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성한 모습의 신전은 현존하는 최고령 신이자 정신연령에선 최하, 잔머리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카노스의 것이었다.
자신의 신전 방들 중 하나에 틀어박힌 카노스는 서류를 대충 보며 훌쩍였다.
“엘뤼에엔…….”
그때의 충격적인 광경은 카노스의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리플레이 되어 그의 심장을 괴롭혔다.
가만히 이틀 정도 생각해 본 결과 카노스는 그를 안 이래 한 번도 엘뤼엔이 웃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작은 미소조차, 아니. 비웃음조차도.
자신을 볼 때의 엘뤼엔의 표정은 귀찮음이 가득하거나, 냉담하거나, 짜증을 내거나, 덤덤하거나…….
카노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저기서 들은 상대를 웃게 하는 방법들이 전혀 통하질 않았으니(상대를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다)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잠시 뒤, 빛만이 방 안에 남았다.
⁂
용병으로서의 유희를 대충 때워두고 정령계에 돌아와 모처럼 미네르바와 시간을 보내려던 트로웰의 계획은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얼마 전 엘뤼엔의 손에 거의 살해(트로웰은 고개를 저었다) 당하는 카노스를 보고 혀를 찼었는데 일이 난 뒤 보는 카노스는 여전히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트로웰은 일단 카노스가 갖고 있는 오류를 지적했다.
“다음엔 무슨 선물을…….”
“하아, 카노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엘뤼엔은 귀찮게 하는 모든 것들(엘 제외)을 싫어한다고. 그 점에서부터 당신은 틀린 거야.”
그 말에 카노스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놀란 그 표정에 트로웰은 그가 도대체 얼마나 사람관계에 미숙한지 짚어냈다.
길고 긴 삶에서 그는 깊은 관계가 하나도 없었기에 이런 사소한 것마저 미숙한 것일 터였다. 어쩐지 골치 아픈 두 사람에 트로웰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타인에게 얼음 같은 엘뤼엔에게 붙은 생각 어린 마신이라. 불 보듯 뻔했다. 아마 엘뤼엔은 신경도 안 쓰겠지.
어딘가 어른스럽게 충고하는 트로웰의 말을 카노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들었다. 그게 평소의 그와는 달라 옆에 앉아 둘의 대화를 듣던 미네르바는 궁금증이 일었다.
“헌데, 카노스. 갑자기 엘뤼엔을 웃게 만들려 하는 건 왜지? 진실로…, 새로운 장난인가?”
미네르바는 ‘진실로 미친 건가’ 의 말을 삼키고 좀 더 적절한 단어를 골랐다. 그의 말에 트로웰 역시 새삼 궁금증이 일었는지 카노스에게 답을 독촉했다.
카노스는 실없이 웃었다.
“너희, 엘뤼엔이 웃는 거 본 적 없지?”
마치 혼자만 알고 의기양양해 하는 아이 같은 모습에 트로웰과 미네르바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큰 웃음을 말하는 거라면 없지만 미소정도는…….”
“엘 보러 와선 아주 꽃가루를 뿌리고 가거든, 엘뤼엔.”
카노스는 그 말에 급 우울모드(땅 파고 버섯 심을 자세)에 들어갔다.
“엘뤼에엔……. 아, 그럼 엘을 데려오면 되겠네.”
금방 회복하곤 당장이라도 엘을 납치해올 기세로 냐하하 웃는 카노스를 트로웰은 뜯어말렸다.
“혹시 엘을 다짜고짜 잡아올 생각이라면 관 둬. 엘뤼엔 손에 소멸되고 싶어?”
미네르바 역시 카노스가 신나게 맞았던 것을 일깨워주며 그를 말렸다.
여기서 미운 털 하나라도 더 박혔다간 저 마신의 인생은 신참 형벌의 신 손에 끝날 터였다.
그런 상황은 아무리 카노스를 귀찮아, 혹은 부담스러워 하는 둘이라도 사절이었다.
“뭐야,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건데?”
자신이 무슨 말만하면 말리는 두 사람에게 카노스는 물었다.
트로웰은 그저 이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그리고 할 수 있는, 바람직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서류처리나 열심히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 같은데?”
그리곤 카노스가 맥 빠진다는 표정을 짓자 바로 덧붙였다.
“땅의 정령왕이 하는 말인데 좀 믿어. 혜안을 무시하는 거야?”
혜안까지 들먹이는 트로웰의 말에 카노스는 갈등했다. 사실 살기 가득한 엘뤼엔의 신경을 건드렸다간 사단이 나도 단단히 난다는 것쯤은 카노스도 알고 있어 트로웰의 제안이 끌리는 터였다.
그러나 트로웰의 말에 따르자니 뭔가 석연치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카노스는 결국 트로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방금 전까지 카노스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고개를 돌린 미네르바가 복잡한 표정으로 트로웰에게 물었다.
“그게 정말 맞는 방법이야?”
트로웰은 그 말에 생긋 웃었다.
“아주 연관 없는 건 아니야.”
카노스 하기에 달렸지만.
트로웰은 뒷말을 삼키고 그저 웃어 보였다.
⁂
얼마 전 신종 수법으로, 그것도 위엄 드높은 엘뤼엔을 공격하다가 갑자기 또 성실하다 못해 미친 속도와 양으로 일처리를 하고 있는 카노스에 대해 신계의 모든 이들은 모였다 하면 그 얘기를 했다.
좀 만만한 이들이면 찾아가 직접 물어보기라도 하려만, 연관된 당사자들이 워낙 인물들이다 보니 신들은 그저 추측성 수다만 뱉어낼 뿐이었다.
그 가운데 카노스 사건의 최대 피해자이자 최대 가해자인 엘뤼엔은 모처럼 만족스런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한동안 서슬 퍼런 엘뤼엔을 보좌하느라 심장이 콩알만 해졌던 천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정신건강에 해로운 것은 일찌감치 없애는 것이 정답이라 생각하며, 엘뤼엔은 평소보다도 빠른 속도로 일처리를 했다.
매가 약이라는 것이 해답인지, 얻어터진 이후로 카노스는 엘뤼엔이 심기 상할 짓 없이 눈에 띄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황에 엘뤼엔은 미소까지 머금었다.
바로 그 카노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놓고 미친 짓(그의 기준에서)을 해올 것은 꿈에도 모른 채.
⁂
“여어, 엘뤼엔. 오랜만이야~”
명랑한 인사를 건네며 그의 앞에 나타난 이는 추리할 것도 없이 바로 짐작되는 이였다.
신계에서 저런 인사를 엘뤼엔에게 건넬 수 있는 사람은 손가락 꼽을 것도 없이 한 명뿐이었으니까.
요 며칠 간,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일상을 보내고 있던 엘뤼엔은 생생한 모습의 카노스를 노려봤다.
더하여, 엘뤼엔 아래의 천사들 역시 평온한 일상을 뒤집으러 나타난 이를 곱게 보지 않았다.
엘뤼엔의 노골적인 살기와 천사들의 은근한 살기를 받으면서도 카노스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정말 반갑다는 듯 인사했다.
“이야, 오랜만에 봐, 친구. 사는 게 바쁘다보니 소식이 뜸해져버렸어. 근데 오랜만에 보는 친구를 보고 웃어주지도 않는 거야?”
“며칠 전에 봤으면서 오랜만은 무슨. 또 뭔 수작이야, 나가, 당장.”
엘뤼엔은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소리, 하루가 마치 천 년과 같아…….”
새액
바람을 가르고 엘뤼엔이 들고 있던 펜이 벽에 박혔다. 카노스는 어설피 웃었다.
한 며칠 트로웰과 미네르바의 충고대로 자신의 신전에서 서류나 말끔히 처리하고 있던 카노스는 결국 일어섰다.
예지를 가진 트로웰이 한 말을 무시하는 건 조금 껄끄롭지만 이러다간 죽도 밥도 못 될 듯 했다.
카노스는 결국 성격이 시키는 대로 정공법을 택했다. 그렇게 된 사정으로 그가 현재 엘뤼엔과 마주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카노스의 마음 따위 엘뤼엔이 알 바 아니었다. 엘뤼엔은 쉽게 나가지 않을 카노스에게 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물었다.
“도대체 왜 자꾸 오는 거냐, 너?”
들어줄 테니(듣기만) 얼른 말하고 꺼져라, 쓸 데 없는 헛소리나 아무 이유 없다는 등의 말만 해봐라, 명계로 보내주마, 등등의 뒷뜻이 내포된 엘뤼엔의 말에 카노스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아니,
“웃어줘, 엘뤼엔.”
저질러버렸다.
“…….”
잠시 묘한 침묵이 공간을 감쌌다.
엘뤼엔이 노골적으로 싫은 감정을 드러내다가 잠시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미친 모양이…….”
“잠깐! 엘뤼엔 먼저 내 말 좀 들어봐!”
카노스가 다급하게 외쳤다.
카노스의 외침에 엘뤼엔은 몸을 의자에 기댔다. 어쩐지 나른하다.
저 녀석의 헛소리 정도야 아량을 베풀어 들어주지(흘려주지), 정도의 생각을 한다.
아무 말 없는 엘뤼엔에게 카노스는 계속 느끼던, 생각하던 바를 입 밖에 내었다.
“엘뤼엔, 나 한 번도 너 웃는 모습을 못 봤다고, 미소 정도도, 아니 비웃음도 못 들어봤다니까. 왜 나한텐 항상 귀찮거나, 찌푸린 표정뿐인데?”
그 말에 엘뤼엔은 허, 하고 낮게 탄식했다.
아무래도 이 마신은 세간의 소문대로 미친 게 분명한 것 같았다.
엘뤼엔이 그렇게 느끼건 말건, 카노스는 자신의 유아와 흡사한 상태를 눈치 채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그 폼이 꽤나 많이 쌓여 있었던 듯 하다.
“대체 왜? 내가 뭐라고 말만 하면 화내고, 꺼지라고 하고.”
어쩐지 떼쓰는 듯한 카노스의 추궁이 끝나자 엘뤼엔은 나른한 상태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디 예쁜 구석이 있어야 봐주지.”
그걸 말이라고 하나, 엘뤼엔이 고개를 돌려버린다.
“내가 뭘?”
그러나 엘뤼엔의 말을 카노스는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처럼 쾌활한 사람이 어딨다고!
“그게 네 가장 큰 문제점이지, 할 말 다 했으면 나가.”
엘뤼엔은 의자에 파묻었던 몸을 일으키고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나 카노스는 나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웃어 줄 건데?”
카노스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내 눈에 안 띄면.”
그렇게 대답하던 엘뤼엔은 순식간에 가라앉은 카노스의 얼굴에 선심 쓰듯 한 마디 덧붙였다.
“나중에 네가 익숙해지면 웃어 줄 수도 있겠지.”
절대 없겠지. 엘뤼엔은 몸을 일으켰다.
그래? 카노스의 안색이 대번에 밝아진다.
엘뤼엔은 이제 관심이 없다는 듯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눈앞의 마신이 자신의 말에 ‘익숙해지자’며 앞으로 얼마나 달라붙을 지는 전혀 예상 못 한 채.
# 7 웃어주세요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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