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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短篇]/단편

[월야환담] [이샤세건] 너를 향한 고민

To my spirit                     

Written by Rine in Rine's Side

 

 

 

아 제길 추워쌀쌀하다 못해 살을 에는 바람이 부는 건조한 골목에 초록색 머리카락이 눈에 띄는 호리호리한 남자가 서 있었다.

담벼락에 기대 있는 체격이 꽤나 탄탄하다. 골목을 지나던 여자는 하늘을 멍하니 보고 있는 남자의 아직은 앳된 얼굴을 보고 다시 고개를 돌리고 길을 빠져나갔다.

 

한숨과 같은 입김을 불며 서 있는 사복차림의 초록색 머리칼 남자는 실상은 고등학생이었다.

그리 못나지도, 잘나지도 않은 인문계 고교에 재학 중인, 이제 더도 덜도 않고 일주일 뒤면 수능을 봐야 하는 고 3.

자율학습도 빼먹은 채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결국 한산한 골목길에 선 세건은 에이는 추위에 눈살을 찌푸렸다.

 

세건! 한세건 뭐 하는 거야!”

 

뛰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곧 누군가 달려와 세건을 보고 소리 쳤다.

회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젖혀진 이사카. 세건은 ?’라 묻는 듯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몇 주 전엔 갑자기 염색을 하더니 오늘은 또 왜 조퇴야?”

 

그냥무슨 상관인데?”

 

세건의 심드렁한 대답에 이사카는 화가 난 듯 오히려 더 차분히 말했다.

 

하지 말라는 짓은 다 하면서 바른 아이인 척 하던 녀석이 갑자기 그러니 놀라서 그런다.”

 

나 담배는 안 피는데.”

 

세건이 느긋하게 대답한다. 이사카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누르며 대답을 종용했다. 이러니저러니 나돌아도 학교는 빠진 적 없는 놈이 조퇴라니.

아프다고 담임 허락을 받았으면 뭐하나, 어젯밤에도 쌩쌩하게 밤거리를 배회하고 오전 내 잠도 안 자고 무료히 있던 거 다 봤으니 믿을 수가 없지.

 

세건은 그러나 이사카의 물음에 대답해 줄 의향이 없는 듯 했다. 아니, 반대로 그에게 물었다.

 

나야 조퇴했지만, 넌 뭔데 여기 있냐?”

 

이사카는 짧게 외출증을 이용한 반 조퇴라 대답했다.

 

오늘 수리는 어떻게 할 거냐고 린이 물어 달라고 하더라.”

 

시험 막바지로 저녁 시간에 잠깐 수리를 봐주는 서린이다. 세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지, 도무지 안 풀리는 문제가 있어.”

 

그의 대답에 이사카는 그래,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너 춥지는…….”

 

이사카, 할 말은 그것 뿐?”

 

차갑게 말을 자른 세건은 어쩐지 싸늘한 눈으로 이사카를 응시했다.

 

.”

 

입술이 말라 이사카는 입술을 핥았다. 괜시리 목도 탄다. 세건은 이사카에게서 뒤돌아섰다.

 

그럼 나중에 보자.”

 

할 말 다 했으면 가라는, 세건의 행동과 말에 이사카는 뭐라 말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나중에그래.”

 

작게 말한 이사카는 여러 문제로 복잡한 머릿속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수능 지나고지나고 나면 정리 하자.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니까끝나고 나면어느 방향이건 결론이 날 테니까

 

그러면 그 때 얘기하자, 세건아. 정리하자, 너와 나 사이. 좀 다른 감정 품고 있으니까……. 그때 얘기할 게.

 

이사카 역시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일주일 뒤가 수능이다. 시험에만 집중하려 다짐한다.

 

나중에…….

 

 

 

 

그래서 여기에서 식은 이쪽으로세건,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올 해 수능을 보지 않는다며 나서서 세건의 수리 정리를 도와주는 서린이 어쩐지 계속 멍한 세건의 상태에 그의 눈앞을 손으로 휘휘 저었다.

 

세건씨이이- 왜 그래, 때가 어느 때인데 정신을 못 차려!”

 

짐짓 훈계조로 말하는 서린은 본인의 나이가 세건보다 반 년 아래라는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않고) 있는 듯 하다.

 

이샤도 영 표정이 안 좋더니 세건도 그러네. 코앞에 닥쳐서 그런가.”

 

서린은 어깨를 으쓱하고 손에 쥔 펜을 돌린다. 얼레평소라면 정신 사납다고 혼낼 그인데 아무 반응이 없다.

세건은 멍하니 허공을 보던 눈을 서린에게 향하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수능때려 칠까?”

 

왜 그래! 공부한다고 펜 잡고 수능반 왔으면서! 일 년 반 동안 열심히 해왔으면서 갑자기!”

 

세건의 한 마디에 서린이 화들짝 놀라 손에 쥐고 있던 펜을 책상에 탁 내리치며 소리 지른다.

 

그냥그래, 기분이.”

 

어딘가 요즘 계속 우울해 보이는 세건이 가뜩이나 걱정스러웠는데, 이런 약한 소리까지 하는 걸 보니 많이 약해져 있는 것 같았다.

 

유아독존 비스무리 한 이 한세건이 대체 왜 이런 약한 소리를수능이 막상 닥치니 초조해 진 건가.

하지만 여태까지 잘 해왔고, 적어도 자신이 해온 걸 후회하지 않는 세건의 성격으로 봤을 때 이런 그의 모습이 낯선 것은 서린으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가 도대체 무엇을 겁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서린은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저기 말이야 세건, 너무 그렇게 우울…….”

 

오늘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지? 내일이 마지막이다. 간다.”

 

해 하지 마, 쉬운 위로는 갑자기 일어서는 세건에 의해 문장이 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서린은 어어?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일찍 자고 잡생각은 하지 말고.”

 

잡생각이라세건은 피식 웃었다.

 

 

 

 

터벅터벅 불빛이 듬성한 길을 걸으며 세건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지금 뭐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오늘만, 지금만 그러고 있는 게 아니었다.

 

세건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 갑자기, 자율학습 끝나자마자 길가다 본 헤어샵에서 염색한 뒤에도,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지금 뭐하자는 거지?

갑자기 왜 그러는 거지?

 

왜 이렇게 답답한 걸까.

 

어딘가 가슴 한 켠이 묵직하고 막막한, 이 답답한 느낌은 뭘까.

 

1. 오토바이를 끌고 밤거리를 다니던 때처럼 학교까지 빼먹고(정당한 이유를 대고 조퇴한 것이긴 하지만), 쫓아와 당부하는 이사카한테 괜히 답답함을 풀고.

만지작거리던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세건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말은 별로 없지만, 언제나 솔직한 녀석인 이사카가 갑자기 떠올랐다.

그리고 또다시 가슴이 답답해진다.

세건은 얕게 숨을 내쉬고 어두컴컴한 하늘을 응시했다.

별 볼 여유도 잊게 되는 수능 전이었다.

 

 

 

 

막바지 준비는 잘 했어?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편히 푹 자. 잠 못 자서 시험보다 졸면 말짱 꽝이니까.”

 

쌀쌀한 오전. 삼한사온은 다 옛말인지라 계속 추운 날씨 속에 겨우 가디건 하나 걸친 세건의 목에 서린은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수험표를 배부 받고, 담임선생님의 격려와 시험 주의사항을 듣고 나선 교문엔 갈색 머리의 녀석이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세건- 너무 굳어 있지 마. 한세건은 어디로 갔어? 괜찮아, 노력했으니까 결과 좋을 거야. , 애들이 준 호박엿은 먹었어?”

 

재잘재잘 토닥이는 건지, 그저 수다 떠는 건지 서린이 하는 말에 세건은 1, 2학년 후배들이 준 엿봉지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너 가져.”

 

손에 쥔 봉투를 그대로 서린에게 툭 건넨다. 서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세건 지금 호박엿 무시하는 거야? 이게 바로 수능 이전부터 내려온 시험 징크스…….”

 

안 먹을 거면 버려.”

 

서린의 중얼거림을 세건은 한 마디로 일축했다.

결국 세건의 말에 손에 든 엿을 주머니 속에 구겨 넣은 서린은 세건의 집으로 향하며 계속 이 얘기 저 얘기를 끄집어냈다.

 

너 네 형한텐 안 가보냐?”

 

그 소란스러움에 세건은 한 마디 던졌다. 그러자 서린은 세건의 바람과는 달리 눈을 크게 뜨더니 다다다다 말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말도 마. 무슨 상위 1%라도 들 작정인지 이사카 요즘 엄청 무서워. 한 마디도 안 하고 공부만 한다니까.”

 

그래?”

 

, 그리고 뭐 한 마디 하려 하면 막 째려보고 진짜 분위기 아니야. 저러다 망치면 우리나라 갈아엎을 기세야. 장난 아니고 진짜 무섭다니까.”

 

그간 쌓인 게 많았는지 서린이 끝도 없이 말을 이었다. 정신 사나워 하면서도 하나하나 듣던 세건은 그런 자신에 흠칫한다.

 

잘 봐야지이 때 공부 안 하면 언제 하겠어. 서린 너 입 좀 다물어라.”

 

세건은 짐짓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어딘가 조금 씁쓸하다. 정말 열심히 하고 있구나, 하면서. 이사카는 그때 자신을 찾아온 후로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먼저 찾을 일이 없어 그냥 잊고만, 묻어두고만 있었는데 그렇게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었구나.

 

가방 속에 들어있을 수험표가 생각났다. 솔직히 이게 지금 꿈인지 현실인지 몽롱하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렸다.

고등학교 입학이 어제 같고 고 3 올라온 게 방금 전 같은데. 아니, 엊그제만 해도 잠깐 사이에 지나간 느낌.

 

내일이 수능인 게 어쩐지 인식되지 않아 세건은 불안했다.

 

 

 

 

받아 놓은 날짜는 금방 간다더니.”

 

아침에 쌩하니 나서는 이사카를 배웅해주고 교문 앞에서 수험생들에게 응원 플랜카드를 흔들어주며 서린은 중얼거렸다.

 

이제 거의 시간이 다 된 터라 교문 앞은 늦은 사람들과 응원하는 무리 외에는 한산했다.

 

형과 세건이 침착하게 잘 봐야 할 텐데둘 다 집중을 못하고 있는 것 같아 걱정된다.

 

 

 

 

이사카! 먼저 가게? 놀자, 혼자 가냐?”

 

? 이사카 가?”

 

시험이 끝나고 저마다 표정이 다르다. 온 몸에 힘이 빠진 듯 축 늘어진 녀석들, 영 인상이 안 좋은 애들, 어쨌건 끝났다는 것에 좋아하는 이들.

 

이사카를 부르는 녀석들은 마지막에 해당되는 학생들이라고 하면 되겠다. 이사카는 친구들의 제의를 단칼에 잘랐다.

 

만날 사람선약 있다. 먼저 간다.”

 

정말로 등 돌리고 먼저 나가는 이사카에게 뒤에서 친구들이 부른다.

 

야 너 여자 친구 만나러 가냐? 치사한 놈아!”

 

넌 잘 봤다 이거지!”

 

전혀 신경 안 쓰고 나가버린 이사카의 뒷모습을 친구들은 눈으로만 쫓았다.

 

- 뭐냐

 

액정에 뜬 발신인을 봤는지 세건은 전화를 받자마자 퉁명스럽게 말해왔다.

 

어디야.”

 

지기 시작한 노을빛을 피해 건물 그늘에 선 이사카는 짧게 물었다.

 

- 집 가는 길. ?

 

서린의 마중도 떼어 낸 이사카는 세건에게 바로 말했다.

 

네 집으로 갈게, 좀 이따 보자.”

 

 

 

뭐야 정말. 세건이 보러 가고 싶은데 그래도 우리 형 수능 봤다고 마중 나갔더니 본 체도 않고 먼저 가라고 하고.

 

일찍 들어올 것 같지도 않다. 친구들하고 놀러 나간 것도 아니면서 어딜 간 거람.

 

서린은 투덜투덜 볼을 부풀렸다. 이렇게 된 거 세건이한테 전화나 해봐야지. 세건이네 집은 오늘도 온기 없이 쓸쓸할 거야.

핸드폰을 들어 단축번호를 누르고 서린은 잠시 기다렸다. 그러나 귀에 들리는 건 무미건조한 통화 연결음이 아닌 여성 안내원의 말이었다.

 

- 고객님께서 통화 중이오니…….

 

. 대체 누구랑 통화하고 있는 거야. 뭐야, 이 기막힌 타이밍은. 결국 할 일이 없어진 서린은 흐느적 소파에 늘어졌다.

 

 

 

 

이 뜬금없는 놈은 뭐야.”

 

갑자기 전화하더니 다짜고짜 오겠다 하고 전화를 끊은 이사카 때문에 어이가 없어진 세건은 신발을 대충 벗고 거실 소파에 주저앉았다.

서린이랑 집에 안 가고 왜 찾아오는지, 알 수가 없다. 가뜩이나 심란한데.

 

무엇 때문에 그토록 공부하던 대망의 수능이 끝난 이 날 그가 찾아오겠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세건은 지금 속이 안 좋은 상태였다.

수리는 중간에 두 문제 정도에서 너무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 그 뒤의 몇 문제를 급하게 풀었고, 외국어도 빈칸 추론에서 주춤한 것 때문에 몇 분 안 남기고 정신없이 풀었다.

 

만약 그것들이 다 틀렸다면하아, 속이 영 좋지 않다.

 

머리도 아프고수능 뒤의 해방감은 무슨, 당장 토 해버릴 것처럼 짜증만 날 뿐이다. 시험지 뭉치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뒤 소파에 누운 세건은 그것도 얼마 못 가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짜증을 내며 일어섰다.

 

이사카 이 자식, 별 쓸데없는 소리 하러 온 거기만 해 봐라.

별로 가볍지 않은 발소리를 내며 세건은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곱게 집엔 안 가고 무슨 일이야?”

 

짐짓 시비 걸듯 다짜고짜 하는 세건은 곧 갑자기 덮쳐 오는 무게감에 입을 다물었다.

 

…….”

 

어쩐지 심상치 않은 이사카의 기색에 세건은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정말 놔뒀다간 하루 종일 이러고 있을 것처럼 끌어안은 이사카를 세건은 밀어냈다. 영 힘이 없는 이사카를 세건은 한 쪽으로 밀어둔 채 세건은 일단 현관문을 닫았다.

 

수능 망쳤냐?”

 

기운 빠진 이사카의 모습에 세건은 툭하니 한 마디 던졌다.

그 말에 이사카는 픽 작게 웃었다.

 

아니. 너무 잘 봤어.”

 

그렇게 말하면서 이사카는 이젠 나름 잘 어울린다 생각하는 그의 초록색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이사카의 잦은 행동에 익숙해진 세건은 딱히 쳐내지 않은 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방문 이유나 대라는 그 눈빛에 이사카는 미소를 머금었다.

이 폭탄 발언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계속 다짐하고 다져 왔는데 막상 본인을 앞에 두니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이사카는 짧게 내뱉었다. 일단 저지르고 보자, 라는, 어쩐지 한없이 그의 남동생과 똑같은 생각이었다.

제멋대로 성큼성큼 거실로 들어온 이사카를 어이없는 눈으로 보며 세건은 그 역시 소파에 앉았다.

걸친 외투를 거실 한구석에 던져 놓은 이사카는 소파에 앉은 세건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세건은 이게 또 뭐하는 짓인가 싶어 그를 올려다봤다. 이사카는 말없이 세건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반듯한 이마에 손을 올린다.

 

그리곤 무슨 비밀이야기라도 하듯, 별 거 아닌 것처럼 말했다.

 

나랑 사귀자.”

 

수능 끝나자마자 헛소리를 하는 친구에게 세건은 사랑의 손바닥 매를 선사해주었다. 그러나 세건은 몰랐다.

 

그가 미쳤다고 생각한 친구가 앞으로 마치 제 쌍둥이 동생과 같은 태도로 얼마나 달라붙을지, 사실은 세건이 이사카란 녀석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이제 막 고등학교 졸업을 눈앞에 둔 그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