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망했어, 망했어, 너 시험 잘 봤냐? 아 왜 답이 3번이냐고.”
주변에서 애들이 좋아하거나 절망하거나 어쩌든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엎드렸다.
“엘~ 왜 그래? 시험 못 봤어?”
“아니… 졸려…….”
졸립기도 졸립지만, 그보단 온통 그에 대한 생각으로 어지러웠다. 방금 본 과목이 쉬웠는지 어려웠는지도 생각이 안 났다.
3교시 간의 시험을 어떻게 봤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문득 정신 차리니까 오늘 시험이 끝나 있었다.
안 돼, 첫 날 시험부터 이러면 어떡해!
늦게 오는 담임 탓에 종례를 늦게 마치고 집으로 갔다. 현관문 도어락을 열려다 드는 생각에 손을 물렸다.
설마, 이 시간에 집에 있진 않겠지?
혹시 그렇다면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벌컥
강하게 연 집 안에서 정적이 흘러 나왔다.
아무도 없는 모양새에 조심스레 발을 들여놓는다.
그러면 그렇지, 이 시간에 집에 있을 리가 없어. 나는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가방을 던져놓고 옷부터 갈아입었다.
“그냥 그러네…….”
점심을 먹기 위해 국 냄비를 가스렌지에 올려놓은 채 종례시간에 가채점한 시험지를 꺼내 들었다.
적당히 틀린 시험지 세 개. 기억을 더듬어 본 결과 중간고사랑 별 차이 없는 점수였다.
시험임을 인식조차 못 하고 흘려보낸 시간인지라 비가 내려도 할 말이 없었는데 다행이다. 이것도 습관인가? 문제 푸는 거.
데운 국을 놓고, 마른 반찬을 꺼내고, 나는 혼자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다 먹고 공부나 해야지. 그래도 명색이 시험기간인데.
다 먹은 뒤 졸음을 쫓을 커피를 마시려 물을 올렸다. 다시 식탁 의자에 앉으려던 나는 울리는 전화벨에 몸을 돌렸다.
핸드폰 액정엔 모르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여보세요.”
- 안녕, 엘군.
아, 아는 사람이다. 친한 사인지 몇 번 본 적 있는 그의 친구다.
“무슨 일이에요, 카노스.”
처음 보았을 때 ‘카노스 아저씨’ 라고 했다가 다 큰 남자가 흑흑거리는 모습을 보았던 난 임의로 호칭을 정해 부르고 있었다.
- 일 있어야 통화하나, 우리 사이에~ 엘군, 시험은 잘 봤어?
“딱히… 근데 시험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 엘뤼엔이 어제 같이 밥 먹자니까 안 된다기에, 꼬치꼬치 캐물어 봤지.
“그… 래요?”
- 엥, 반응이 왜 그래? 혼났어?
“아뇨. 평소보다 잘해줘서 문제에요.
- 으흠. 그동안 내가 엘군과의 관계 진전에 대해 충고한 게 드디어 먹혀 들은 거 아닐까? 냐하하 난 역시 대단해.
이십 대 후반의 남자가 저렇게 철없게 웃는 게 어울리다니 참 대단하다. 그렇게 뜬금없는 그의 안부전화를 받은 난 식은 커피를 손에 들었다.
아직 두 시도 안 된 시간. 나는 한가롭게 뒹굴거렸다.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거실은 낮잠을 즐기기에 최고의 장소였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로 잠이 들 것 같아 난 애써 눈을 뜨려 노력했다. 정말 졸려… 결국 난 몰려오는 잠을 떨치길 포기했다.
아예 쿠션을 끌어와 포근한 섬유 유연제 냄새에 코를 박은 채 나는 눈을 감았다. 여러 색깔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
“그래. 뭐? …쓸데없는 소리 마라. 아니. 아무 짓도.”
한낮의 잠은 그저 눈 한 번 감았던 것 같은데 끝나 있었다. 나는 수마의 기운에 헤롱거렸다.
“아무 짓도 안 했어. 겁내고 있어, 이 애.”
통화를 하는지 그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더불어 어른의 손이 느껴졌다.
바로 얼마 전, 내 머리를 쓰다듬었던 손. 크고 온기를 간직한 그 손의 주인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눈을 떴음에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일어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아예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나도 내가 왜 이렇게 자는 척을 하는지 몰랐다. 단지 머리맡의 그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해야 한단 생각만이 들 뿐.
그런 이유로 나는 불편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는 친구인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꽤 오래 통화를 계속 했다.
주로 상대가 말을 하면 그는 짧은 대꾸를 하는 게 고작이라 정확한 내용을 추정하는 건 무리였지만, 드문드문 들리는 단어는 범상치 않았다.
‘잘 지낼 거다’, ‘이 아이’ 이런 말들.
내 머릿속이 급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설마… 누군가 데려오는 걸까? 나는 그의 친척도 아니다. 그는 단지 친구인 내 아버지를 대신해 부모 잃은 날 입양했다.
여태 못 해본 생각인데… 그는 정이 많은가 보다. 그래, 그런 거다. 그러니 친구의 아들이란 이유만으로도 잘 알지도 못하는 날 데려왔겠지.
그러니까 그 정 많은 인간인 그는 나처럼… 누군가를 데려오는 걸까?
생각이 상상이 되고 상상이 폭주해 충격에 빠져 있던 사이 그가 전화를 끝냈는지 사방이 조용해져 있었다.
“언제까지 잘 거냐.”
정신을 놓고 있던 나는 그가 나지막하게 말하며 내 머리카락 사이로 손빗을 쓰는 걸 느끼고 괜히 눈을 더 꾹 감았다.
요즘 왜 이래, 당신. 난 거들떠도 안 보고 방으로 가야지. 아니면 나더러 일어나라고 하기만 해도 난 바로 알아들어.
당신 목소리엔 자동으로 반응한단 말이야.
애초에 이름만 아버지면서 왜 이제와서 이러는 건데, 응?
갑자기 모든 게 서러워졌다.
낯설어,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무서워.
“…엘?”
그가 평소랑은 다른 목소리로 날 불렀다. 느릿하지 않은 손이 뺨으로 내려와 눈가에 닿았다.
“왜 우냐.”
울어봐야 글썽해지는 정도인 내 눈가는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는 고여 흘러내리려 하는 눈물을 보곤 잠시 멈춰 있다가 휴지를 끄집어 내 조심조심 눈가를 씻어냈다.
나는 대답 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가 당황해 하든 말든, 눈물이 흘러넘치든 말든, 나는 상관하지 않고서.
나는 오랜만의 감정을 흘려보냈다. 흘러버린 감정의 잔류가 미비해지길 바라며.
⁂
환한 색의 머리칼을 꼼꼼히 말리며 오늘 보는 과목 정리를 훑어봤다.
마침 시험기간이라 다행인건지, 하필 시험기간인진 잘 모르겠다. 시험에 집중하느라 딴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기분은 영 아니고, 어제 저녁의 그의 말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애써 책을 쳐다보았다.
신경 쓰지 않을 거야. 무심하게, 어른스럽게 굴어야지. 애처럼, 어린애로 보이고 싶지 않아.
잡스런 생각을 잊느라 나는 평소보다 배로 집중해 문제를 풀어갔다. 다 풀고 나서 시간이 남으면 두 번, 세 번 또다시 풀면서.
여전히 마음속은 심란하게 흔들렸지만, 나는 계속 생각했다.
멍청히 있지 말고 오늘 물어보자고. 혹시 정말 ‘누군가’가 온다면(그게 후원할 아이건, 뭐건. 그래, 설령 애인이라도) 어른스럽게 말하자고.
나는 이만큼 컸으니까, 혼자 살 수 있다고. 사실 그동안 고마웠다고, 살갑게 굴지 못 해 미안하다고.
똑똑하게 굴자, 엘.
⁂
… 침착하긴 개뿔.
나는 그저 입술만 연신 깨물었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었다간 소리가 날 것 같아서. 그건 싫어 이렇게 참고 있었다.
북받치는 울음을 겨우겨우 삼키는 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린애야. 결국 애처럼 굴잖아. 이게 뭐야.
담담하게 대답해야 하는데. 여유롭게 웃어야 하는데. 별 신경 안 쓴다는 듯이 미소지어야 하는데.
결국 울잖아.
⁂
“일찍 왔네요.”
점심 먹고 멍하니 시간 보내다가 정신을 차린 게 세 시 반. 그리고 그가 현관을 열고 들어온 지금은 겨우 네 시.
오늘은 또 왜 이렇게 빨리 온 걸까. 괜히 가슴 한 쪽이 따끔거린다.
“…그래.”
내 말에 짧게 대꾸하며 그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늘씬한 뒷모습을 나는 눈으로 쫓았다.
가슴이 쿵쾅쿵쾅 뛴다. 물어봐야 해. 물어봐야 해. 하지만 꼭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그냥 모른 척 입 다물고 있으면…….
작아지는 마음을 나는 다잡았다. 그는 정장을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다. 여전히 그다운 모습에 펄떡이는 심장이 소란스럽다.
이게 바로 성적표 내미는 기분이라는 걸까. 친구들이 항상 말하는 가슴이 터질 듯 박동하는 상태인 걸 보니 맞는 것 같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걸 이렇게 느껴보는 구나.
나는 애써 딴생각을 했다.
소매를 걷으며 주방에서 커피를 준비하는 그에게 다가갔다. 등을 돌린 그를 바라보며 식탁 의자에 앉는다.
그리고 툭 내뱉었다.
“내가 나가는 게 좋을 까요.”
아. 나는 혀를 찼다. 이렇게 말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뭐?”
포트를 올린 그가 나를 돌아봤다. 반짝반짝 빛나는 그의 눈. 그의 눈가는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내가 방해가 되냐고요.”
정말 이렇게 말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말투가 공격적이 되었다. 엘, 차분하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무슨 엉뚱한 소릴 하냐는 듯 되묻는 그의 말투. 표정. 목소리. 모습. 위축되는 마음이 느껴진다.
“여태 돌봐준 것, 정말 고마워요. 나 때문에 당신의 몇 년을 제약 받은 것도 정말 미안해요.”
말하다보니 울고 싶어졌다.
묻고 싶었다.
내가 귀찮았나요?
“나도 이제 고등학생이에요. 더 당신을 불편하게 할 정도로 생각 없진 않아요.”
아니면, 내가 싫었나요?
나는 그의 눈을 보고 싶었다. 서늘한 미안도 보고 싶었다. 다만 분명 지금 내 눈가는 꼴사납게 빨갈 게 뻔해서. 그저 내 손만 보았다.
아 어떡해. 울 것 같아.
나는 왜 이렇게 어리숙한 걸까. 이깟 일쯤 하며 홀로서야 하는데 왜 그를 벗어나질 못 할까.
열 두어 살 아이도 아닌데. 그 때로부터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언제나와 같은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내 착각일지 몰라도, 당혹해 하는 소리였다.
너무 갑작스럽게 말했나? 나는 입꼬리를 당겼다.
정말 울고 싶지 않아.
“네가 하고 싶은 말은, 집을 나가고 싶다는 거냐.”
끄덕끄덕. 말문을 열기가 힘들어 고개를 움직였다. 그러다 나는 덧붙였다.
“당신에게 더 부담되고 싶지 않아요. 엘뤼엔.”
아버지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내게 있어 당신은, 항상 어른의 모습인 엘뤼엔일 뿐.
결국 목소리 끝이 바르르 떨렸다. 꼴사납게 눈물이 왈칵 흘러 나왔다. 난 왜 이렇게 약한 거야. 당신의 애정 하나만 보는 건 왜야. 왜 난 당신을 아버지로 보지 못하는 거야.
“엘,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왜 그런 소릴 하지?”
주방은 고요해져 있었다. 물이 끓던 소리도 없어져 있었다. 나는 내게 온 그의 소매를 손에 쥐었다.
지쳐서. 당신의 말없음에 혼자 종종거리는 게 지쳐서. 당신이 날 싫어하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게 지쳐서.
이건, 나를 오롯이 봐달라는 몸부림. 나의 멍청한 어리광. 나를 사랑해 달라는 내 말없음. 나는 나도 놀랄 정도로 감정이 격해져 가고 있었다.
곤혹스러운 듯 소매를 쥔 내 손을 떼어낸다. 그에 더욱 서러워지는 건 나.
그리고 그는, 떼어낸 내 손을 마주 잡았다.
“나는 네가 부담 되지 않아.”
꼭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건 언젠가 느낀 온기.
“나가겠단 소리는 말아라. 네가 싫어해도 난 안 보내. 어쨌든 난 네 보호자야.”
나를 진정시키려는 듯 토닥이는 다른 손.
“네가 불편히 느끼지 않게 하마. 다만 내가 볼 수 있는 곳에 있어.”
그의 목소리는, 아까의 당혹함이나 차분함은 담고 있지 않았다.
아니. 아니에요. 그게 아니야, 엘뤼엔.
내가 부담되지 않는단 말은 기뻤지만,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라고.
“엘뤼엔.”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나는 그를 불렀다. 의자에 앉은 내 앞에 꿇어앉은 채 그는 나를 보고 있다.
“나를 사랑해요?”
날 사랑해 줘요. 당신이 어떻든, 날 사랑해줘요. 그게 이기적인 내가 바라는 것. 당신에게 내가 바라는 것.
가늘게 우는 나를 앞에 두고 그는 말이 없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날 붙잡고 있다. 다른 손은 내 무릎에서 나를 토닥이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시선 역시 나를 향한 채인 듯 나는 날 바라보는 눈길을 느꼈다.
“…….”
싫어. 왜 말을 해주지 않아? 왜?
내가 바란 게, 그렇게 큰 거야?
오락가락하는 감정이 이번엔 억울함으로 돌아섰다. 섧게 흘리던 눈물을 잠시 멈춘 채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
드디어 마주 본 그의 눈은 살며시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금방이라도 말할 듯이 살짝 열려 있었다.
나는 무언의 재촉을 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곤 입을 열었다.
“그것이 문제라면, 다시는 이런 일로 울지 말아라.”
나는 기어코 다시 훌쩍였다. 내 손을 놓은 그는, 간헐적으로 떨리는 내 등에 손을 올렸다.
“나는 여태 널 싫어한 적이 없었다. 그건 지금도야. 앞으로도 더하면 더했지 적어지진 않을 거야.”
그는 어느새 일어나 있었다.
“말하자면, 엘. 나는 널 사랑한다.”
몸을 아래로 내린 그의 목을, 어깨를 껴안은 채, 나는 울었다. 마음 놓고. 그를 안은 채.
― 너보다 더한 마음으로.
그가 속삭였다.
# 11 부자유친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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