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허수아비
전력 60분 #11. 회사
회사 뿌셔주세요
혜지님이 접속하지 않은 저녁이 지나가고 있었다.
카톡에도 혜지님이 나타나지 않은 하루가 가고 있었다.
이런 하루는 싫어!! 소리를 꽥 지르며 옆으로 구르자 때마침 내 방 문을 열던 혈육이 오만상을 쓰고 침 뱉는 시늉을 했다.
“피자 시키자.”
“돈 없어.”
“아 쫌.”
피자 반반 내고 시켜먹자는 소리가 별로 달콤하게 들리지 않았다. 징징대는 걸 무시하고 있자 호적메이트가 발광을 해대기 시작했다.
“아 먹자고~ 엄마아빠도 없잖아~ 하나 시켜서 둘이 다 처먹으면 되잖아~ 어차피 밤새 게임할 거잖아~!”
와 진짜 못생기고 징그럽다. 저런 놈이 여자친구가 있다니.
여자친구분 도망쳐.
“님 여친 연상이던가?”
“뭔 상관임.”
“아 피자 시켜. 시켜.”
어차피 돈은 반반 내는 건데 뭐가 좋다고 희희낙락이지? 내가 사준다는 것도 아닌데. 멍청해서 그런가 즐거워하는 기준점이 좀 낫다.
“콜라 큰 걸로 시켜.”
“내 여친은 왜?”
들고 온 핸드폰을 두들기던 놈이 물었다.
서로 자기 할 말만 하는 건 일상이라 나도 내 할 말을 던졌다.
“여친 직장인임?”
“어.”
“그럼 언제 만나?”
“사이드메뉴도 시킨다.”
“미친놈아.”
시키긴 뭘 또 시켜 돈 좀 그만 써. 누워 있던 그대로 다리를 쭉 뻗어 문가에 서 있던 오빠새끼 다리를 공격했다. 눈치만 빨라선 쏙 피하는 게 매우매우매우 기분 나빠.
“피자랑 콜라만 시켜 살 찐다고.”
“이미 시킴.”
“또라이 아니야???”
저걸 죽여 살려 어휴. 지 볼일 끝난 놈이 문지방에 기대서 말했다.
“주말에 만나지.”
“평소엔 카톡함?”
“카톡하고 전화. 왜? 연상이 만나재?”
혼자 웃고 있는 꼴이 심히 기분 나빠서 툭 내뱉었다.
“이미 만나고 있음.”
“랜선연애 안 삼.”
“아니 진짜라고. 아 꺼져!!”
내가 무슨 득을 보자고 저 새끼한테 상담을 했지. 좋단다고 쪼개며 지 방으로 건너가는 걸 보며 한 번 더 소리 질렀다. 문 닫고 가 미친놈아!!!
(혜지님♡: 로로야~)
떠드느라 옆에 둔 핸드폰 액정이 번쩍 불이 들어왔다.
혜지님 갠톡이었다.
“헐. 헐.”
앓는 소리를 뱉으며 핸드폰을 붙들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접속하셨나? 게임을 켜 둔 모니터를 쳐다봤지만 새로 온 메신저 알림은 없었다.
(혜지님!!!)
(퇴근하셨어요??)
(아니 지금이 몇 신데 이제 퇴근ㅠ 회사 미쳤내여ㅇㅅㅇ)
회사 생활은커녕 아르바이트도 해본 적이 없으니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어서 속상했다.
뭘 알아야 도와드리는 말도 하고, 위로도 하고 그럴 텐데. 그래서 요즘은 그런 주제에 촉이 서서, 온갖 회사생활 팁을 읽어보고 있는 중.
(혜지님♡: 우리 팀 업무가 안 끝나서...ㅠㅠ 이제 퇴근했어)
(혜지님♡: 오늘도 시간 낭비ㅠㅠ)
회사란 생각보다 정글 같은 곳이었다. 그냥 제 시각에 출근하고, 내 할 일 하고, 퇴근하고, 그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런 것보다 훨씬 복잡한 세상이었다.
예컨대 요새 퇴근이 늦은 혜지님은 혜지님 본인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이 안 끝나서 퇴근을 못 하고 있었다. 내 일 끝났는데 그럼 뭐하지? 싶지만 그럼 일이 있는 척 뭔가 하고 있는 척 가장하고 있는 단다. 아니 왜?? 비효율의 극치라고 생각하지만 그런가보다 할 수밖에 없었다. 어른의 세계란... 연대책임이었다. 덕분에 난 벌써부터 미래의 내 회사생활이 무서워지고 있었다.
(혜지님 저 이번 방학에 화약기사 딸까요?? 다 뿌셔버릴까 싶고ㅠ)
진짜 마음만은 이미 작살냈을 것 같은데. 길드 생활 하면서 늘어난 능청으로 위로 아닌 위로를 시도했다.
(혜지님♡: 아냐 그만둘 때 내 손으로 터트릴래...ㅋㅋㅋㅋㅋ)
(혜지님♡: 그래도 일단 회사 밖으로 나오니까 좋다)
(혜지님♡: 내일 다시 출근하지만)
(혜지님♡: 로로랑 톡하면서 힐링하니까 괜찮아)
혜지님이 못 보셔서 다행이다 생각하며 히죽댔다. 내 표정 끝내주겠지 지금.
(저 온종일 혜지님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혜지님 없으니까 게임도 재미없고...)
(언제 오시나 안절부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메신저의 좋은 점은 텍스트를 이용해 장난인 척 떠들 수 있다는 거 아닐까?
얼굴 보고는 절대 못할 소리를 할 수 있다. 마주 보고 얘기 중이였으면 이런 말은 무슨 말 더듬고 난리 났겠지.
(혜지님♡: 고마워ㅠ 내일부턴 더 일찍 끝날 거야)
(혜지님♡: 그래봤자 정시퇴근이네...ㅎ)
(넹넹 오늘은 일찍 주무시구요ㅠㅠ)
지금쯤 버스 타고 계실까? 멀미 하시면 안 될 텐데.
몇 가지 주고받으며 떠들고 있으니, 시간이 벌써 그렇게 갔는지 피자 왔다고 인터폰이 울렸다.
“야 피자 받아!!!!!!!!!!!!!”
이어폰 끼고 있는 건가? 싶어서 목청을 최대로 키워 소리 지르니까 방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 니가 좀 받지.”
뭐라고 구시렁대며 나가는데 내 알 바야? 다 씹고 카톡을 보니 혜지님이 톡한 게 있었다.
(혜지님♡: 버스 내렸다)
(혜지님♡: 로로야 지금 통화 가능해?)
헐헐헐 이걸 왜 이제 본 거야 피자 눈치가 없네.
빠른 속도로 키패드를 터치했다.
(네!!!!!!!)
(죠아요죠아요)
“피자 먹어!!!!”
엄마아들이 지가 다 먹을 거니 뭐니 개소리하는 걸 하는 걸 한 귀로 흘리고 흠흠 목을 풀었다.
톡에서 1이 사라지고 곧 액정이 다른 화면으로 바뀌었다.
“혜지님!”
회사 뿌시니마니 하지만, 그래도 퇴근길에 혜지님이랑 이렇게 얘기하는 건 너무 좋아. 그러니까 회사는 적당히 좀 부려먹어 주세요. 우리 혜지님 멋진 회사원인 건 나도 인정하지만 눈치껏 빠지란 말이야.
“보배야아아.”
반가움이 담뿍 담긴 목소리에 헤죽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음 그리고, 멋진 회사원인 혜지님이 이렇게 칭얼거리는 건 나만 듣게 해주세요.
혜지님과 이야기할 수 있었으니 아직 가지 않은 오늘을 정정해야지.
이런 하루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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