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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長篇]/Dear my Darling

[DMD] 제 6장 [라피스x엘] 어느 날, 어느 밤 下

 

 

 

인간에서 정령이 된 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나는 몸이 잠을 잘 필요가 없게 되었는데도 항상 해가 지고 나면 잠을 자는 게 습관화 되어 있었다.

라피스의 이상행동에 뒤이은 헛소리로 나는 급격한 피로감을 느끼고 침대에 누운 뒤 바로 잠들었다.

 

몽롱한 정신이 잠시 고개를 든다. 뭔가가 몸에 닿는 느낌에 몸을 뒤척이자 나를 귀찮게 하던 것이 떨어져나간 듯 촉감이 멀어졌다.

 

정말이지

 

누군가가 부르는 듯한 소리에 나도 모르게 배시시 미소가 그려진다. ‘’. 잠결에도 마음 한 켠이 따듯해지는 느낌.

 

곧 확실치 않은 정신으로 누군가가 한숨을 쉬는 소리와 부드러운 온기가 손을 잡아오 는걸 느꼈다. 작게 웃으며 그걸 꽉 잡는다. 누굴까, 날 이렇게 따듯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

 

눈을 뜨기엔 짓누르는 잠이 너무 무겁다.

 

엘뤼엔

 

, 여기서이름하여간

 

? 한숨을 푹푹 내쉬며 중얼거리는 게 엘뤼엔이 아닌가 보다. 아무렴 어때, 그렇게 몰려오는 수마에 정신을 내주며 나는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인다. 어딘가 낯이 익은데 모르겠다. 마치, 옛기억 속 스쳐지나갔던 사람들처럼 어딘가 아련하다. 어색한 얼굴들이 지나쳐가고, 자꾸만 어지러운 기분이 든다. 속이 답답해지는 느낌.

 

머리가 지끈거리고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무언가가 머릿속을 꽉 채울 것처럼. 무섭다. 무서워져서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뒷걸음질 친다. 그렇게 도망가다가, 나는 까마득히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눈을 확 떴다.

 

…….”

 

뭐지, 마치 술 먹고 쓰러진 다음날이라도(실제로 그래본 적은 없지만) 되는 것처럼 울렁거리는 속과 지끈거리는 이 머리는.

게다가 라피스와 마주 잡은 손은 계속 이렇게 잤는지 약간 뻐근한 듯한…….

 

?

 

나는 시선을 내려 손을 보았다. 나보다 큰 남자의 손, 즉 라피스를 꼭 잡고 있는 내 손을. 그리고 한 침대에 뒤섞여 있는 긴 물색의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긴 적발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머리 위에서 고르게 숨 쉬며 자고 있는 라피스를 확인한 순간.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침대에서 벗어났다. 어제 바람을 맞았던 창으로 이제 막 동이 트는 하늘이 보였다.

 

혹시나 싶어 빠르게 쳐다본 라피스의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어제 내가 잠든, 방금 전까지 누워 있던 침대에는 새빨간 머리의 드래곤 한 마리가…….

 

라피스!”

 

그래. 한 번의 외침으로 네가 깨지 않을 걸 안다.

나는 후웁, 하고 숨을 들이켰다.

 

라피스 라즐리!!!”

 

 

 

 

지져버릴 도마뱀이 일어나려 눈을 끔벅이고, 나는 소리친다.

 

너 왜 여기 있어! 아니, 이 작은 침대에 끼여 든 이유가 뭐야! 이렇게 좁은 데서 잘 수는 있었어?”

 

요점은 이거다. 이 좁아터진 침대에서 불편하게 자는 걸 감수하고도 여기서 멋대로 잔 이유가 뭐냐!

 

만약 또 무슨 내꺼니까 이런 헛소리하기만 하면 내 오늘 저 변태도마뱀과 계약을 파기하겠노라 이를 갈고 있는데, 고개를 휙휙 저어 정신을 차린 라피스가 툭 대꾸했다.

 

좋아서.”

 

거 봐! 오늘은 내가 너랑 계약 파?”

 

너무 흥분해서 잘못 들었군.

나는 간단하게 정의하며 그에게 다시 말해보라고 고갯짓을 했다.

 

좋아서 그랬다고.”

 

라피스는 픽 웃으며 다시 말해 주었다.

 

중요한건, 다시 말해주었는데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멍한 나를 보며 라피스는 능글맞은 미소를 한껏 지어보였다.

 

너 어제 잘 때 엘뤼엔 찾더라? 애도 아니고 무슨 아빠 찾는 딸…….”

 

내가 언제 그랬어!”

 

, , 이건 뜬금없이 무슨 말인가!

 

나는 잠을 조용히 자는 편이다. 잠버릇도 기껏해야 뒤척이는 정도고 잠꼬대도 거의 없다. 그런데 하물며, 내가 자다가 엘뤼엔을 찾을 리가!

 

어제 그랬다니까? 헤실헤실 웃으면서. 좀 있으면 아빠할 것 같…….”

 

안 그랬어! 사기 치지 마, 라피스!”

 

어쩐지, 얼굴이 화끈 거리는 게 아마 지금 내 얼굴은 한껏 달아올라 있을 터였다.

 

난 그딴 기억 없어!”

 

잠결에 한 말을 기억하는 사람이 어딨냐?”

 

안 그래? 하고 당당하게 물어오는 라피스를 나는 외면했다. 그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반, 진실일 가능성이 반인데 더 말을 섞어 봤자였다. 막말로, 나도 내가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모르겠단 말이다!

 

똑똑

 

엘님? 라피스님? 그만 내려오…….”

 

카이 씨, 빨리 일어나셨네요? 간밤에 잘 주무셨어요? 이사나는 내려가 있나요?”

 

질문을 쏟아내며 등을 미는 나를 카이 씨가 의아하게 봤지만, 나는 어설프게 웃을 뿐이었다. 일단은 이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는 게 우선이니까.

큭큭 웃어대는 라피스를 애써 외면해 등을 돌려 나는 후다닥 카이 씨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라피스와 말싸움을 해봤자 결국 나는 파파보이의 누명을 쓰게 될 것이 뻔했다.

 

 

 

 

반색을 하며 신관을 데리고 얼른 나가는 엘을 보며 라피스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엘이 문을 닫아버렸을 때 그는 결국 크게 웃었다. 어쩜 이리 귀여운 짓만 하는지.

 

진짜 단순하다, .”

 

결국 흐지부지 사라진 말을 그는 읊조렸다.

 

좋아서 그랬다니까.”

 

그 한 마디를 가슴에 묻고, 라피스는 엘을 따라 아래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창으로 한가득 아침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 6 어느 날, 어느 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