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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短篇]/정령왕 엘퀴네스

[당신의 꿈은 평안합니까?]

 

[당신의 꿈은 평안합니까?]        

Written by Rine in Rine's Side

 

※ 설정은 엘 탄생 이후 현역이었던 정령왕들의 꿈 얘기.

 

 

 

 

 

인간은 물론, 정령이 사는 곳이라 해도, 신이 사는 곳이라 해도, 일단 밤은 옵니다.

 

밤.       이 얼마나 달콤한 단어인지요.

 

한낮의 활발함도 좋지만, 어딘가 어른스러운 고요함이 내리앉는 그 시간대. 잠 못 이루는 인간도, 자지 않는 정령도, 휴식을 취하는 신도,

 

모두가 으레 살아온 모습 그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풀어진 시간입니다.

 

                쉿.

 

 

 

오늘은 당신과 함께. 특별히 '누군가' 의 꿈을 엿보려 합니다.

 

 

당신만 괜찮다면, 함께 보는 건 어떠신지?

 

 

 

 

 

 

 

 

 

Case 1

 

현역) [트로웰]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반짝이는 눈동자의 매력적인 정령왕. 분위기를 환기 시키는 어른스러운 이로, 엘에게 있어선 ‘형’ 혹은 ‘애늙은이(...)’의 존재.

 

 

[ 타박 타박 걸음을 옮긴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공간. 대지를 관할하는 정령왕답게 어두운 색깔과 육중한 색채엔 익숙하지만, 이건 그와는 조금 다른 암흑이다.

 

오랜만에 잠 들었더니 꿈이 이 모양인가- 실없이 웃으며 그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을, 심지어 허공을 걷는 듯한 그 공간을 그저 목적 의식 없이 걸어가고 있는 가운데, 드디어 무언가가 보였다.

 

아. 이 지루한 꿈에도 뭔가 이벤트가 있는 건가? 평소와 같은 느긋한 태도로 은은한 둥근 밝기가 비추는 곳으로 향한다. 웬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성숙한 여인이 있었다, 그곳엔.

 

"…미네르바?"

 

어찌 몰라볼 수 있으랴.

 

트로웰. 그가 탄생했을 적부터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바람의 정령왕, 오직 그에게 있어 유일한 여신을.

반가움이 어린 목소리로,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조금 빠른 템포로 다가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그 이의 어깨를 잡았다. 목소리와 손짓에 반응했는지 천천히 뒤로 돌아보는 모습에 그는 만면에 미소를 띠우고 인사를.

 

 

 

하려는데.

 

 

 

 

 

 

"……으아아아아아?"

 

 

 

저도 모르게, 번개 같은 속도로 손을 떼고 물러나 버렸다. 그것뿐이랴. 후다다닥 뒤로 물러서서는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암흑의 공간 속으로 다시 몸을 내던진다.

그의 얼굴은 드물게도, 미소고 뭐고 다 사라진 채, 오로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

 

그리고 그가 떠난 뒤에 남은 은빛 정령왕의 돌아본 모습 중 얼굴에는,

 

 

 

……얼굴이 없었다. ]

 

 

 

 

 

 

 

 

 

Case 2

 

전직) [페르데스] 현재는 후임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명계의 상급신으로 환생한 존재. 무심하면서 정 깊은 어머니 같은 존재다.

 

 

[ "트로웰…?"

 

오로지 환한 공간 속. 도무지 어딘지 모를 곳에 무료하게 서 있다가,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돌아보았다.

언제나와 같이 보기만 해도 함께 웃게 되는 미소를 지닌 트로웰을 보고, 마주 미소 지으려는 순간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달아나 버린 트로웰의 뒷모습을 그는 허망하게 지켜보았다.

 

왜 저러지?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에 물끄러미 그가 떠나간 자리만 응시한다. 페르데스. 그가 있는 곳은 환한 공간. 천장에는 푸른 색 바탕에 흰 구름이 칠해져 있고, 벽에는 알록달록한 벽지가, 바닥엔 보기만 해도 푹신한 양탄자가, 방 안 곳곳엔 쿠션과 봉제 인형이 널려 있는 곳.

 

잠깐 눈 좀 붙일까 했더니 펼쳐진 게 이런 공간이다.

보통 잠을 자게 되더라도, 꿈을 이렇게 생생하게 꾸는 일은 없는데…… 하아아.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그는 그저 양탄자 위에서, 처음 이곳에 나타난 그대로 서 있었다.

 

 

"아하하하!"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문득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는 너무도 상쾌해서, 듣는 사람까지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음성이었다. 거기에 익숙하다.

 

엘퀴네스. 절로 떠오르는 이름에 페르데스는 반가움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맑은 웃음소리는 간간히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꽤나 넓은데다가, 곳곳에 쌓인 쿠션과 봉제 인형 때문에 어디 있는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가장 가까운 쿠션 더미를 가볍게 밀쳐보지만, 그곳엔 없었다.

 

가까운 곳부터 시작해 거의 다 밀치고 나서야, 페르데스는 물빛 머리카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망아지, 당나귀, 송아지, 악어 등등 온갖 봉제 인형이 벽을 둘러싸고 있는 곳. 오로지 엘퀴네스만이 가지는 머리 자락이 보였다.

 

"엘."

 

이제는 그만을 지칭하는 단어가 된 애칭을 부드럽게 부르며, 봉제 인형을 차분히 내렸다.

 

 

 

 

 

 

 

 

 

 

 

 

 

"허억!"

 

페르데스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눈을 떴다. 그야말로 간이 떨어진단 표현이 이럴 때 쓰인다는 걸 체감하긴 처음.

헉, 헉, 하고 숨을 고르고, 식은땀이 난 것만 같은 기분에 관자놀이를 짚는다.

 

꿈이야. 꿈. 그건 꿈이야.

 

 

 

 

 

엘이, 몸무게가 120kg은 돼 보이는, 그런 거구일 리가 없잖아?

 

진정하자, 페르데스. 심호흡 하고. ]

 

 

 

 

 

 

 

 

Case 3

 

현역) [엘퀴네스] 사건 사고의 중심에 있는 폭풍의 눈. 밝고 명랑한 성격에 긍정적. 맹한 구석이 있는 반면 똑부러지기도 한 정령계의 귀염둥이.

 

 

[ "으하하하하하!"

 

한동안 존재조차 잊고 살았던 TV가 어째서인지 눈앞에 놓여 있다. 이게 뭐지? 하면서도 곧 몸에 익은 방식대로 켜고, 시청한다. 그 뒤로는 그야말로 폭풍웃음.

 

TV가 이렇게 재밌는 거였나? 모 개그 프로를 켜놓고 연신 배를 잡고 눈물까지 흘려가며 웃었다. 아, 배 아파. 당기는 것 같아.

정령에겐 있을 리 없는 통증까지 느껴지는 가운데 얼마나 보았을까.

한 프로그램을 다 보고, 광고가 지나가고, 또다시 시작하고.

 

그러는 사이에 점차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TV만 보다가 끝나는 거야? 자각몽은 처음 꿔보지만, 이런 시시한 전개라면 깨어 있는 게 훨씬 생산성 있겠다.

잠은 안 자도 되는 몸이지만, 늘 수면을 취하는 엘퀴네스. 그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안색이 질릴 때까지 걸린 시간은 10초.

 

뭔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에 갑자기 으스스한 기분과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낀다.

오른쪽에서 느껴지는 따끔따끔한 시선. ……아 제발. 나 이런 거 싫다고.

 

마음을 굳게 먹고, 에라이, 보자! 하고 고개를 돌린 순간. 그는 새햐앟게 질려서, 굳어 버렸다.

 

 

 

그의 동기 중 하나인 전직 미네르바, 현직 상급신인 친구가.

 

귀신처럼 새하얀 모습으로. 저를 쳐다보다가. 그래, 귀신처럼 단조로운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다가,

 

 

"엘."

 

하는 말과 함께 스르르 녹아내리듯 사라져 버렸으니까.

 

 

 

"뭐, 뭐야-!!!!"

 

나 이런 거 질색이야! 꿈 따위 얼른 깨버리라고!

 

소름이 쫙 돋고, 한기가 드는 느낌에 고개를 파묻고 봉제 인형을 품에 꼬옥 안았다. 으으. 싫다. 깨어라. 깨어나라. 제발. 제발.

 

그래! TV! TV를 보는 거야! 개그프로가 있어, 나한텐!

 

 

자 와라! 뭐든 웃어주마!

 

 

귓가에 왁자하게 울리는 방청객의 웃음소리와 개그맨의 멘트를 들으며 파묻었던 고개를 들고 다시 정면에 있는 텔레비전을 쳐다봤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그는 기절했다.

 

 

물빛 머리카락이 흩어져 쓰러진 방 안에,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처럼 켜진 텔레비전 화면 속에는,

 

 

온통 피 칠갑을 한 미네가 그를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

 

 

 

 

 

 

 

 

 

Case 4

 

현역) [미네르바] 애칭 미네. 전통적인 미네르바의 성격과 외형을 물려받은 어린 소녀의 모습. 엘과 탄생부터 어울린 덕에 조금 밝아졌다?

 

 

[ 여긴 어디입니까?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공간 속에서, 그, 미네는 담담히 서 있다. 온통 유리로 둘러싸인 박스 안에, 온실 속 꽃처럼 미네는 서 있었다.

방금 전, 그나마 뭔가 보이기 시작한다 싶어 열중해 한 면을 바라보니, 봉제 인형을 품에 안고 이쪽을 웃으며 바라보는 엘이 보였다.

초점을 보아하건데, 미네를 보는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심심하기만 한 공간 속에서 환히 웃는 엘의 얼굴이라도 보이는 게 어디랴.

 

그러나 어느 순간, 미네와 눈이 마주친다 싶은 엘이 털썩, 옆으로 기절하는 모습에 미네는 큰소리를 냈다.

 

"엘! 엘?!"

 

부름은 그에게 닿지를 않는지, 미동도 하지 않고, 서서히 점멸되는 것처럼 그의 모습이 멀어져 가다가 사라졌다.

어딘가 찝찝한 기분에 미네는 괜히 잠 들었나, 하는 후회를 했다.

 

한동안 찜찜한 기분에 시달리는데, 또 한 번 벽면 유리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미네는 자연히 그곳에 시선을 집중했다. 서서히 확대되는 화면에 보이는 것은 연신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거리고 있는 이프리트.

어쩐지 반가운 기분에 미네는 평소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여 그를 불렀다.

 

"이프리트, 이프리트! 제가 보입니까?! 이프리트! 이프리트으으으으!"

 

 평소의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신기하다 쳐다볼 정도로 큰 목소리였지만 이프리트는 이쪽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시선 하나 주지 않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며 연신 이프리트를 부르다가,

 

 

 

"……아?"

 

 

태어난지 일 년도 되지 않은 바람의 정령왕은,

 

 

 

그 날 처음으로 가위에 눌렸다.

 

 

 

 

 

 

완전히 커진 화면 속에서 붉은 머리가 탐스러운 불의 정령왕은,

 

트윈테일에, 한 손엔 하트 풍선을 들고, 핑크색과 흰 색이 어우러진 세일러복 의상에, 결정적으로 굉ㅡ장히 진한 스모키 화장을 한 채 씨익 웃고 있었다. ]

 

 

 

 

 

 

 

 

 

Case 5

 

현역) [이프리트] 정령계 최고 다혈질이자 엘과 더불어 사건사고를 치는 폭풍에 속하는 누님. 의외로 지고지순한 일편단심의 연심을 품고 있다.

 

 

[ 뭐냐구. 이런 공간 따위.

 

온통 어두운 공간을 걷고 있다. 화려하게 내려오는 타오르는 태양의 붉은 빛을 가진 머리칼과 눈동자. 백옥의 피부는 세상 어떤 남자라도 넘어오게 할 정도로 관능적이지만, 정작 본인이 짓고 있는 표정은 오로지 짜증.

 

꿈이라는 거, 이렇게 심심한 거였나?

 

간만에 잠 들었는데 정신 차리고 나니 계속해서 이곳을 걷고, 또 걷고, 계속 걷고 있다.

그가 있는 곳은 어두컴컴한 암흑의 공간.

위아래의 구분도, 양옆의 구분도 없는 오로지 암흑만이 넘실거리는 공간은 시끄럽고 활기찬 걸 좋아하는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난 좀 더 스펙타클한 것을 원했는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슬슬 깨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으스스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이프리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지?"

 

익숙하긴 익숙한 목소리인데… 쓰읍. 누구지?

 

고개를 갸웃갸웃 해보지만 도통 팍! 떠오르는 게 없다. 미간을 찌푸리며 떠오를 듯 말 듯 계속 머릿속을 헤집는 것에 한숨을 쉬었다.

정령왕이 건망증이라니. 뭐 이런 엘 같은 일이ㅡ 응?

 

이제는 제법 크게, 높게 들려온다. 두리번거리던 이프리트는 이내 저만치서 무언가가 보이자 그쪽에 눈을 고정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그것과 더불어 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몬스터냐? 마족? 뭐든 좋아, 날 재밌게 해달라고!"

 

당장이라도 불의 검을 소환해 겨눌 듯한 기세로 뚫어지게 점점 커지는 형체를 쳐다보던 이프리트는…….

 

 

"꺄으아아아아아아악?!!?!?"

 

 

 

 

 

처음으로 눈물을 매단 채 질주 했다나 뭐라나.

 

 

 

 

그의 뒤에는, 한 발짝 한 발짝 무표정한 채 다가오며 '이프리트' 를 외치고 있는 미네가 있었다나 뭐라나. ]

 

 

 

 

 

 

 

 

어떠셨나요?

 

평화로운 밤. 잠을 못 이루고 제 손을 붙잡으셨을 여러분.

 

여러분이 궁금해 하는 누군가의 꿈, 은 이것으로 여행을 마치겠습니다.

 

모든 분들의 밤이 평화와 안식으로 잔잔히 물들기를 기원하며. 저는, 이만 꿈나라로 떠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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