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가 눈을 뜬 건 아직 어두운 새벽 6시였다.
평소라면 절대 눈을 뜰 일이 없는 시간이었지만, 언제 잠들었었냐는 듯 반짝 뜬 눈은 초롱초롱하기만 했다.
벽면의 시계를 확인한 레오는 한숨을 쉬고 이불 위를 팡팡 내리쳤다.
“너무 일찍 일어났어.”
오전 6시면 편지 배달은커녕 집배원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시간이다.
이제 앞으로 몇 시간을 멀뚱히 기다려야 한다니.
하얀 털을 핥으며 이불 속에 파묻힌 채로 레오는 잠시 궁리했다.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할까?
하지만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1분 1초를 계속 기다리는 것뿐이라는 걸.
.
.
.
레오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멀리 이사 간 친구가 보내줄 발렌타인 선물이었다.
생일이 2월 14일인 덕에 레오의 선물은 항상 레오가 가장 좋아하는 고양이 초콜릿 전문점의 베스트셀러로 정해져 있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초콜릿도 기다려졌지만 더 기다려지는 것은 항상 14일에 맞춰 초콜릿을 보내주는 친구 세라였다.
“레오씨. 등기가 왔어요.”
초인종이 눌리기 무섭게 문을 벌컥 연 레오 앞에 서, 풍성한 털이 언제 봐도 아름다운 우편배달부 크림이 두 손으로 상자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그녀보다 키가 작은 레오는 허리를 조금 낮춰주는 크림의 손에서 선물 상자를 받아들었다.
벌써 레오의 집에 4년간 우편물 배달을 해온 크림은 즐거워하는 레오를 보며 웃었다.
“친구분이 보내주신 것 맞죠? 생일 축하드려요.”
“고맙습니다! 맞아요. 세라가 보내준 거예요. 저도 항상 그 애 생일에 선물을 보내주거든요.”
신이 나서 조잘조잘 말을 잇던 레오의 말끝이 흐려졌다.
좋아한다고 마구마구 보내던 온갖 크고 작은 레오의 선물과 편지들 때문에 세라가 그 집 우편배달부와 사랑에 빠질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던 일이었다.
울적해진 마음에, 눈앞에 크림이 있다는 것도 잊고 레오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정성 들여 목에 단 하얗고 푸른 리본도 어쩐지 축 늘어져 바닥에 닿을 듯 했다.
우울해진 레오를 본 크림이 저런, 안타까워하며 레오의 어깨를 토닥였다.
“레오씨. 좋은 날인데 너무 우울해하지 마요. 저도 준비한 게 있어요.”
세라가 보냈었던 청첩장을 전달해준 장본인인 크림은 본의 아니게 레오의 짝사랑을 결말까지 알고 있었다. 절대 티는 내지 않았지만.
크림은 사려 깊게도, 슬퍼하는 레오를 위로하려 함인지 상냥하게 레오를 불렀다.
크림의 난데없는 말에 레오가 고개를 들었다.
푸르고 커다란 눈이 벌써부터 촉촉해져 있었다.
“네?”
분홍 귀와 푸른 눈, 둥근 얼굴, 분홍 코가 갸웃거렸다.
그보다 자그마한 레오를 보며 크림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레오씨 생일 축하해요. 그리고 이건,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드리는 발렌타인 선물.”
레오가 고개를 숙이고 침울해한 사이 꺼낸 상자 두 개를 레오에게 내밀었다.
하나는 뚜껑이 닫힌 하트 모양 박스였고, 하나는 필름을 통해 안에 든 초콜릿이 다 보이는 상자였다.
가지런한 하트 모양의 초콜릿 쪽을 더 내밀며 크림이 말했다.
“레오씨. 사랑합니다.”
크림이 지난 주 금요일 우체국에 도착한 세라의 선물을 보고 질투에 휩싸였다는 건 전혀 모르는 레오는 큰 눈을 깜빡깜빡이며 크림을 올려다봤다.
초콜릿 상자를 받아들던 손도 그대로 정지한 상태였다.
세모로 벌려진 입을 보며 크림은 조용히 웃었다.
“네?”
반면 때 아닌 발렌타인 고백을 들은 레오는 황망함에 되묻기만 했다.
속으로야 어떻든, 겉으로는 태연하기만 한 크림이 무를 기미가 없자, 레오는 당황에 몸을 들썩여 털을 부풀렸다.
“크, 크림씨. 잠깐만요. 물론 크림씨 저도 좋아하지만…….”
하얀 털마저도 빨간 색이 되어버릴 것처럼 부끄러워진 레오가 횡설수설 말을 못 이었다.
포도나무가 예쁜 포도밤꿀섬 605번지에 온 뒤는 물론이고, 그 전에도 누군가를 사귄 적이 없던 레오는 지난 4년간 항상 그녀를 기쁘게 했던 우아한 우편배달부의 고백에 결국 초콜릿 상자로 얼굴을 가렸다.
“크림씨…….”
상자 너머로 조그맣게 레오의 뒷말이 흘러나왔다.
“부끄러워요…….”
그렇게 말하며 초콜릿 상자를 작은 두 손으로 꼭 끌어안는 레오를 보며, 크림은 나머지 상자를 쥐고 그녀의 앞에 무릎을 굽혔다.
“저랑 사귀어주세요.”
나머지 상자의 비단 리본 아래에는, 레오의 눈처럼 영롱한 푸른색의 목걸이 두 개가 가지런히 들어 있는 것을 크림만 알았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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