다.

 

선배! 오해 풀린 거죠? 딴 선배들한테 말하면 안 돼요!?”

 

아아.”

 

대충 넘어가는 모습이 조금 불만스러우면서도 실수한 건 저니까, 키리하라는 낑낑대며 옆에 달라붙었다. 야나기는 불을 끄고, 문을 잠그며 그를 무시한다.

 

근데 오늘 선배 왜 그러셨어요?”

 

석양이 예뻤으니까.”

 

? 뭐가 예뻐요? 해는 맨날맨날 똑같은데. 제 말도 다 안 들린 채로 해만 보고.”

 

키리하라는 여태 혼자 꿍쳐 있던 걸 모조리 털어놓으려는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부실 문을 잠근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야나기는 돌아섰다.

키리하라가 그의 옆에 나란히 따라붙는다.

 

해는 맨날 지고, 맨날 빨갛고. 근데 그렇게 빤히 보시다니 야나기 선배 감성이 살아있구나신기하네요. 선배는 숫자만 엄청 좋아하는 것 같은데.”

 

아카야.”

 

?”

 

야나기가 키리하라를 나지막하게 부른다. 키리하라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위에 위치한 그의 단정한 옆모습을 올려다봤다.

야나기가 단정한 태도로 말한다.

 

누가 누굴 덮치겠다는 발언을 했던 것 같은…….”

 

죄송합니다! 야나기 선배는 감성이 살아있는 부처에요!”

 

으아아아아 선배! 실수라니까요! 그렇게 뒤끝 있게 그러는 거 아니에요! 선배 제 말 듣고 계세요? 선배 대답 좀요! 제가 실언 했어요! 근데 저 막 그런 거 보고 그러는 거 아니거든요? 저희 집은 마녀가 있어서 절대로가 아니고! 하여튼 안 까불게요 죄송해요! 야나기 선배는 감성이 싱싱한 부처님이에요!

 

약간의 트러블이 가미된 어느 날과 같은 평화로운 저녁. 여느 날과 같은 패턴이 평화롭게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