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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短篇]/단편

[룬의아이들] 여읍여소 (如泣如笑)

 

 

Wish for happiness             

Written by Rine in Rine's Side

 

 

 

술이란 좋은 거다.

 

남들이 보기엔 취객만큼 성가시고 걱정되는 존재가 없겠지만, 적어도 술에 취한 당사자 입장에선 세상에 이보다 좋은 게 없다 싶은 것이, 그야 아무래도 괜찮은 것 같고, 이런 저런 시답잖은 일 그 까짓것 다 별 거 아닌 것 같고,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 빙빙 도는 게 우습기 짝이 없으니까.

 

마찬가지다.

먹고 사는 거 아무래도 괜찮은 것 같고, 집이고 뭐고 다 어떻게든 될 것 같고,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하늘도 땅도 사람도 집도 빙빙 도는 게 우스울 뿐.

 

동생들 중 하나는 아무리 배가 고프고 짜증이 나도 술은 못 먹겠다고 토할 것 같다며 우웩우웩 죽상을 했지만 글쎄 아가. 술이란 게 배가 고프고 짜증이 난다고 먹을 것 같은 게 아니거든. 귀한 고기도, 귀한 풀떼기도 항시 먹고 싶지만 말이지, 술이란 놈은 배가 고파도 먹고 싶은 게 아니야.

술이 사람 망친단 소리가 왜 있는 줄 아냐?

그건 술 먹고 퍼질 정도의 사람은 이미 망가지고 있어서거든. 따지고 보면 술은 그 퍼진 인간의 하나뿐인 말상대라서 떼려야 뗄 수가 없어지는 거야.

 

한 모금 두 모금. 한 잔 두 잔 마시고 있으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게 쓰지. 쓰기만 해? 술냄새가 역하기도 하고 목구멍 넘어가면 진짜 네 말대로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해. 근데 본심이란 게 원래 처음 말 꺼내는 게 어려운 것처럼 술 녀석도 첫 맛이 어렵지 몇 잔 들어가면 손이 그냥 저절로 병으로 간다?

진짜야. 그냥 술술 넘어가. 더 마시면 취할 거 아는데도 끝장나게 계속 마시게 된다고.

? 좋으니까. 술 취해 가는 그 기분이 좋으니까.

그러니까 이 명언들 다 정리해 보자면……

 

 

나 지금 취했다고.

 

그래서 말이야영감 내 말 듣고 있는 거?”

 

오냐.”

 

오냐가 뭐야 오냐가. 어느 시대 말투냐고. 평소엔 어려운 말 척척 꺼내다가 사람 홀랑홀랑 속여 먹더니 이럴 땐 또 말발이 없어요. 천재 그거 다 헛짓거리네. 때려쳐 영감.”

 

당신 지금 웃고 있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낄낄 웃는다.

세상만사가 다 웃기게 느껴지고 다 만만해 보인다고. 진짜.

 

사는 게 이렇게 만만한 거면 얼마나 좋아? 왜 그게 안 돼?”

 

웃겨서 진짜.

분명 배가 아프도록 낄낄대고 있는데 눈가에 서글서글 맺히는 건 흔히들 말하는 눈물이지. 코에서 나면 콧물. 뛰고 나서 어리는 게 땀이니까. 설마 눈에서 콧물 나온다고 하진 않잖아.

그러니까 눈물.

 

세상이 그렇게 재밌어? 영감은 많이 살았으니까 알 거 아냐. 세상이 그렇게 재밌어? 그러니까 아빠라는 놈도 다 버리고 세상 어디로 뛰쳐나간 거 아니야. 뭔데? 그렇게 재밌는 게 있어서 애새끼들 버리고 나간 건데?”

 

이건 정말로 궁금했다고. 물론 궁금하다고 매일매일 생각하고 처박혀서 그것만 고민하는 저 영감네 멍청이 천재는 아니지만 제법 오래 갖고 있던 질문이라고.

어쨌건 저쨌건 영감도 세상 사람이잖아. 당신은 알아? 당신은 대답해 줄 수 있어?

뭐가 그렇게 좋으면 잡는 거 하나 없이 가볍게 갈 수가 있냐고.

 

저택을 하나 사겠다는 것도 아니고, 귀족이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왜 하루 끼니 때우는 게 이렇게 힘들어? 집에서 자는 게 이렇게 힘들어?”

 

당신을 완전히 믿지 않는다. 당신을 의지하지도 않는다.

당신은 어른이니까. 그렇게 웃고 옆에 있어줄 것처럼 굴어도 결국 제 일 찾아서 어느 날 훌쩍 떠나는 게 어른이니까. 제 자식도 버리는 판에 남남인 당신이 잡을 게 뭐 있다고 좋다고 이 시골구석에서 언제까지고 나 같은 꼬맹이 주정 상대나 해주고 있을까.

 

그러니까 당신을 만나고 나서 아무리 마음 한 구석 어딘가가 편해 졌다고 해도 나는 괘념치 않는다. 이제 적어도 굶어 죽기 직전에서 겨우 주운 풀떼기 하나로 아픈 동생 돌볼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그 해방감도 나는 꾸깃꾸깃 접어서 가슴 속에 묻어 놓고 산다.

누가 아플 때, 배가 곯아서 움직일 힘도 없을 때 들여다봐줄 사람이 있다는 그 기분이라는 거 당신 덕에 처음 느껴봤다는 것도 절대 말하지 않는다. 죽어도.

말하는 순간 가벼워질 중압감을 나는 온전히 품는다.

사실은 당신이 있어서 사는 데 숨 돌린단 걸 처음 느껴봤다는 것도. 무엇도.

 

풀이란 풀 맛은 다 알아. 겨울엔 그나마 풀도 없고 불도 없고 진짜 미쳐 버리겠더라. 재작년 겨울인가. 진짜 이틀 전에 눈 와서 온 세상이 얼어붙고 바람은 바람대로 몰아치고 알다시피 집은 집이 아니라 마구간만도 못한 곳이고. 리하르트가 병이 나서 열은 계속 치솟는데 온 집안 거적때기를 다 끌어다 덮어주고도 체온보존이 안 돼. 일마하고 루돌프하고 애들 다 붙여놓고 어떻게든 따뜻해 보려고 말도 안 하고 덜덜 떠는 걸 놔두고 먹을 거 찾아 나왔는데 진짜 빙판인 거야. 세상이 반짝반짝 해. 온 숲을 뒤져도 쪼가리 하나 없어서 개울가에 나갔다가 허탕만 치고 결국엔 사정사정해서 제일 착한 집에서 빵 조금하고 담요 하나 얻어서 집으로 뛰어가는데 우습게도 눈물이 나더라. 눈물이 나는데 너무 기뻐서 발이 빨라져.”

 

그때를 잊을 수 없을 거다. 여태까지 지속된 내 인생의 기구한 기록 중에서도 선명한 체험이었다. 온 세상이 반짝반짝한 가운데 눈물이 그렇게 쏟아져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없어진 걸 알고도 눈물이 그렇게 난 적이 없었다.

 

손에 쥔 빵 하나 때문에 기뻐서 미친 듯이 달렸어. 발이 얼어서 땅에 닿을 때마다 아픈 감각만 나는데 하나도 아프지가 않아. 그냥 집에 애들 잘 있을까. 리하르트가 괜찮을까. 애들한테 먹일 빵이 있고, 덮어줄 담요 하나 손에 쥐었다는 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어. 서러울 것도 뭣도 없이 진짜 그 순간만큼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어.”

 

가면서 계속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아픈 애까지 데리고 발만 동동 굴렀던 무능력함이 해소돼서, 이걸로 조금이나마 따뜻해질 수 있어서, 조금이나마 배를 채울 수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못나고 아무 짝에도 보탬 주지 않는 형이고 오빠지만 내가 뭔가 해줄 수 있기를 바라는 아이들에게 뭔가를 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영감의 만류로 더 이상 술은 입에 넣지 않고 있는데 이미 마신 술을 도로 뱉어내는 것마냥 끝도 없이 눈물이 방울방울 땅바닥에 떨어졌다. 아주 뚝뚝 떨구는 구나 그냥. 이것도 다 귀한 술인데 아깝게시리.

 

뭐야 나 이 아까운 술 왜 다시 토해내냐. 이거 얼마짜리야?”

 

니가 지난주에 들고 튄 돈만큼 할 거다.”

 

내가 지금 삼주일치 우리 식구 식량을 퍼마시고 도로 탈수시키고 있는 거야?”

 

볼썽사납게 끊기면서도 웃음은 멈추지가 않는다. 말하는 사이에도, 눈물을 신명나게 흘리면서도 웃음은 그치질 않는다.

웃지 않으면 말을 못 할 것 같으니까. 어색하고 진지한 것 따위보다 가볍고 빠르게 말하는 게 좋거든. 울면서 웃으면서 바쁘게 숨넘어갈 듯 묻자 영감이 마지막 남은 술잔을 털어 넣고 죄다 비워진 술병을 옆으로 치운다.

어른이다 이거지. 술 같은 거 마셔도 안색 하나 멀쩡한.

 

너한테 삼주일치 토해내란 말 안 하니까 우는 김에 그냥 울어라. 웃다가 숨넘어간다.”

 

밥 챙겨 먹기도 바쁜 놈이 술값만 이렇게 붓다니.

우리 집에 돈이 없어서 다행이네? 없으니까 그나마 못 쓰는 거 아냐.

 

돈 있고 팔자 편했으면 그렇게 술 퍼먹을 생각을 안 했겠지.”

 

꼴사나운 모습 이거 뭐 한 두 번도 아니고 우스워서 어쩌냐.

이러니 이 영감이 내가 협박을 해도 들어먹지를 않지. 기선제압이고 뭐고 되는 게 없는데.

킥킥 웃다가 또 뭔가 말하고만 싶어서 입을 달싹였다.

말이지, 내가 왜 술이 먹고 싶냐면.

 

동생들 거두는 거? 솔직히 내가 거두지도 않긴 하지. 굶어 죽지 않게 어떻게든 보듬고 열이라도 오르면 죽을까봐 온 식구 애들 단체로 뛰어다니는 게 기껏해야 전부인데. 똑부러진 일마도, 착해빠지게 섬세한 리하르트도, 평소에 헛소린 좀 하는데 공부 한답시고 거들먹거리는 마을 놈들보다 배는 똑똑한 루돌프도, 하여튼 다 여기서 썩긴 아까운 애들이야. 여기서 풀 뜯어서 연명하다가 그럭저럭 커서 그럭저럭 살다 가기 아깝다고. 걔네 때문에 심장이 무거울 때도 많아. 맨날 무겁지. 어쨌든 난 장남이니까. 내가 제일 큰 애니까. 나는 누군가의 기둥이 되어야 하니까.”

 

술이 안 들어가고 배기겠어? 영감탱이야. 말 해 봐. 댁은 요령 좋아서 이런 상황 모르나?

맞다. 당신 첫 째 아니랬지. 그런 게 있어. 첫 째만 아는 거. 그런 게 있다고.

사실 솔직히 나도 당신 만나고 인생이 좀 편해져서 굶을 걱정, 굶어 죽을 걱정은 조금 희미해지긴 했거든. 가끔은 뭐가 되도 되겠구나 하는 희망찬 생각까지 한다니까.

 

근데 말이야. 진짜로 무거운 건 말이지. 진짜 가끔 심장이 뜯기는 것 같은 거 말이야. 울고 싶은 심정이 아니라 눈물부터 흐르고 보는 거.”

 

눈물이 또 흐른다. 처음에 떠들기 시작했을 땐 그래도 목 좀 가다듬으면서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막무가내로 터지는 말을 그저 떠들기만 바빠서 울고 떠들고 목소리는 이미 위로 아래로 흔들리고 난리다.

 

아빤 왜 우릴 버렸을까?”

 

당신 천재니까 내 말 여태까지 들은 거 막 추리했을 거 아니야.

나한테 답 좀 알려줘 봐.

난 도무지 모르겠더라. 아니 알겠는데 도무지 떼버리질 못하겠더라.

아무 짝에도 쓸모없고 어떻게 결론이 날 수도 없는 지난 일인데, 버려버리는 게 마땅한데 왜 붙들고 혼자 생각하고 앉았지?

더 이상 이딴 생각 안 하게 답 좀 알려줘 보라고.

 

우습지? 엄청 애 같지? 부질없지? 근데 난 바보거든. 맨날 루돌프한테, 조슈아한테, 바보다 바보다 하는데 정작 내가 바보다? 기대할 것도 없는데. 아버지 그거 어느 날 훌쩍 나타나도 이쪽에서 사양이거든?”

 

소모성 그 외에 어떠한 것도 안 주잖아. 오히려 죽은 엄마를 생각하는 게 더 좋은 기억이야. 내가 빌어먹을 장남이라 그나마 많이 봐서 집 떠난 그 인간 얼굴이 생생하게 생각나는 게 좋은 걸까 나쁜 걸까.

당신처럼 천재가 아니라 다행이야. 조슈아처럼 천재가 아니라서.

잊자고 잊자고 다짐할수록 정말로 잊어지거든. 정말로 흐릿해졌거든.

 

근데 울리냐고 왜. 왜 없을까? 엄마가 죽어서? 우린 필요가 없는 존재야?

 

안다고. 그런 거 아니야. 지 머리가 복잡해서 돌아서 나간 거니까 우리랑 상관없어. 어쩌면 우리가 아직도 그 남자 심장을 누르고 있는 존재일 지도 모르지. 그래서 야반도주를 한 걸지도 모르지. 보란 듯이 잘 먹고 잘 살고 씩씩하게 살면 되는 거지. 그도 아니면 어쨌든 제 갈 길 가서 욕 한 사발 해주는 인간 정도 취급이면 되겠지. 이래저래 그 인간도 뭐가 복잡해서 터질 것 같으니까, 뭐가 골머리를 앓게 했으니까, 뭐가 속이 터졌으니까 나갔겠지.

 

그딴 거 상관 않고 꿋꿋이 살잖아.

뭔 일만 나면 지 부모한테 달려가는 놈들이나, 먹을 거라곤 혼자 하나도 구할 줄 몰랐던 조슈아 같은 애들보다 훨씬 낫지. 결국엔 다들 잘 크고 있잖아?

성격도 좋고 사교성도 좋고.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다고. 어쩔 수 없잖아.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된 거. 열심히 살았다고.

 

. 이제 세상이 미친 듯이 돈다.”

 

말하자면 졸리다. 술 퍼먹고 신나게 떠들다가 이제 졸리다고.

가끔 가다 술 먹고 나면 늘 그랬던 패턴을 밟아가는 걸 당연히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는 영감이 아까 냅다 치운 술병을 슥 밀고 일어섰다.

나도 따라 일어선다. 물론 감각이 맛이 가서 앞이고 뒤고 죄다 빙글빙글.

내가 제대로 서 있는 지도 모르겠고. 어쨌든 시야가 높아졌으니까 선 것 같긴 한데.

 

내일 들어가면 또 일마가 술냄새 난다고 때리겠지? 영감도 술 먹였다고 맞을 걸.”

 

난 어차피 삼일 뒤에 들어갈 건데.”

 

. 기억하네. 잊을 리가 없나? 어쨌든 삼일 뒤에 봐.”

 

삼일. 내가 영감네서 술 먹고 뻗은 첫 날 잠들기 전에 했던 약속이다.

술 먹고 잠들면 삼일 지나기 전엔 만나지 말자.

깨고 나면 후회되고 후회하면서도 어딘가 기분 좋아지는 게 술주정을 틈탄 어린아이다운 상대에 대한 의지다.

그러니까 삼일 뒤에 보자. 내가 술 덜 깨서 완전히 당신을 기대선 안 되니까.

난 언제라도 나와 내 동생들을 지키기 위해 조금이라도 덜 상처 받아야 하니까.

 

그 뒤로도 계속해서 이렇게 술 먹고 있는 소리 없는 소리 힘들어서 다 하고 나면 꼭 삼일은 지나야 서로 얼굴이나 봤다. 그럴 때면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다시 노친네, 이놈이, 북적북적 싸우기만 하고. 더는 기대지 않는다. 당신도 한 번도 내게 어른인 척 의지해도 되는 존재인 척 다가온 적 없다.

 

일마한테 등짝을 백 대를 맞아도 좋으니까.”

 

가물가물하게 감기는 눈은 더 이상 눈물은 나오지 않고 그냥 빡빡한 느낌만 한가득 이다.

눕고 나서도 빙빙 도는 감각에 또 피식피식 웃었다.

술병이고 뭐고 저 인간이 다 치우겠지. 이것도 저 인간 침대지만 내가 먼저 누웠으니까 오늘은 바닥에서 자라지.

 

매일매일 애들하고 웃고만 지냈으면 좋겠어.”

 

아빠란 놈이 간간히 사람 궁금하게, 미치게 하긴 하지만. 다 필요 없으니까.

바보 같은 조슈아 녀석 놀리면서. 또 당신 비자금 들고튀면서.

딱 이만큼만 웃었으면 좋겠어.

이만큼의 웃음이라도 내 인생에 가득 했으면 좋겠어.

 

아 그리고영감 당신 돈 다 들고튄 건 조슈아가 제안한 거다?”

 

걔 많이 컸더라. 배짱 봐.

중얼중얼 거리며 진짜로 수마에 끌려들어가면서 마지막으로 들은 건 영감이 언제나 그렇듯 혀를 차는 소리였다. 익숙한 소리에 픽픽 웃는다.

 

이놈들이…….”

 

딱 이만큼만 행복했으면 좋겠어.

이만큼의 행복이라도 내 인생에 가득 했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