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Day Night
Written by Rine in Rine's Side
“후아아아…….”
공기 맑은 마을 특유의 초록 냄새가 향긋한 저녁나절, 나는 한껏 기지개를 피고 있었다. 정령 주제에 피로를 푸냐고 묻는다면야…
“음, 습관이니까?”
그래. 이렇게 대답할 거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아까 이사나의 행동을 빌려오자면 저절로 몸이 떨리게 추웠다)에 창문을 활짝 열고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면서도 전혀 ‘춥다’고는 못 느끼고 있으니 정령인 게 맞구나… 새삼 새롭다.
평소라면 혹시라도 이사나가 감기라도 걸릴까 창문 따위 절대 열 리가 없지만 지금 이 방엔 이사나가 없었다. 덧붙이자면 이사나와는 오늘 각방이었다.
“너 거기서 뭐 하냐?”
저, 갈아 마셔야 할 빨강 도마뱀 때문에.
“머리 풀어헤치고 뭐 하는 거냐? 바람 맞아서 지금 네 머리 엄청 물결 쳐.”
하기야 내 머리카락이 물 색이니 이러고 있으면 물결이겠지… 잠깐만!
“라피스!”
이사나의 안전이 제일 중요한 이 때에 이사나가 따로 있어야 하고, 아무데나 처박혀 있어도 되는 저 도마뱀이 혼자 방을 쓰지 않는 이유, 원흉에게 나는 팩 고개를 돌렸다.
“왜?”
자신에게 고개를 돌린 나를 보며 라피스가 거리낄 것 없이 걸어와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도대체가! 넌 나이가 몇 살인데 이사나도 안 하는 떼를 써! 이사나는 인간이야! 혹시라도 무슨 일 일어나면 어쩌려고 그렇게 막무가내야!”
쾅!
자꾸만 돌아선 내 뺨을 때리는 바람이 짜증나 창문을 닫고선 소리쳤다.
그러나 눈앞의 도마뱀이 누구던가.
그 싸늘한 엘뤼엔에게 욕을 먹으면서도 들은 체 만 체 할 정도로 뻔뻔하고 집착 강한 빌어먹을 빨간 도마뱀, 라피스 라즐리였다.
“아무도 공격 같은 거 안 하니까 걱정 마. 그리고 혹시 몰라서 알람마법하고 기본 실드마법까지 걸어뒀잖아, 뭐가 문제야?”
도리어 반문해 오는 그의 얼굴엔 정말 걱정도 팔자다- 하는 듯한 표정이 한껏 드러나 있었다.
사건의 전말이란 이랬다. 클모어를 나와 던전에 가기 위해 어중간한 거리를 이동한 우리는 여관을 들어왔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찾는 여관마다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찾아 들어온 마을의 마지막 여관엔 다행히 방이 남아있었다. 2인실 두 개가.
“어쩌지요? 엘님과 이사나님이 한 방을 쓰시고, 저와…….”
카이 씨가 평소보다는 조금(아주 조금이었다) 굳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막는 구원의 천사(?)가 있었으니.
“아니. 나랑 엘이 한 방을 쓴다.”
“예?”
순간 놀란 카이 씨와 이사나가 동시에 되물었다. 그에 구원의 천사, 아니, 생각 없는 불도마뱀 한 마리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나랑 엘은 잠 잘 필요도 없고, 엘은 매일 이사나와 붙어 있잖아. 설마 잘 때도 엘이 필요하다는 헛소리를 하진 않겠지?”
갑작스런 라피스의 말에 대답할 말을 못 찾고 있는 두 사람과는 달리 나는 이미 그의 말에서 요점을 찾아낸 뒤였다. 그리고 어떤 답을 줄지도.
“긴 말 않고, 라피스 너 지금 매일 내가 이사나랑 있었으니, 오늘은 네가 데리고 있어야겠다는 거지?”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쨌든 라피스가 말하려는 바는 이게 확실했다.
아닐 거라고? 나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하여튼 그렇게 라피스의 만족스런(그에게만) 결정이 멋대로 난 게 아까 전의 일.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너무나 당당하고 뻔뻔한 작태에 한가득 차올랐던 분노게이지가 흐물흐물 주저앉고 있었다.
하긴, 처음부터 ‘내꺼’니 어쩌니 쓸데없는 소리를 하며 엘퀴네스에게 엄청난 집착을 보인 라피스를 생각하자면 지금 이건 혼자 나를 소유하지 못했다는 스트레스의 돌출 현상…….
“이러니저러니 말을 갖다 붙여도 결국엔 네 맘대로 못해서 삐졌다는 거잖아!”
소리를 다시 한 번 꽥 질렀지만 라피스는 듣는 둥 마는 둥 손사래를 쳤다.
“이사나 본인도 정령산데 뭐가 문제야, 그리고 그 꼬마만 계약자냐? 가끔은 내 요구도 들어줘야지.”
“아 그러셔? 알았어, 알았다고.”
나는 원래 말발이 약하다. 특히 자기주장을 저렇게 반박 못하게 하나씩 나열하는 라피스 같은 타입은 결국 뭔가 아닌데, 하는 느낌을 들게 하며 입을 다물게 하는 천적이었다.
딱히 할 말을 못 찾아 궁시렁거리며 발을 쾅쾅 굴러(그다지 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다른 쪽 벽의 내가 쓸 침대로 가서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결국 나는 라피스의 독단적인 저 고집에 맞춰주는 수밖에 없어 보여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라피스의 한심하다는 듯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계집애처럼 궁시렁거리긴. 또 그거 가지고 삐졌어?”
“이… 내가 언제 삐졌다는 거야!”
기가 막혀 그에게 홱 고개를 돌린 나는 순간 당황했다. 평소랑 다르게 가라앉은 라피스의 붉은 눈이 나를 정면으로 보고 있었다. 시선이 얽힌 채 떼지 못하고 넋을 놓고 있을 때, 라피스가 별안간 픽 웃었다.
“엘, 이리 와봐.”
까딱까딱.
라피스가 손짓한다. 마음 같아선 니가 와 도마뱀! 외치고 싶은데 라피스의 분위기가 방금 전과 달리 묘하게 무거워서 어쩐지 그럴 수가 없다.
“자, 왔지?”
어쩐지 지는 듯한 기분에 씩씩거리며 라피스의 앞으로 갔다. 침대에 앉아있는 터라 라피스가 나보다 작다. 항상 올려다봐야 했던 녀석이 밑에 있어 내려다보는 게 재밌어 나는 속으로 괜히 킥킥 웃었다.
잠시 조용하던 라피스가 갑자기 허리를 확 끌어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괜히 웃고 있었다.
“!”
얘가 갑자기 왜 이래?
평소랑 다르게 구는 라피스가 의아해 나는 일단 작게 물었다.
“저기… 라피스? 갑자기 왜 그래?”
어린애가 엄마를 찾듯 꼭 안은 라피스의 팔을 풀어내려고 나는 라피스의 손을 떼어내려 애썼다. 그러나 라피스는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오히려 더욱 끌어안았다.
“라피스! 왜 그러냐니까?”
평소의 날 놀려먹는 거나, 나와 이사나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지적해주는 그런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굴고 있었다, 지금 라피스는.
그런 그가 당황스러워 나는 팔을 풀어내지도 못하고 답을 듣지도 못하고 잠시 눈만 굴리고 있었다.
그 사이 라피스는 내 허리에 원수라도 졌는지 꽉 끌어안고 나한테 머리를 기댄 채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조용했냐면, 내가 내 심장소리에 놀랄 만큼.
한 시간은 된 것처럼 느껴지는 잠시가 지나고 내가 라피스의 어깨를 밀었을 때, 그는 팔에서 힘을 빼고 밀려났다. 고개를 올린 그의 눈동자는 무거움은 찾아볼 수 없이, 평소의 짓궂음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라피…”
“너 정말 남성체 맞아? 빽빽거리는 거나 삐지는 거나 영락없는 소녀지심이구만. 허리하고는, 내가 한 팔로도 안겠다. 너 여성체 아니냐?”
이 빌어먹을 비만구렁이가 뭐라는 거야!
뭐가 어쩌고 저째?
“내가 허리 가는데 뭐 보태준거 있어? 왜 또 시비야, 라피스!”
딴전을 피우는 저 작태를 보라!
저것이 바로 길가다 벼락 맞을 짓이렸다!
“아 진짜 또 쨍알쨍알 거리네.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마냥 말라서는 남성체라고…”
“라피스 라즐리! 남성체라고 몇 번이나 말해! 너 진짜 지금 시비 거는 거지!?”
열 받아서 되는 대로 소리쳤더니 머리가 띵하니 울려오는 것만 같다.
“알았어, 알았어. 너 남성체야. 됐지?”
저저저 말하는 것 하고는, 마치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저 태도에 기가 막혀 나는 허, 큰 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골치가 아파오는 게 정령도 두통을 앓을 수 있나봐, 싶다.
더 이상 말해봐야 나만 어이없어질 것 같은 기분에 난 그냥 돌아서서 내 침대로 기어들어왔다. 이사나랑도 따로고 이런 도마뱀에게 시달리느니 일찍 자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여간 너 때문에 미쳐, 라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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