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서 정령이 된 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나는 몸이 잠을 잘 필요가 없게 되었는데도 항상 해가 지고 나면 잠을 자는 게 습관화 되어 있었다.
라피스의 이상행동에 뒤이은 헛소리로 나는 급격한 피로감을 느끼고 침대에 누운 뒤 바로 잠들었다.
몽롱한 정신이 잠시 고개를 든다. 뭔가가 몸에 닿는 느낌에 몸을 뒤척이자 나를 귀찮게 하던 것이 떨어져나간 듯 촉감이 멀어졌다.
“정말이지… 엘…”
누군가가 부르는 듯한 소리에 나도 모르게 배시시 미소가 그려진다. ‘엘’. 잠결에도 마음 한 켠이 따듯해지는 느낌.
곧 확실치 않은 정신으로 누군가가 한숨을 쉬는 소리와 부드러운 온기가 손을 잡아오 는걸 느꼈다. 작게 웃으며 그걸 꽉 잡는다. 누굴까, 날 이렇게 따듯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
눈을 뜨기엔 짓누르는 잠이 너무 무겁다.
“엘뤼엔…”
“하, 여기서… 그 … 이름… 하여간…”
응? 한숨을 푹푹 내쉬며 중얼거리는 게 엘뤼엔이 아닌가 보다. 아무렴 어때, 그렇게 몰려오는 수마에 정신을 내주며 나는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
모르는 사람들이 보인다. 어딘가 낯이 익은데 모르겠다. 마치, 옛기억 속 스쳐지나갔던 사람들처럼 어딘가 아련하다. 어색한 얼굴들이 지나쳐가고, 자꾸만 어지러운 기분이 든다. 속이 답답해지는 느낌.
머리가 지끈거리고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무언가가 머릿속을 꽉 채울 것처럼. 무섭다. 무서워져서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뒷걸음질 친다. 그렇게 도망가다가, 나는 까마득히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눈을 확 떴다.
“윽…….”
뭐지, 마치 술 먹고 쓰러진 다음날이라도(실제로 그래본 적은 없지만) 되는 것처럼 울렁거리는 속과 지끈거리는 이 머리는.
게다가 라피스와 마주 잡은 손은 계속 이렇게 잤는지 약간 뻐근한 듯한…….
응?
나는 시선을 내려 손을 보았다. 나보다 큰 남자의 손, 즉 라피스를 꼭 잡고 있는 내 손을. 그리고 한 침대에 뒤섞여 있는 긴 물색의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긴 적발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머리 위에서 고르게 숨 쉬며 자고 있는 라피스를 확인한 순간.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침대에서 벗어났다. 어제 바람을 맞았던 창으로 이제 막 동이 트는 하늘이 보였다.
혹시나 싶어 빠르게 쳐다본 라피스의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어제 내가 잠든, 방금 전까지 누워 있던 침대에는 새빨간 머리의 드래곤 한 마리가…….
“라피스!”
그래. 한 번의 외침으로 네가 깨지 않을 걸 안다.
나는 후웁, 하고 숨을 들이켰다.
“라피스 라즐리!!!”
⁂
지져버릴 도마뱀이 일어나려 눈을 끔벅이고, 나는 소리친다.
“너 왜 여기 있어! 아니, 이 작은 침대에 끼여 든 이유가 뭐야! 이렇게 좁은 데서 잘 수는 있었어?”
요점은 이거다. 이 좁아터진 침대에서 불편하게 자는 걸 감수하고도 여기서 멋대로 잔 이유가 뭐냐!
만약 또 무슨 내꺼니까 이런 헛소리하기만 하면 내 오늘 저 변태도마뱀과 계약을 파기하겠노라 이를 갈고 있는데, 고개를 휙휙 저어 정신을 차린 라피스가 툭 대꾸했다.
“좋아서.”
“거 봐! 오늘은 내가 너랑 계약 파… 뭐?”
너무 흥분해서 잘못 들었군.
나는 간단하게 정의하며 그에게 다시 말해보라고 고갯짓을 했다.
“좋아서 그랬다고.”
라피스는 픽 웃으며 다시 말해 주었다.
중요한건, 다시 말해주었는데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멍한 나를 보며 라피스는 능글맞은 미소를 한껏 지어보였다.
“너 어제 잘 때 엘뤼엔 찾더라? 애도 아니고 무슨 아빠 찾는 딸…….”
“내가 언제 그랬어!”
무, 뭐, 이건 뜬금없이 무슨 말인가!
나는 잠을 조용히 자는 편이다. 잠버릇도 기껏해야 뒤척이는 정도고 잠꼬대도 거의 없다. 그런데 하물며, 내가 자다가 엘뤼엔을 찾을 리가!
“어제 그랬다니까? 헤실헤실 웃으면서. 좀 있으면 ‘아빠’ 할 것 같…….”
“안 그랬어! 사기 치지 마, 라피스!”
어쩐지, 얼굴이 화끈 거리는 게 아마 지금 내 얼굴은 한껏 달아올라 있을 터였다.
“난 그딴 기억 없어!”
“잠결에 한 말을 기억하는 사람이 어딨냐?”
안 그래? 하고 당당하게 물어오는 라피스를 나는 외면했다. 그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반, 진실일 가능성이 반인데 더 말을 섞어 봤자였다. 막말로, 나도 내가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모르겠단 말이다!
똑똑
“엘님? 라피스님? 그만 내려오…….”
“카이 씨, 빨리 일어나셨네요? 간밤에 잘 주무셨어요? 이사나는 내려가 있나요?”
질문을 쏟아내며 등을 미는 나를 카이 씨가 의아하게 봤지만, 나는 어설프게 웃을 뿐이었다. 일단은 이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는 게 우선이니까.
큭큭 웃어대는 라피스를 애써 외면해 등을 돌려 나는 후다닥 카이 씨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라피스와 말싸움을 해봤자 결국 나는 파파보이의 누명을 쓰게 될 것이 뻔했다.
⁂
반색을 하며 신관을 데리고 얼른 나가는 엘을 보며 라피스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엘이 문을 닫아버렸을 때 그는 결국 크게 웃었다. 어쩜 이리 귀여운 짓만 하는지.
“아… 진짜 단순하다, 엘.”
결국 흐지부지 사라진 말을 그는 읊조렸다.
“좋아서 그랬다니까.”
그 한 마디를 가슴에 묻고, 라피스는 엘을 따라 아래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창으로 한가득 아침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 6 어느 날, 어느 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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