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 Amare
Written by Rine in Rine's Side
언뜻 서리가 어린 듯 서늘해 보이는 눈매.
그리고 그와는 대비되게 어느 정도 심중에서 기인한 상냥함과 온화함으로 감싼 눈매.
니오는 유키무라에게서 눈을 돌렸다.
연습실이 몰려 있는 건물의 1층으로 내려오자, 중앙 홀에 드문드문 악기를 든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천장에 매달린 섬세한 샹들리에. 계단이며 나무 조각품이며 뭐 하나 고급스러움이 풍기지 않는 게 없다. 그 모든 것들을 감흥 없다는 눈빛으로, 그러나 하나하나 골똘히 바라보며 니오는 장난치듯 어깨를 으쓱했다.
“유키무라다…….”
“유키무라?! 야나기랑 시시도도 있잖아!”
“야규 옆에 있는 사람 누구야? 처음 보는데?”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에 뜨문뜨문 아는 이름이 섞여 나온다. 반가움. 혹은 질겁함. 혹은 의문. 하여튼 수군대는 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이거 부담스러운데? 니오는 자신들을 향하는 시선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아 이 제멋대로들. 주변에서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제 갈 길 갈 녀석들이다. 뭐, 표정이 바뀐 사람이라면 시시도 정도일까. 그는 어딘가 불편한 퉁명스러운 표정인 채였다.
“일정이 없다면 인근 가게에서 점심을 먹는 게 좋겠군요.”
야규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 물었다. 니오에게 묻는 건 아니었다.
나머지 세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며 하는 말에 시시도가 콧등을 긁다 대꾸했다.
“상관없어.”
“어차피 점심 먹고 또 연습하려고 했으니까. 손님도 있는데 학교 식당은 너무 하지?”
유키무라의 말에 야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괜찮다면, 근처로 가죠.”
“안 괜찮을 건 뭐야.”
풀밭이며 나무며 한적하고 파릇파릇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교정을 지나치며, 여전히 주변 사람들에겐 자연스럽게 온 시선을 긁어모으면서 이동하는 한 무리.
덧붙이는 니오에게 말을 건 건 야나기다.
“그런데 니오. 채권자라는 건 뭐지?”
“아니. 그냥 장-난. 반쯤.”
니오가 야릇하게 씨익 웃었다. 야나기는 그런 니오의 반응에도 별다른 리액션 없이 덤덤하게 야규를 바라보며 뒷말을 물을 뿐이었다. 니오가 ‘쳇, 재미없어’ 하고 혀를 찼다.
“별다른 건 아닙니다.”
딱히 할 말은 없다는 듯, 야규가 야나기에게 말했다. 니오는 제 일 아닌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교정을 빠져나올 때까지 주변의 시선과 수군거림은 계속됐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훌륭하게 따로 노는 집단 속에서, 니오는 옆에 서 있는 야규의 질문에 고개를 기울였다.
“뭐, 먹고 싶은 거라도.”
“…라고 해봐도 고기집 밖에 없는데.”
정말이다. 건너편 상가에도 부어스트, 맞은편도 부어스트, 이 거리는 죄다…….
“그걸로 식사가 되겠습니까.”
일단. 매일같이 먹게 되는 만큼 독일 음식엔 적당히 적응 내지 포기한 야규가 물었다.
니오는 턱에 손가락을 가져가선 흐음- 하고 말을 흐렸다.
애초에 독일 쪽에 머문 적이 별로 없다고, 나는?
“적당한 걸로 네가 알아서.”
야규는 불성실한 답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니오는 먹는 양이 굉장히 적다. 활동량에 비해서. 단지 입이 짧은 만큼 맛에도 민감할 뿐이다.
괜찮을까. 소금 한 가득인 맛.
생각해보니 안 괜찮을 것 같기도.
야규는 이가 찡하게 딱딱한 빵과 고기고 빵이고 죄다 소금칠을 해 놓은 독일 일반식을 떠올리고 멈칫했다.
물론 헤켈 본가가 독일에 있는 만큼 니오 역시 독일 식단은 알지만, 어쨌든 그는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에서 머무는 날이 더욱 많고 독일 음식이라고 해봐야 부어스트나 적당히 치즈 넣은 빵 정도 밖에 먹어 본 적이 없으니까.
과연 흔한 길거리에서 파는 전형적인 소금 범벅의 독일 요깃거리를 먹을까.
저렇게 가벼운 사람처럼 돌아다녀도, 나름대로는 까다로운 사람이라.
야규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프랑스 식당으로 갈까요.”
어쩔 수 없다.
괜히 먹을 걸로 짜증나게 했다간 남은 시간 동안 이죽이는 스킬이 배는 높아질 테니.
⁂
“와인은 음주용이 아니라 식용이야.”
“하아?”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와인글라스를 기울이며 하는 니오의 말에 시시도가 헛웃음 소리를 냈다. 근면성실에 가깝게 대학 생활을 하고 있는 그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여유로움 가득한 태도이니, 쌍방 이해가 불가 하다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니오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잔을 내려놓고 느릿하게 시시도의 접시로 포크를 뻗었다.
“먹을 만 하네.”
그거 내 꺼라고 임마…….
스테이크에 감자튀김(steak-frites)이라는 가장 무난한 식단을 앞에 두고 있던 시시도가 또 한 번 헛웃음을 지었다. 이 녀석 일본인 맞아? 시시도의 말에 야나기가 대답했다.
“그는 소학교 입학 전부터 유럽에서 생활했으니까.”
이미 습관은 서양화 되지 않았을까. 라고 말하면서도 야나기는 덧붙였다.
아무리 그래도 오늘 처음 본 사람 밥을 빼앗아먹는 천연덕스러움은 그저 천성인 것 같다만.
그 말에 니오도 야규도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니오. 일정은 확실히 끝냈습니까.”
야규는 커피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니오가 특유의 입버릇을 내뱉으며 대꾸했다.
“다 했거든. 전부 다- 했거든.”
“그렇습니까. 요령만 피우는 사람이라 믿음이 안 가서. 실례를.”
“실례인 거 알면서 하는 게 질이 나쁘다고.”
야규는 못 들은 척 했다. 들고 있던 한 잔을 해치우고 또다시 한 잔을 따라 입에 댄 니오를 제각각 다른 표정으로 보면서, 일행은 음악에 관한 얘기를 꽃피웠다.
도도한 표정으로 무심하게 있던 니오는 늘씬한 상체를 테이블에 기울이고 글라스를 내려놓았다.
“세 달 뒤인가, 학내 연주회.”
“가깝네. 교내 앙상블은 몇 팀이더라?”
“우리를 포함해서 세 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긴 하지만.”
대화는 어느새 학내 정기 연주회로 넘어갔다. 유키무라는 흰 얼굴에 상냥한 곡선의 미소를 떠올렸다.
“니오도 오지 않겠어? 티켓 걱정은 필요 없으니까. 야규도 함께 출연하는데.”
“하? 왜?”
니오는 노골적으로 싫다는 기색을 뿜어냈다.
귀찮게 진짜. 라고 덧붙이는 말은 어쩐지 누군가를 노리고 하는 말임이 다분했다.
야규는 식사를 마치며 말했다.
“니오. 적당한 음주는 말리지 않지만 그 이상은 그만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의 눈은 니오가 혼자 다 비운 와인병을 향해 있었다.
니오는 더 이상 마실 생각은 없었는지 글라스에 담긴 와인을 찰랑이듯 움직였다.
“안 먹어. 안 먹어.”
‘오스트리아 슈니첼은 없어?’
무슨 변덕인지 독일 한복판에서 꼭 과일 소스를 곁들인 구체적으로 일본식 돈가스와 비슷한 맛의 슈니첼을 먹어야겠다고 투덜대던 니오는 ‘다 먹을 수도 없으면서.’ 라는 야규의 말에 심통이 난 듯 했다.
제 빵을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야나기의 메뉴를 매의 눈으로 살피고 있는 니오를 보고 시시도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훔쳐 먹으려고?”
“…난 지금 밥 처음 먹었거든 오늘? 좀 먹으면 어때. 내 꺼 아닌데.”
“아침엔 뭐 먹었는데, 니오?”
니오는 답하지 않고 능청스럽게 야나기의 접시에 있는 새우를 홀랑 집어갔다. 냠, 순식간에 새우가 입 속으로 사라진다.
“니오의 집엔, 시리얼, 과자, 물, 과일, 술 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오래 알고 지낸 야규가 대신 대답했다. 니오는 그에게 눈을 부라렸다. 너 왜 내 사생활 까발려, 하고. 누구도 듣지 않았지만.
“그렇게 먹어선 신체가 유지되지 않는다. 니오.”
“아- 혼자 살면 밥 해먹기 귀찮다고.”
야나기의 말에 니오가 고개를 돌리곤, 이번엔 야규의 그릇에서 튀김을 가져갔다.
“니오. 적당히 줄 테니까 달라고 하시길.”
“됐네. 먹여주기라도 하려고?”
“바라신다면야.”
“아니. 진짜 됐어.”
니오가 다시 와인으로 주의를 돌렸다. 야규는 묵묵히 제 먹을 걸 먹고, 시시도는 또 벙벙해 하고, 유키무라는 웃는다.
평화로운 한 때가 지나가고 있었다.
“슬슬 일어나도록 할까요.”
마지막 남은 와인을 넘기는 니오에게서 눈을 돌리며 야규가 말했다. ‘그럴까?’ 하고 대답하는 유키무라에게 고개를 돌리면, 무슨 생각인지 빙긋 웃으며 그가 눈을 마주친다.
유키무라가 말했다.
“둘이 좀 더 있다가 올 생각이지?”
그럼 먼저 들어가 볼까?
유키무라는 야나기와 시시도를 챙겼다. 챙겼다고 할 것도 없지만.
다음 강의가 있다는 시시도를 필두로 유키무라와 야나기가 먼저 헤어지고, 니오와 야규는 잠시 서 있었다.
“아. 바이올린.”
한낮의 베를린이라는 곳은 음악 소리가 풍부한 곳이네, 제법. 니오는 귀 기울이지 않으면 모를 소리를 캐치하며 중얼거렸다. 비단 바이올린뿐만이 아니다.
야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공원으로 갈까요.”
이곳에서 니오가 아는 공원이라곤 방금 전 그와 만났던 곳. 니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곳곳에서 악기 소리가 들린다.
아니. 악기 소리만 들리는 것 같다.
평소보다도 더. 니오는 옆에서 묵묵히 따라 걷는 야규에게 툭툭 말을 건넸다.
“불러내놓으니까 좋냐? 안 바빠?”
그의 말에 야규는 한 치의 감정표현도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가 난데없이 니오를 돌아본다. 흥얼흥얼 가볍게 걷던 니오는 자신을 응시하는 야규의 눈에, 잠시 멈칫한 채로 고개를 까닥였다.
말을 이을 듯 했던 야규는 그러나 화제를 돌렸다.
“…이전에, 로텐부르크에 있었다고요.”
“…어.”
말 돌리냐고 물어야 할 니오다. 그러나 그는 별달리 평소처럼, 쏘아붙이거나 이죽거리지 않았다. 바이올린 소리에 귀 기울였던 감각이, 좁아진다.
자신의 하릴없는 심장소리에 온 신경이 쏠린다.
왜. 니오는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있었다고 해도, 이틀이나 있었나. 내도록 잠만 자서 날짜 감각도 영.”
뭐라고 묻고 싶은 건지. 뭐라고 대답하고 싶은 건지.
딱히 두 사람은, 거론하지는 않는다.
둘은 또다시 별 거 아닌 소리를 주고받는다. 처음 봤을 때도 그랬듯이, 언제든 그랬듯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어긋나고를 반복하면서도.
정말로 뭐라고 대답하려고 했냐고 묻지 않는 니오다.
정말로, 듣고 싶냐고 묻지 않는 야규다.
본인들에게 크게 상관없는 일을 지나치듯이, 두 사람은 베를린 시가지를 걸었다.
길이가 제멋대로인 은발을 드리운 늘씬한 남자의 뒷모습과 단정한 와이셔츠 차림의 짧은 커트 머리의 남자가 비슷한 속도로 해가 질 생각을 않는 여름의 저녁을 걷는다.
⁂
니오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폈다. 계절을 타는 건지, 그는 요즘 잠을 매달고 살았다. 햇살을 받으며 풀밭에서 늘어지는 모습은 꽤나 나른한 고양잇과 동물 같았다.
그의 모습을 그저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야규에게 고개를 돌린 니오는 이죽이 듯 미소를 지었다.
“돌려받을 거야.”
“괜찮겠습니까.”
어떻게 저 놈은 묻는 말조차 담담할 수가 있는 거지. 니오는 반쯤 찡그린 채로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잔디 위에 엎드린 채 한 손으로는 턱을 괴고 한 손으로는 손사래를 치는 그의 모습은 꽤나 자연스러웠다.
“그보다 가지고 있긴 한 거야?”
야규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가 구실 삼아 니오를 부르기 전부터 품에 지니고 있던 것이다.
그의 손에 끌려나온 것은 반짝이는 장식품이었다.
화이트 골드의 심플한 그것은 섬세하게 마치 귀족 가문의 문장이라도 되는 양 조각된 휘장이다.
반쯤 반가운 눈길로, 반쯤 심드렁한 눈길로 드러난 그것을 바라보며 니오가 말했다.
“흠집 났다면 가만 안 둘 거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당신이라 생각하라면서.
야규가 덧붙인 말에 니오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삐끗했다.
윽, 하는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니오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내 놔.”
“괜찮겠냐고 물었습니다, 니오.”
야규가 묻는 의미를 너무도 쉽게 알아들은 니오는 기분 좋은 듯 웃었다.
다시 한 번 로망스 첼로의 선율이 담긴 바람이 그의 은발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이번엔.”
야규가 덤덤히 내미는 휘장을 받아 제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으면서 니오는 야규에게 바짝 얼굴을 가져갔다. 그를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는 구실을 삼도록 야규에게, 저는 때때로 손에 잡히지 않는 휘장의 감각에 그것을 맡긴 야규를 떠올리도록.
니오는 키득키득 숨 죽여 웃었다.
그의 입가의 새초롬한 점이 겹쳐지는 얼굴에 보이지 않게 되고,
“너를 맡겨.”
내게 찾아와. 네가.
# 그만의 파스티초,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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