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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長篇]/Dear my Darling

[DMD] 제 15장 [카노스x엘뤼엔] 너란 남자 上

Such a man                 

Written by Rine in Rine's Side

 

 

너란 놈은 정말…….

 

눈을 몇 번 깜박이자 신계 특유의 이상하리만치 환한 아침 햇살이 창을 통과해 선명히 방 안 모습을 보여준다.

엘뤼엔 그의 취향을 반영한 방 안은 매우 담백한 디자인 그 자체였다.

중앙을 기점으로 바닥을 포근하게 덮은 양탄자, 그리고 침대.

평소라면 그 외에 어떠한 것도 없었겠지만, 오늘은 다르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여기가 엘뤼엔 방 맞아? 라고 물을 정도로 난장판. 이라고 하면 될까. 양탄자 위에 한가득 널린 것은 그림과 숫자가 그려진 온갖 카드들, 기괴한 모양새의 인형들. 한가득 제멋대로 어질러진 방 안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그러나 힘이 들어간 손을 들어 제 옆에 퍼져 있는 사람을 사심을 담아 내리친다.

 

으악!”

 

퍽 소리와 함께 눈을 뜬 것은 검은 머리칼, 검은 눈의 미형의 청년.

요란하게도 데굴데굴 구르면서 일어난 남자가 눈가를 덮는 햇살에 설핏 미간을 찌푸리면서 정수리를 문질렀다. 그의 손가락 틈새로 결이 좋은 남자의 검은 머리카락이 삐친다.

 

? 여기 어디? 엘뤼엔?”

 

자고 일어난 여파인지 어제 혼자 신나서 소리를 지른 여파인지 평소보다 톤이 낮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그가 정수리를 살살 문질렀다.

엘뤼엔은 남자의 말엔 대꾸도 않은 채 그의 흰 손가락이 쓰다듬는 머리로 시선을 올렸다.

햇빛을 받아도 검게만 빛나는, 검은 색 외에 한 치의 이색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검정.

칠흑을 그대로 묻힌 것만 같은 그의 머리카락은 언제 보아도 이상적인 흑색이다.

 

엘뤼엔? 혹시 아직 정신 못 차렸어?”

 

몇 번 혼자 큼큼거리며 목소리를 내던 남자가 말없이 저를 쳐다보는 모습에 엘뤼엔의 얼굴 앞에 손을 흔든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위아래로 손을 살랑살랑 흔드는 모습에 엘뤼엔은 제 팔을 들어 매섭게 그것을 쳐냈다.

 

또 때렸어! 너무하네. 어떻게 볼 때마다 때려.”

 

뭐하자는 거야. 제 앞으로 불쑥 얼굴을 들이밀고 씨익 웃는 모양새에 엘뤼엔은 전혀 개의치 않은 채 그를 밀어냈다. 어리광 부리지마, 소름 돋아. 싸늘하게 일침 하는 모양에 상대방은, 역시나 엘뤼엔의 친구라고 해야 할까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정반대의 모습이지만 공통점이라면,

 

그래서 엘뤼엔 오늘 저녁?”

 

꺼져.”

 

둘 다 지독한 마이페이스라고나 할까.

 

 

 

 

일처리 속도가 평소보다 느린 건 아니다.

다만 어제 평소보다 일정을 빨리 당겨 때려 쳤기 때문에 그만큼 처리하지 못한 일이 남아 있을 뿐이지. 박봉에 서류라고는 매일매일 산으로 쌓이는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의 비애인지라 어디 가서 떠넘길 수도 없는 서류들을 붙잡고 엘뤼엔은 오전 내내 의자에 앉은 채로 벗어나질 못 했다.

 

엘뤼엔님. 급한 결재입니다.”

 

아아? 이거 저번에 돌려보냈잖아. 이딴 얼토당토않은 거 받아주지 말라니까. 이거 누가 보낸 거야?”

 

빛의 신님께서.”

 

상습범 같으니라고. 이렇게 날림으로 한 번만 더 했다간 신전에 감금한다고 전해.”

 

쯧쯧 혀를 차며 하는 말에 천사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엄연히 신의 직위를 가진 이가 할 만 한 언동이 아니라 할 수도 있겠으나, 천사는 토 달지 않았다. 일단 엘뤼엔이 그의 부모 신이기도 해서였고, 무엇보다 진심인 말에 굳이 태클 걸 필요가 없는 신전 내였으니까.

 

이내 다른 천사가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간 서류를 들춰본 엘뤼엔이 인상을 구겼다.

 

이건 또 무슨 쓸데없는 소리야. 이거 누가 보냈어?”

 

그건 드래곤의 신님께서…….”

 

돌려보내. 전부 알아서 하라고 해.”

 

그 뒤로도, 다른 신들로부터 온 대부분의 서류가 엘뤼엔의 칼 같은 말과 함께 퇴짜를 맞았다.

신계가 아무리 태평한 곳이라고는 하지만 이쯤 되면 일이 좀 심각하다.

주변에 둔하긴 하지만 어쨌든 눈치가 나쁘지 않은 엘뤼엔은 누가 일러주지도 않았지만 대강 눈치 채고 있었다.

 

신참이랍시고 놀려보려는 시도라면 안 됐군.’

 

대충 뭐 그런 거겠지. 유치한.

분명 신계에 새로 입성했다 하면 기존에 있던 할 일 없어 넘치던 신들 입장에서야 제법 재밌는 화제 거리니까. 게다가 그 신이 윤회조차 한 번도 겪지 않고 바로 정령왕을 거쳐 온 신참 중의 신참이라면 더더욱 놀리기 좋아 보이겠지.

 

오산이다. 엘뤼엔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신이 되자마자 끝도 없이 쏟아지는 담당 차원의 일거리를 막힘없이 해치우며 하루의 절반을 보냈다.

휘하의 천사들과 집무실에서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냈을까.

누군가가 다가온 기척에 엘뤼엔은 옆에 있던 이에게 담담히 일렀다.

 

밖에 심부름꾼이 와 있다.”

 

공손히 나가는 천사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엘뤼엔은 또 어떤 쓸데없는 일감을 들고 왔는지를 점쳐보며 읽은 서류에 사인을 하고 옆에 올렸다. 서류를 치우자마자 타이밍을 맞춘 것처럼 천사가 돌아왔다.

 

꽃의 신께서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엘뤼엔님.”

 

무슨 용무로 날 불러.”

 

한 번 뵈고 간단한 담소라도 나누는 게 어떻겠냐고…….”

 

정중하게 사양한다고 알아서 보내.”

 

말을 받드는 천사의 표정에 한 치의 동요도 없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과가 되었으니까.

신계에 엘뤼엔이 입성한지 한 달 여. 그간 찾아오는 초대마다 전부 거절한 그이니 이제는 답장하는 멘트도 숙련돼 금세 해결하는 천사들이다.

처음에는 입방아를 찧던 다른 신들도 이젠 엘뤼엔이 초대에 응할 거란 생각을 차차 버려가는 중이니 뭐. 물론 엘뤼엔은 그런 담화가 돌든 말든 몰랐다.

 

저녁입니다, 엘뤼엔님.”

 

아침만 해도 눈을 부시게 하던 햇살이 따스하게 변해 있다.

본격적으로 어둠이 내리기 전인 노을의 시간대였다.

이쯤에서 일정을 마무리하시겠냐고 넌지시 묻는 천사의 우회적인 말에 엘뤼엔은 잠시 펜을 든 손을 멈칫했다.

 

분명히 그 녀석이, 오늘 저녁에 또 보자고는 했지만.

그딴 거 알 바냐.

 

아니. 일하던 대로 한다.”

 

워낙 사건사고가 자주 터지는 행성이고, 그간 담당하던 신도 없었던 터라 신이 되고 매일 같이 하루도 떠나지 않고 일을 해치우는 데도, 이미 쌓인 일만 해도 산이다.

거기에 새로 정리해 놓아야 할 자료들이며 매일매일 새롭게 터지는 사건사고까지 더하면 웬만한 정신력의 신들은 당장에 손 털고 잠적 할 정도의 업무량을 엘뤼엔은 담당하고 있었다.

 

아마 신계에서 그만큼의 일을 담당하고 해내는 신이라면 엘뤼엔을 제외하고 기껏해야 마계의 두 신들 뿐일 거다.

다른 신들도 신이다 보니 담당하는 일은 많지만 엘뤼엔 만큼 제깍제깍 처리하는 법이 없고, 다들 일반적인 구역을 담당하고 있으니 몰려드는 일과 수위가 엘뤼엔을 따라가지 못 했다.

 

물론 이런 상세한 신계의 놀음 내역을 아직 엘뤼엔은 모른다.

알게 된다 해도 그의 생활 패턴에는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겠지만.

엘뤼엔은 잠시 떠올렸던 귀찮은 녀석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리고 다시 서류 처리 작업에 몰두했다. 집무실 내에 사각사각 하는 펜 긁는 소리와 종이 넘기는 소리만이 가득하다.

 

 

 

 

이야아아아아! 엘뤼엔 안 자고 기다렸구나!”

 

너냐. 또 너냐고.

 

들고 있던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엘뤼엔은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쿵쾅쿵쾅 거리면서 뛰어오더라. 익숙하다 못해 징그러운 기운이 신전 앞으로 돌진해 올 때부터 스멀스멀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있던 엘뤼엔은 서류에서 눈을 떼고 펜을 놓았다.

 

꺼져.”

 

딱히 정신을 차렸다고 해서 건네는 말이 자상해 지진 않았지만 자신을 한 번에 바라봤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지 상대방은 거침이 없었다.

 

가자!”

 

거침이 없음은 물론 제멋대로 기질을 훌륭하게 발휘해 누구도 거절 못 한다는 엘뤼엔의 말을 끊어먹는 센스까지 발휘한다.

넉살 좋기로는 세계 정상급일 웃음을 지으며 그, 검은 머리카락의 신은 집무실의 천사들을 둘러보기까지 했다.

 

오늘 퇴근해. 내가 엘뤼엔 데리고 갈 거야.”

 

이봐, 내가 언제 너랑 퇴근한다고…….”

 

!”

 

그딴 소리 직접 입으로 내지 마!

일일이 그딴 건 왜 챙기냐며 엘뤼엔은 어느새 들어선 신전 내의 그가 이용하는 제 방에 서서 그의 팔을 떨쳐냈다. 잽싸게도 제 팔을 붙잡고 그대로 공간이동.

오늘도 이렇게 패턴을 어그러뜨리려는 건가.

 

신 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렇게 죽자사자 일해. 나랑 놀자.”

 

다른 신이랑 놀지 그래.”

 

그래도 오늘은 네 편의 본다고 늦게 왔잖아. 사실은 나도 일이 좀 생겨서 그거 처리하느라 좀 늦은 거긴 한데. 어쨌든 놀자!”

 

놀긴 뭘 놀아. 어젯밤에도 사람을 그렇게 귀찮게 해놓고.”

 

맞다. 엘뤼엔은 피곤하니까 귀찮게 하면 안 되려나. 근데 그러면 내가 심심하거든.”

 

그러니까 기각이다?

그러면서 싱그럽게 웃기까지. 엘뤼엔은 이만 년이 넘게 산 이였지만, 정령계에 국한된 얕은 인생경험이었지만, 그래도 살다살다 처음 보는 인종을 눈앞에 두고도 대범하게 굴 만큼 신경줄이 쇠심줄인 이는 아니었다.

 

이만 년을 살면서 마모되었다고 생각한 현실감각이 날카롭게 되살아나고, 온갖 감정을 느끼는 게 우습게도 신이 되고 나서라니.

요 며칠, 신계에 들어오고 이 남자를 만난 뒤로 온갖 감정들이 엘뤼엔을 꽉 채우기 시작했다.

대개 불쾌하다라거나 귀찮다내지는 짜증난다에서부터…….

 

성가셔.”

 

이런 온갖 마이너스한 감정들.

아마 내가 느끼는 피곤은 다 너로 인한 걸 거다. 엘뤼엔은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천하의 엘뤼엔에게서 이 정도로 격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상대는 역시 만만치 않은 이답게 엘뤼엔의 말은 싸악 무시하고 옷자락을 툭툭 털며 양탄자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오늘은 뭐 할까? 이거, 이 카드 놀이는 어때?”

 

넌 어디서 그렇게 쓸데없는 걸 주워오는 거냐.

말을 삼키며 엘뤼엔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의 머리칼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백금색. 빛 아래서 더욱 선명히 빛나는 천사의 색이다. 정령왕일 때의 푸른 머리카락과는 백팔십도 달라진 채도인지라 엘뤼엔은 때때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멍하니 볼 때가 있었다.

너무 환하다. 싶은 사소한 생각과 동시에 그럭저럭 괜찮군.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드는 아이러니함을 더하며.

 

뭘 그렇게 봐?”

 

제 앞으로 들어오는 손가락이 늘어진 머리카락을 가볍게 쥔다.

눈살을 찌푸린 엘뤼엔은 상대의 손목을 잡아 떼어냈다.

 

만지지 마.”

 

정체도 무엇도 알 수 없는 상대에게 며칠을 답지 않게 휘둘렸다.

휘둘리는 동안 잊고 지내던 감정이라든가 쓰지 않던 두뇌가 활성화 되어 현실로 복귀했지만 그건 저 치하고는 상관없고, 저 놈은 그저 미친놈처럼 달라붙은 거머리.

거머리가 이제 휘두르다 못해 가까이 오려는 것 같아서 엘뤼엔은 싸늘하게 일침 했다.

 

까칠하긴. 내 머리랑은 정반대네? 이거 봐. 완전 시꺼멓지? 사실 처음에 주신 만났을 때 검은색이 가장 좋다고 했거든.”

 

아마 마족 아니면 블랙 드래곤이나 어울리지 않을까?

덧붙이는 말에 엘뤼엔은 자연스럽게 미간을 좁힌 채로 대꾸했다.

 

마족이라면 귀찮아.”

 

? 아아. 엘뤼엔은 바이톤 담당이었던가? 마족 녀석들 어때?”

 

어떻고 자시고 도대체 그런 단순한 것들은 왜 만든 거지. 게다가 바이톤엔 왜 넘어 오냐고.”

 

그 말이 뭐가 웃겼는지 남자가 킥킥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긴 왜 웃어? 남자가 뜬금없이 뭘 그리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어 엘뤼엔은 그저 미친놈 바라보듯 눈을 흘겼다.

 

좀 단순 멍청하긴 하지 애들이. 맞다, 일 잘 하고 있다더라 엘뤼엔. 한 달 밖에 안 됐는데 마족들이 설설 긴다며?”

 

단순한 녀석들에게 제일 쉽게 각인 되는 건 힘의 상하관계니까. 공포정치가 제일이지.”

 

그렇게 말하며 내키지 않는 다는 기색을 어린 채로 그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신이라 하면,

완전무결 그 자체라 생각하겠지만 어쨌든 신도 주신 아래 차원을 구성하는 생명체들 중 하나. 당연한 말이지만 타격을 입기도 하고 피곤을 느끼기도 하고 취미생활을 즐기기도 한다.

물론 신체에 타격을 입힐 존재가 손에 꼽고 피곤을 느끼는 것 역시 신의 성격으로 좌지우지 되며 취미생활 또한 두말 할 것 없지만 어쨌든 그런 이유로 신전 내에는 집무실 외의 잡다한 공간들이 꽤 된다.

 

전적으로 자신의 영역인 신전 내의 방을 어떤 용도로 쓸지는 각 신의 재량인 만큼, 학문의 신처럼 장서관과 다를 바 없게 만들어놓고 두문불출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꽃의 신처럼 신전 하나를 정원으로 만들어 놓는 이도 있다.

 

그렇게 보았을 때 아무것도 없는 엘뤼엔의 신전 내는 그야말로 삭막함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그나마 양탄자라도 깔아놓은 게 어딘가 싶지만이것도 내가 맘대로 갖다 놓은 거잖아? 이 황량한 곳 좀 어떻게 할 생각 없어?”

 

언제 본 사이로 저렇게 친근하게 구는지, 정령왕 시절을 함께 거친 몇 안 되는 이들도 저렇게 넉살 좋게 다가오지 않건만 어디서 튀어나온 놈인지 끝도 없이 속 좋게 군다.

그게 신기하기도 하고 하나하나 끄집어내기도 귀찮아서 엘뤼엔은 그대로 무시한 채 고개를 젖혔다.

 

보통 담당 영역이 취미로 가는데형벌의 신이니 어쩔 수도 없고. 나랑 같이 인간계 탐험이나 다닐래?”

 

엘뤼엔이 대답을 안 해도 능숙하게 말을 돌려 연신 혼잣말을 이어간다.

어떤 의미로는 참 대단한 인간이라 생각하며 엘뤼엔은 내심 감탄 했다.

미네르바도, 전대의 트로웰도, 지금의 트로웰도 이런 타입은 없었는데. 물론 성격 급한 이프리트들이야 차치하고.

정말이지 엘뤼엔에게 있어선 살다살다 처음 보는 놈, 이다.

 

이미 제멋대로 앉아서 겉옷을 벗어 던지고 카드게임 하자, 카드, 카드, 카드-’ 하고 떠들고 있는 상대방에게 눈을 돌려 지긋하게 바라본다.

온통 검은 색 일색. 흰 얼굴에 항시 맺혀 있는 것은 엘뤼엔으로서는 살면서 지어본 적이 없는 웃음. 언동과 움직임이 날래고 특히 말하는 것은 화제 돌리기가 능숙하다 못해 정말로 제멋대로. 가끔씩 튀어나오는 이상하게 박식한 신계 관련 지식들.

신력을 마음대로 다루는 능숙함. 거기에 계속해서 숨기고 있는 모양인지 잘 갈무리 된 생명체 특유의 기척. ……바보냐고.

 

신계의 신들은 할 일이 더럽게도 없는 모양이지?”

 

엘뤼엔은 그렇게 뚫어져라 보면 부끄러워~’ 하고 저 혼자 생글생글 웃고 있는 남자에게 툭 던지듯 물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 말없이 있다가 던진 말에 남자가 으음?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신계는 변화가 없는 세계. 전 차원을 뒤져도 여기만큼 지루하고 재미없는 곳은 없을 거야. 게다가 재미있는 놈이라곤 하나도 없으니까. 할 일은 다들 많은데, 다들 잘리지만 않으면 돼가 모토인 것 같고.”

 

그 중에서도 선두를 달리는 게 너인가.”

 

그 말에 남자가 호들갑을 떨며 손뼉을 마주쳤다.

눈동자가 반짝반짝 해지면서 목소리가 커진다.

 

난 절대 아냐! 내가 얼마나 일을 성실히 하는데! 사실 내가 맡은 게 하루라도 밀리면 혼돈으로 달려가는 업무라 소홀히 하고 싶어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니까. 주신께서도 이런 나의 노고를 알면 그만 신에서 은퇴하게 해주셔도 되는데 말이야. 요 몇 천 년 간 계속해서 인간계 윤회 보내달라고 요구하고는 있는데 차일피일 대답을 미루기만 한다니까. 그래서 말이지 엘뤼엔.”

 

재잘재잘 발음 한 번 엉키지 않고 순식간에 다다다 대답을 터뜨린 남자가 돌연 엘뤼엔이 앉아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불쑥 앉은 채로 엉덩이 걸음. 단번에 엘뤼엔의 앞에 도달한 그가 눈꼬리까지 접으면서 정말로 환하게 웃어 보였다.

순간 엘뤼엔이 밀어내는 것도 생각지 못하고 굳을 정도로 환한 웃음이었다.

 

네가 나타나줘서 기뻐. 신이 돼줘서 고마워.”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모두를 홀려 버릴 웃음을 코앞에서 마주하고서도 엘뤼엔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린 것처럼 수려한 이목구비 그대로 굳은 채 잠시 뒤엔 ?’ 하고 어이없다는 감정을 띄운다. 엘뤼엔으로선 이리도 또렷한 감정을 표현하는 게 지난 정령왕 생애를 통틀어서도 얼마 없는 일이지만 이 남자는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너무도 쉽게 끄집어낸다. 자신이 지금 얼음을 둘렀다는 평과는 정반대의,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자각하지 못한 채 엘뤼엔은 낮게 읊조렸다.

 

빌어먹을 놈. 놀려먹을 재미있는 게 나타나줘서 고맙다 이거냐.”

 

너란 녀석 머릿속은 대체 뭐가 들어있는지.

쯧쯧 혀를 차는 모양까지 보고는 남자가 크게 고개를 도리질 쳤다. 숫제 엘뤼엔의 손을 덥썩 붙잡고 가까이 얼굴을 들이민다.

엘뤼엔이 눈을 깜박이든 당황을 하든 신경도 쓰지 않는 신경줄의 남자가 또렷하게 말했다.

 

정말로 좋아.”

 

…….

기가 차서 그대로 한 마디 하려는 기색을 빨리도 읽은 그가 크게 손뼉을 쳤다.

경쾌하게도 부딪힌 소리와 함께 남자가 싱글 웃었다.

 

냐하하, 그럼 우리 재밌게 게임이나 할까?”

 

꺼지라고!”

 

안 들려 안 들려~”

 

 

 

 

해서 이하와 같습니다. 현재 마신들 쪽에서는 어떠한 연락도 오지 않은 상태이며, 엘뤼엔님의 신전에서 감금하고 있는 데다 사고를 일으킨 곳이 바이톤이기 때문에 처벌권은 잠정적으로 엘뤼엔님께 있다고 사료됩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말이지.

엘뤼엔은 서류를 앞에 두고 흰 손가락으로 집무 책상을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렸다.

표정은 굳은 채였다.

그의 앞에 시립하고 있는 수석 천사도 굳은 표정이었다.

감정 표현이 없는 것은 평상시와 같은 특징이지만 지금의 기류는 조금 달랐다.

 

어이가 없군. 마신에게서 아무런 언질이 없다는 건 알아서 하라는 뜻인가? 영역이 아니니 상관 안 하겠다는 건가. 이런 쓰레기를 일찍 죽여 놓지 않고 뭐 하고 있었던 거지?”

 

제정신이 아니군. 나 같으면 당장 죽여 버렸을 놈을 아직도 살려놔서 일을 치다니.

그가 들여다보고 있는 서류는 당장 아침에 속달로 책상에 놓인 안건이었다.

신상 정보와 사건 개요 등이 정리된 서류가 의미하는 내용은 이와 같았다.

 

마계에서도 어린 마족들을 비롯해 마족들을 무차별적으로 대량 살해하던 놈이 자숙 형벌 기간이 풀렸다. 풀려난 놈이 바이톤으로 건너와서 설쳤다.

덕분에 바이톤에 대량 학살에 가까운 사태가 일어났다. 마족들이 가장 밀집해 있는 지역 중 하나인 서부 숲을 비롯해 인근에 위치해 있던 인간들까지 전부 몰살당했다.

그리고 그 주역이신 몸은 현재 엘뤼엔의 사제들을 비롯한 인간들에게 제압되어 바이톤에 있는 엘뤼엔의 신전에서 감금 중이다.

 

논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다. 마신 쪽에 보고할 것도 없어. 즉결 처분이다.”

 

이 한 놈으로 인해 사라진 생명만 해도 세기 힘들 정도다.

단번에 바이톤 인구 밀도와 수치를 뒤집어놓고 생태를 파괴시켜 놓은 미친놈을 엘뤼엔은 절대 곱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시끄러운 곳을 더욱 정신 사납게 만들어 놨다 이거지.

서류를 넘기며 엘뤼엔은 1차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마계에서 마신이 극한의 제재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 혀를 찼다. 온정이라도 베푼 건가. 왜 화근을 미리 죽여 놓지 않아서 일을 크게 만든 거지?

 

마계를 담당하는 신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사실 마신뿐만 아니라 다른 신들도 모른다) 뭐라 유추하기가 어렵지만 정말로 무르고 마음에 안 드는 조치였다, 일전의 사태에 대한 마신의 대처는.

 

수십 가지 검은 감정으로 도배되다시피 한 마음으로 슥슥 펜을 놀린 엘뤼엔은 그 뒤 천사들과 약식 회의와 같은 처리를 논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십니까 엘뤼엔님.”

 

잠시.”

 

짜증나고 답답해서 일을 할 기분이 아니다.

수치와 통계는 매우 단조롭지만 수치와 통계만으로 치부될 수 없는 게 생명인데.

그것도 하필이면 내 담당 차원에서.

애초에 마신이 전의 사건 때 죽여 놓았으면 됐을 죄질의 놈이.

 

기분 더럽군.”

 

그나마 차차 정리되어 가던 바이톤의 질서도 구멍을 뚫어 놓은 셈이 아닌가.

어찌 보면 엘뤼엔은 신이 되고 열심히 정리해놓았던 것을 또다시 정리해야 하는 지점을 맞고 있었다. 게다가 마족이 죽인 인간들 중에서 다른 신의 사제인 놈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어서 오늘 아침 보고를 받기 무섭게 다른 신들에게서도 온갖 쪽지가 날아오고 있었다.

자신의 신전 밖, 영역의 나름대로 정원이라 부를 곳의 대리석 조각품을 앞에 두고 엘뤼엔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어느 차원에서도 볼 수 없는 성스러운 햇볕이 내리쬐는 풀밭 위. 하얗다 못해 빛나는 덩굴 조각 앞에 가만히 서 있는 백금발의 미남이라니, 신이라는 존재에 그야말로 더없이 어울리는 모습이지만 실상 하고 있는 생각은…….

 

여어 엘뤼엔!”

 

어떻게 죽이지.”

 

?!”

 

. 이런 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재주도 좋게 엘뤼엔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흑발의 남자는 자연스럽게 엘뤼엔을 부르다가 그의 입에서 떨어지는 짧고 간략한 말에 과장되게 기겁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엘뤼엔에게서 진지한 모습이 엿보인다.

진짜 어떻게 죽일까 벼르고 있던 중이었나. 남자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살인은 추천하지 않는데 엘뤼엔.”

 

넌 어디서 튀어나왔어.”

 

내뱉는 말이 매우 불퉁하다.

안 그래도 원래 서늘한 분 주변에 불친절의 기운이 평소보다 배는 어려 있다.

그러나 남자는 꿋꿋했다.

 

엘뤼엔이 보고 싶어서 사랑의 힘으로?”

 

어떻게 죽고 싶지?”

 

냐하하 미안.”

 

허리를 짚고 있던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긁적이며 남자가 웃었다.

대낮부터 쳐들어온 모습에 안 그래도 기분이 더러워져 있던 엘뤼엔은 절대로 친절하지 않았다.

 

엘뤼엔님. 지옥의 신 크라제님과 학문의 신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둘이 무슨 사인데 여기까지 나란히 찾아온다는 거지?”

 

각각 다른 이유로 오셨습니다. 모실까요.”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난 천사지만 남자도, 엘뤼엔도 전혀 놀라는 눈치가 아니다.

약하게 눈썹을 찌푸린 엘뤼엔이 말했다.

 

지옥의 신만.”

 

엘뤼엔님. 곤란합니다.”

 

젠장. 학문의 신이란 놈은 운도 좋군.”

 

평소라면 둘 다 들일 리가 없겠지만 지금은 마침 찾아온 지옥의 신과 할 얘기가 있다. 타이밍 좋게 엘뤼엔이 출입을 허가할 때에 나타났으니 학문의 신의 운은 매우 좋다 할 수 있었다. 물론 엘뤼엔을 아는 사람들 입장에서 볼 때.

천사는 다시 조용히 사라졌다.

남자가 물었다.

 

웬일이야. 다른 녀석도 만나주고.”

 

나만의 것 아니었어 엘뤼엔? 남자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엘뤼엔은 차갑게 닥치라고 대답했다.

 

쓸데없는 헛소리 하지 마.”

 

차갑다. 기분 단단히 틀어졌네. 왜일까~”

 

이 때려주고 싶은 톤의 목소리는 또 뭐야. 엘뤼엔은 웃고 있는 남자를 옆으로 가볍게 밀었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옷의 감촉과 신체의 감촉.

타인의 느낌이 오늘따라 더욱 불쾌하게 느껴지는 건 뭐지.

-애초에 다른 사람에게 닿은 적이 거의 없어서 모르겠지만.

 

기분 나쁘게 지껄이지 말고 가라.

 

으헉!?”

 

느껴지는 기척에 축객령을 내리던 엘뤼엔의 말을 자른 건 숨이 틀어 막히는 고함이다.

남자를 붙든 채 서 있던 엘뤼엔은 의아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 , ……!”

 

숫제 부들부들 떨며 이쪽을 쳐다보는 남자의 눈은 매우 커져 있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반응에 엘뤼엔은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 무표정하게 물었다.

 

뭐지?”

 

왜 여기 있는 거지!”

 

학문의 신이 아닌가? 말은 똑바로 해야지.”

 

아는 사이인 것처럼 태연하게 대답한 것은 엘뤼엔의 옆에 있던 흑발의 남자다. 학문의 신이라는 직책을 가진 남자에게, 자신의 검지를 입가로 가져가며 눈을 찡긋하는 모습에 남자가 기겁을 해서는 비척비척 뒤로 물러섰다.

 

, 난 이만 가보겠네!”

 

여기까지 온 이유도 꺼내지 않고 줄행랑치다시피 사라진다.

뭐 하자는 거야?

엘뤼엔의 미간이 찡그려지든 말든 정원은 이미 세 사람 밖에 남지 않았다.

 

처음 보는군, 형벌의 신. 나는 지옥을 담당하고 있는 크라제라 한다.”

 

동행하다시피 한 다른 신과는 반대로 지옥의 신은 매우 덤덤했다.

이지적인 용모의 남자는 차분히 다가와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나름대로 오랜만에 보는 이가 여기 있는 건 조금 놀랐지만.”

 

크라제의 눈이 엘뤼엔의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향했다.

남자는 싱글싱글 웃으며 양 손을 들어보였다.

 

야아. 오랜만. 여전히 고생 많지?”

 

특히나 오늘 같은 날은. 그대도 한가한 처지는 아닐 텐데? 같은 이유로 여기 와 있는 것인가?”

 

. 아니야. 그러니까 조금 비밀로 해줘.”

 

뜻 모를 대화가 물 흐르듯 지나간다.

엘뤼엔은 팔짱을 끼고 섰다.

크라제에게 넉살 좋게 웃어 보인 남자가 엘뤼엔을 돌아봤다.

 

난 이만 가볼게. 지금부터 바빠질 것 같아서. 엘뤼엔, 너무 스트레스 쌓아놓지 말고?”

 

꺼져.”

 

그럼 나중에 봐!”

 

쾌활하게 말하며 남자는 부지불식간에 엘뤼엔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가볍게 타인의 신체와 웃음소리가 닿은 뒤 방금 전 사라진 학문의 신처럼 감쪽같이 사라진 남자의 기척.

뒤늦게 신력을 파직파직 일으키는 엘뤼엔과 다르게 크라제는 담담한 눈으로 남자가 사라진 자리를 잠시 응시했다.

 

굳이 내게 경고할 필요는 없었을 터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