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웰은 지혜로운 친구다. 이번에도 그의 조언이 맞아 떨어졌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정신을 이탈하게 만드는 이유라 엘은 사실이 아니길 혼자 바랄 뿐.
“아스모델…….”
엘은 아스에게 스륵 고개를 올렸다. 자신이 말해놓고 놀란 아스가 뒤로 물러난다.
그래. 원인이 있긴 있군.
“네가 지금 뭐라고 한 건지 알아!!!”
이판사판. 자신의 말에서 현실도피 하려는 듯 큰 소리를 내는 엘의 모습에 아스는 같이 소리쳤다.
“왜 못 알아들은 척 해? 엘 좋아한다고. 가족으로 보는 게 아니라 애인으로 본다고!”
“그러니까 그게 말이 되냐고!”
“어디가 어떻게 말이 안 되는데!”
아스는 엘을 벽 쪽으로 밀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자신의 앞에서 음영을 드리우고 있는 아스를 엘은 툭 밀쳤다.
전에, 갑자기 성장해 커져버린 아스가 참 낯설었었다. 그리고 모습은 변한 게 없지만 어딘가 변해서 앞에 서 있는 아스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나중에… 나 지금 너무 혼란스럽다. 너랑 나랑 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으니까…….”
무시해 버리려 하는 엘의 태도에 아스는 절대 못 보낸다는 듯 그를 막았다.
“비켜, 나 갈 거야.”
“왜 말이 안 되는데?”
대답할 때까지 계속 물어볼 것처럼 구는 아스에게 엘이 짜증을 냈다.
“아스모델!!!”
날카롭게 소리치는 엘에, 아스는 결국 말을 삼키며 옆으로 비켜섰다.
딱히 뭐라 표현 할 수 없이 흔들리는 엘의 눈의 잔상만이 남은 채로 아스는 방에 혼자 남겨졌다.
어쩌다가, 답답한 마음에 외쳐버린 것이긴 하지만 내뱉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그 어지러운 감정이 이거였다.
명쾌하게 나온 답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다시 짐이 올려 진 듯 머릿속이 무거웠다.
뭐, 지금쯤 머릿속이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 있을 엘에 비한다면야 별 거 아니겠지만.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벽에 몸을 기댔다. 엘이 원하던 대로 허심탄회하게 솔직히 얘기했다.
어떻게 될지는 이제 아스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아스는 붉은 눈을 감았다.
어떡하지, 엘? 나 진짜 좋아하는 것 같아.
⁂
하얗게 질린 얼굴로 복도를 걸어가던 엘은 문득 눈앞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느끼곤 고개를 들었다.
놀란 표정의 남자가 서 있었다. 엘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군청색 머리칼의 사내가 얼른 따라 시선을 맞추는 게 느껴졌다.
“괜찮습니까, 엘님?”
라온 황태자는 병석에 있던 사람처럼 창백한 안색으로 걸어오던 엘이 갑자기 주저 앉자 걱정 가득한 태도로 물었다.
평소 이사나와 그 일행들 사이에서 분위기를 주도하고 서로를 다독여주는 일견 어른스러운 모습은 전혀 없이 무언가에 놀란 어린아이처럼 넋을 놓고 있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엘님?”
“…아… 라온 씨… 저 지금 힘이 빠져서… 아니 이게 아니고… 저랑 잠깐 얘기 좀 하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황제 폐하나 알리사 양도 부를 까요?”
“황제…? 아… 아니, 그냥 라온 씨한테 털어놓고 싶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어딘가 마음이 편치 않아 보이는 엘을 걱정스럽게 보며 라온휘젠은 어느새 도착한 정원의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시종이 차를 주고 물러나기까지 엘은 말이 없었다.
조용한 정적 가운데 엘이 입을 열었다.
“저기, 라온 씨, 알리사 많이 좋아해요?”
화륵.
엘의 질문에 라온은 순간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흠흠… 아시잖습니까. 알리사노 양은 정말 사랑스러운 아가씨입니다.”
헛기침을 하며 대답하는 라온의 모습에 엘은 기운 없는 미소를 지었다.
“엘님 정말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 영 힘이 없으십니다.”
그런 엘을 보며 라온 황태자는 걱정 되는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누구를 좋아하면요… 기분이 어때요?”
그런 황태자에게 엘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며 다른 질문을 던졌다.
라온은 의아해하면서도 제법 심각하게 생각했다. 골똘히 고민하던 라온은 곧 말을 꺼냈다.
“무슨 말을 원하시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냥 뭐라고 해야 하나… 그 사람이 참 소중합니다. 그 사람이 웃으면 덩달아 좋고, 그래서 행복하게 해주고 싶고… 기분이야 뭐, 바라보아 좋은 것이지요.”
라온의 말에 엘은 혼자 생각에 빠졌다. 그런 엘을 부르지 않고 라온은 차를 마시며 가만히 지켜보았다.
사색에 빠진 엘이 심각해 보였다.
“그러면요…….”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엘이 운을 떼었다.
예? 라온휘젤은 의아해 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예를 들어… 이사나가 저를 좋아하는 거랑, 이사나가 알리사를 좋아하는 거랑 뭐가 다른 거죠?”
“……흠.”
또다시 침묵. 엘도 라온도 제각각 생각에 빠진 가운데 가벼운 바람만이 스쳐 지나갔다.
식은 찻잔을 손에 쥐며 라온은 일단 대답을 했다.
“상대에게 질투 할 수 있는 권리라거나, 더 소중하게 여기는…….”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랑 크게 다르지 않네요.”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아닙니다만. 황태자는 답하기 어렵다며 웃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사나 황제가 엘님을 좋아하는 것은 건전하고, 알리사 양을 좋아하는 것은 불건전한 마음이라고 분류할 수 있겠군요.”
라온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마주 웃은 엘은 그러나 혼란스런 속내였다.
그게… 그 차이인 듯 하다. 아스가 착각하고 있을 그 두 감정의 차이가.
어리게만 보이던 아스가 저렇게 화도 내고, 자기주장도 하고(원래 고집이 세기도 했지만)… 언제 이렇게 성숙해 졌는지….
전에 만약 아스가 좋아하는 이가 생긴다면 음… 어색하려나… 그렇게 혼자 생각해 본 적도 있었는데, 그렇게 아스가 커버려서 떠나면… 많이 서운할 것 같은데… 했었는데.
현재 상황으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하하… 하… 후우.
그게 문제가 아니니… 솔직히 그때도 아마 먼 훗날이 될 거라 생각하고 웃으며 금방 잊어 버렸는데 이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일일까.
한숨을 쉬는 건지 웃는 건지 영 불안한 엘의 모습에 라온은 물었다.
“그런데 엘님, 정말 무슨 일 있으십니까?”
“네? 아… 이거 비밀인데…….”
그리고 엘이 힐끗. 라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제께도 함구하겠습니다.”
“오늘… 사실은 고백을 받았는 데요…….”
아들 녀석한테요.
“예?!”
엘은 멋쩍게 웃었다. 라온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라온의 얼굴엔 놀람을 넘어선 경악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그렇게 놀랄 일인가… 아 하긴 나도 놀랐지.
“대체 누가… 이건 당장 황제 폐하께 말해야 합니다! 세상에…….”
‘어떤 간 큰 인간이’ 그가 흐린 뒷말을 다 들은 엘은 어설피 웃었다.
‘인간이 아니라 마왕인데요.’
직구로 말해줄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뿐. 엘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말 안 하겠다고 했잖아요. 어쨌든, 그 사람이 내가 좋대요. 근데 난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에, 그런 사람이라……. 게다가 아직 어린애라 혹시 감정을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후우. 엘은 땅이 꺼질듯 한숨을 쉬었다. 라온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를 모르니 뭐라고 할 수 없지만… 한 번 만나보시는 것도 괜찮습니다. 설마 엘님이 정령인 걸 알면서 청혼이라도 하진 않겠죠.”
그러면서 엘을 한 번 보곤 ‘엘님이 결혼하신다면 하객들이 신랑을 패겠군요, 암, 엘님은 만인의 마돈나니까요.’ 고개를 절레절레.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엘이 부루퉁한 표정을 짓자 라온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요, 그냥 혼잣말입니다. 그럼 엘님이 걱정하시는 건 그 사람이 어려서입니까,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까.”
라온은 여전히 이 중대한 사건을 이사나 이하 엘 친위대에 보고해야 하나 고민했다. 맞은편에서 엘도 고민했다.
“아… 좋아해요, 근데 난 우리가 서로를 그냥 좋아하는 걸 사랑으로 착각하는 것 같아서…….”
흐으음. 라온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곤 해결책을 진단했다.
“좀 더 커서 오라고 하면 되겠군요.”
⁂
모 아니면 도. 아스는 눈앞에서 차분하게 웃고 있는 엘의 답을 기다렸다. 엄청나게 충격 먹은 얼굴로 사라진 엘이 오늘 정령계에서 나오자마자 찾은 건 아스였다.
그의 팔을 잡고 끌고 온 곳은 황궁 안에서도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건물의 구석.
“네가 나한테 한 말 기억하지?”
끄덕끄덕.
“나도 진지하게 생각해 봤어.”
아스가 얌전히 붉은 눈을 내렸다.
정말 많이 생각해 봤다는 듯 엘이 한숨을 덧붙인다. 아스는 초조함에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아스 역시 엘이 없는 동안 여러 가지로 머리를 굴렸다. 얼결에 소리 친 말이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게 정답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세상은 아니니. 당장 엘이 문제고 엘의 답에 신세가 달라질 자신이 문제였다.
가정 1. 엘이 받아준다, 그 뒤로 해피엔딩, 가능성 100 아니면 0.
가정 2. 그런 거 아니라고 자신을 설득하려 한다, 가능성 80 이상.
가정 3. 피한다, 가타부타 답 없음, 최악의 경우 절연, 가능성 45 이상.
후우우… 일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종이에 뭔가를 끄적거리며 연신 한숨을 쉬는 자신을 데르온이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을 느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애가 아니라고 소리 쳤지만 누가 뭐래도 아스모델 마왕님은 엘의 연하가 분명함에, 사랑도 처음, 게다가 첫사랑 상대는 엘.
“아스 너는 내가 좋다고 했지만…….”
…했지만? 아스는 과거 회상에서 퍼뜩 깨어났다.
“난 아스를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고, 아직 그렇게 보기엔 어색해.”
어디까지나 아이로만 보인다는 엘의 말에 아스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게다가 아직 넌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감정에 혼동도 있을 거야.”
점점 부정적으로 가는 엘의 말에 아스는 대꾸했다.
“엘이랑 나랑 몇 살 차이 안 나. 그리고 아무리 내가 어리다고 해도 그런 정리 못 한 감정으로 엘한테 고백하진 않아.”
고집스런 말에 엘은 으음…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엘의 답은 뭔데? 아스는 곤란하다는 듯이 눈을 굴리는 엘을 빤히 응시했다.
안 듣는 게 나을지도 모를 뻔한 상황에 예상되는 대답이지만 아스는 그래도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자신의 그런 모습을 문득 깨닫고 자조했다.
“어… 그러니까 난, 아스를 그렇게 보려고 노력할 게. 아이 말고… 앞으로는…….”
어?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아 아스는 눈을 깜박이며 다시 엘의 말을 곱씹었다. 그 사이 정적에 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엘 그…….”
“아스가 어린애로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안 보려고 노력 할 게, 그러니까 내 말은… 당장은 무리지만 나 별로 거부감 안 드니까…….”
우왓! 아스가 엘에게 덥썩 안겨 들었다. 가정 했던 상황 중에 없는 것이지만 이런 희망적인 돌발 상황은 환영이다.
게다가 엘이 적극적으로 나서주는 상황이라니. 불안과 초조함으로 빠르게 뛰던 가슴이 제대로 돌아왔다.
늘상 하던 것보다 과격하게 껴안는 아스의 어깨를 엘이 두드렸다.
“아스 진정해!”
응 나 진정된 상태야. 절대 아닌 말을 아스가 태연히 말하며 엘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엘, 라피스하고 이러고 있지 마. 응?”
뭐냐 아스, 난 생각해 보겠다고 했거늘 어째서 벌써 애인 행세인 건데?
“아스 하는 거 봐서.”
엘은 팔을 들어 아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8 반항기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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