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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長篇]/Dear my Darling

[DMD] 제 5장 [태진x지훈] 검은 별 下

 

 

 

“아, 탄산 사오라니까.”

 

“싫다. 주는 대로 먹어.”

 

사주는 사람은 나야. 녀석이 웃었다.
과일주스 따위 하나도 안 반가운데. 엄밀히 말해 네가 진 건데 왜 내가 양보해야 하는 거야?

태진은 쏘아붙이는 것을 포기하고 캔을 땄다. 탄산 아니니 넘치지도 않겠지.
그렇게 생각했기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나저나 지훈이가 없어서 그런가.”

 

녀석이 옆자리에 앉아서 다리를 건들거리며 말했다. 갑작스런 거론에 태진은 응? 그를 쳐다봤다.

 

“너 되게 외로워 보인다 야.”

 

…외로워 보여?

이놈이 이렇게 감성적인 녀석이었나? 태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친구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말하지 않아도 짐작되는 눈총에 친구가 삐딱하게 외쳤다.

 

“면상 치워! 그냥 그렇다는 거지! 맨날 붙어 있는 놈들이니까!”

 

걱정마셔, 너랑은 돈을 줘도 안 붙어 있을 거니까.
태진은 코웃음 쳤다.

 

“음. 지훈이 녀석 싸고도는 거야 나도 마찬가지지만 넘버원은 너지, 암만 그래도.”

 

혼자 주억거리기 시작하는 게, 태진은 또다시 그를 쳐다봤다.

설마 저 놈 저거, 술 사와서 먹고 있는 거 아냐?


지금 마시고 있는 게 음료수의 탈을 쓴 술 아냐?
어쩐지 증폭되는 의심에 태진은 물었다.

 

“술 먹었냐?”

 

“내가 너냐!”

 

아 자식. 발칵발칵 성내는 거며 갑자기 독백하는 거며 어째 꼭 그건데. 술주정.

지훈만큼 붙어 다니진 않지만 야자 째고 놀러가잔 말에 금방 따라붙은 의리 있는 놈이다.

중학교 동창에 고등학교 와서도 괜찮게 지내는 녀석.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제법 발도 넓은, 한 마디로 오지랖 넓은 타입.

 

“그냥 네가 갑자기 놀자 그러니까 놀랐다. 지훈인 어디 팔아먹었나 싶고. 근데 조퇴 했다며? 어디 아프대?”

 

말하던 중에 녀석의 얼굴이 구겨진다.

 

“설마 또 맞아서 아픈 건 아니겠지?”

 

“나도 몰라. 그래서 가보려고.”

 

이건 뭐, 문명의 이기도 없어, 가족은 진흙탕이야. 뭔 21c 라푼젤이야? 찾아가야 얼굴이나 보여주는 귀한 몸이야?

정작 찾아가려 마음먹은 태진은 잠잠한데 옆의 친구가 더 말이 많다.

나도 말이 적은 게 아닌데 얘랑 있으면 급격히 무뚝뚝한 사람이 된다니까.
지훈이 녀석하고 있으면 나도 그 놈 따라서 덩달아 시끄러운데.

 

“말 없는 건 안 고치냐. 또 이제 지훈이 봐야 종알종알 떠들지.”

 

“그야 할 말이 없으니까 그렇지. 지금 몇 시야?”

 

심드렁하게 태진이 물었다. 너는 손이없냐 눈이 없냐 이 새끼야. 그러면서도 순순히 시계 찾아 보는 게.

야 임마 너 그러다 사기 뜯길 타입이야, 딱 너 같은 놈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태진은 오락실 내부를 휘 둘러봤다.

 

그러고 보니 지훈이 녀석은 둔탱이라 게임도 드럽게 못 하는데.

마음 속에 꾹꾹 눌러 놓은 걱정이 이젠 뭘 보고 뭘 들어도 그 녀석만 연상이 된다.

빨리 가서 물어봐야지 신경 쓰여서 안 되겠어, 진짜.

 

 

 


건물 앞에서 헤어져 태진은 주택가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현재 시각 여덟시.

 

별로 놀지도 못 했건만 해는 왜 이렇게 빨리 지는지, 가로등 빛만 어슴푸레한 주택가 골목길은 남자임에도 꺼림칙한 장소다.

단순히 골목길에 오래 있고 싶지 않은 마음인지, 아니면 지금 가고 있는 곳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인지, 태진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빨랐다.

어차피 가다보면 집 나오고 집 나오면 창문 좀 올라타서 부르면 되는데.

 

저도 모르게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누가 따라오는 것처럼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첫날 지각할 뻔 했을 당시처럼 심장박동도 거세진다.

잰걸음으로 익숙한 길을 걸어 들어간 태진은 주변을 한 번 살피고 제 키보다 조금 낮은 담장 위에 올라탔다.

바로 정면에 있는 2층 창문이 녀석의 방. 빛은 환한데 창문으로 사람의 인영이 비추질 않는다.

 

으음.

잠시 고민하던 태진은 바닥으로 내려와 돌이라 말하기도 민망한 것들을 주워 다시 올라탔다.

그리고 한 대여섯 개를 창문에 투척했을까.

 

 

드르륵

 

 

“너일 줄 알았어.”

 

문을 열고 환하게 웃는 지훈의 모습이보이고, 그는 한 번 더 던지려던 손을 멈췄다.

 

“어디 아프냐, 이 잡놈아.”

 

“잡놈? 넌 환자한테 그딴 말이 나오냐!”

 

금세 버럭버럭. 그래도 늦은 시각인 것을 살피는지 그리 크지는 않다.
감정표현 하나는 정직한 지훈의 반응에 여태 숨차게 뛰던 심장이 점차 평온을 되찾았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

 

태진이 물었다. 한 손엔 아직 던지지 않고 남아있던 조그마한 돌 파편을 위아래로 던졌다 받았다를 반복한다.


“엄. 배탈?”

 

지훈이 단순하게 대꾸했다.
태진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진짜? 진짜로? 아니면 이거 던진다?”

 

“진짜야! 아니 그전에, 아닌지 맞는지 어떻게 알고 던질 건데?”

 

지훈이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외친다.

 


배탈?

 


……그런가.

 

 

큰 병이 아니란 것에 태진은 여유로운 표정을 보였다.

 

“몰라, 일단 던지고 보는 거지.”

 

 

“그럴 줄 알고 피했다!”

 

지훈이 어때? 하는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었다. 쳇. 피하다니.

행동이 읽힌 것에 태진은 혀를 찼다.
그러나 다시 능글맞은 미소를 걸치며 페이스를 되찾는다.

 

“내 생각 많이 했냐? 막 집에 오니까 나 떠오르고 그러지? 아~ 이럴 때 태진이 같이 훌륭한 형님이 있어야 아파도 마음이 편한데~ 하고.”

 

오늘도 헛소리야!


지훈이 뭐 던져줄 것 없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진은 싱글싱글 웃는다.

 

“학교 가면서 내 생각하고, 아플 때도 생각하고. 크, 또 자기 전에 내 생각하고.”

 

으악 소름 돋아
지훈이 과장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넌 벌써 나한테 50퍼센트 넘어왔다니까? 그래 안 그래?”

 

“뭘 어쨌다고 50퍼센트 넘어왔다고 수치까지 대는 거야?”

 

지훈이 으으으 질린 듯 물었다.
태진은 경쾌하게 말했다.

 

“이렇게 마주 보고 말하는 게 49퍼센트야. 그것도 모르냐? 연애 경험 제로야.”

 

연애 경험 제로인 건 맞지만, 반박 안하고 있다간 저 녀석 페이스에 말려들어!

 

지훈은 외쳤다.

 

“그렇게 따지면 너랑 내 사이랑 남들 사이랑 다 비슷하게 50 퍼센트인데 왜 내가 넘어갔다고 말하는 건데?”

 

오 제법 찌르고 들어오는데?

그렇게 말하며 태진이 술술 이어 말했다.

 

“여기서 1퍼센트가 중요한 거야. 51퍼센트가 되는 순간, 넌 이미 홀딱 넘어온 거거든.”

 

한 텀 쉬고는 다시 설명한다.

 

“마주 보고 말하는 순간 사람사이는 49퍼센트에서 출발하지. 너랑 난 벌써 50퍼센트야. 이 1퍼센트가 힘들고 중요해. 일 년 걸릴지도.”

 

태진이 짐짓 으음- 하며 턱을 쓰다듬으며 폼을 잡는 시늉을 한다.

 

“51퍼센트가 되는 순간 업어오는 거지.”

 

훗.


태진이 웃는 것에 지훈이 그딴 게 어딨어! 소리쳤다.


“어딨긴, 다 있어. 이게 다 널 향한 이 형님의 애정이란다.”

 

말꼬리를 흥얼흥얼 늘이며 태진이 말했다. 저 헛소리를 어디서부터 반박해야 할지, 아니, 말해도 듣긴 할까?

저 궤변의 달인이? 지훈은 뭔가 아닌 것 같은데 할 말이 없어 그치만, 그치만, 계속 말을 흐렸다.

그 틈을 타 태진이 말했다.

 

“그러니까 1퍼센트 확실히 올리게 몸 건강히 있으라고. 딱 1년 뒤면 넘어오게 할 테니까.”

 

무슨 자신감에 무슨 장난기가 발동한 건지. 태진은 웃었다.

지훈은 할 말이 없어서 이익, 이건 아닌데, 만 거듭하고.

그렇게 말하는 태진은 즐거워 보였고, 분한 듯 보이는 지훈의 표정은 약간은 상기되어 있었다.

무조건적인 애정.


자신에게 주어지는 걱정과 애정에 약한 모습 그대로다.

태진은 아주 살짝, 표정을 흐렸다.

뭐. 괜찮아.

 

“괜히 배탈 같은 거 나지 말고 꼬박꼬박 학교 나오라고. 칼 등교해서 늦게까지 나랑 놀아야 할 것 아냐.”

 

“하루 종일 헛소리 들으라고?”

 

“애정이지, 애정.”

 

지훈의 말에 유연하게 단어를 바꿔치기한다.

애정이지, 애정.
음. 이건 친구에 대한 걱정과 애정.

 

태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까 이 형이랑 애들 걱정시키지 말고 학교 잘 나와라. 학교에서나 겨우 보잖냐.”

 

결론은 결국 걱정해서 온 것임을 여실히 드러내는 태진의 말에 지훈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말했다.

 

“안 그래도 그럴 거거든. 내일 가자마자 한 대 칠거니까 각오해라.”

 

“어허? 과연 내가 순순히 당할까.”


너한테?

태진이 어깨를 의도적으로 으쓱 해보였다.

악 마음에 안 들어!

지훈이 1초 만에 감동에서 평상시로 복귀했다.

지훈이 평소와 같은 태도에 안도하며, 태진은 담에서 내려섰다.

 

“나 간다. 내일 일찍 와라~”

 

짓궂게 윙크를 하는 모습에 지훈이 내가 왜! 외치곤 창문을 닫아버렸다.

재깍재깍 반응하면서 서툰 녀석.

태진은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번엔 심장이 날뛰지 않았다.
쫓기는 듯한 기분도 들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의 남들이 보면 우스꽝스러워 보일 대화를 회상하며 큭큭 대는 그의 가로등빛 그림자는, 어쩔 줄 모르는 유쾌함이 충만해 있었다.

 


# 5 검은 별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