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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長篇]/Dear my Darling

[DMD] 제 15장 [카노스x엘뤼엔] 너란 남자 下

 

 

 

밤이 깊었습니다. 엘뤼엔님.”

 

신경 쓰지 마라.”

 

지옥의 신이 다녀가고 나서는, 일사천리인 그의 성격답게 일이 진행되었다.

가장 먼저 구금된 마족의 처우를 결정지었고, 그로 인해 발생한 피해 현황에 대해 당장 보고서를 올릴 것을 지시한 엘뤼엔은 이내 이 사건에 얽힌 사제들 탓에, 신계 입성 후 처음으로 다른 신들을 보게 되었다.

 

, 그들과 보게 된 이유는 언쟁 때문이었지만.

화기애애한 친목이라든가 앞으로의 신계 생활을 염려한 양보라든가 그러한 것 따위가 엘뤼엔에게 고려 대상이 될 리가 없었다.

자신들의 피해를 들먹이는 신들을 단칼에 즉답으로 되돌려 보낸 엘뤼엔은 슬금슬금, 혹은 열이 뻗친 채의 신들이 전부 나가고 나서야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아침부터 짜증으로 가득차 돌아다녔더니 이젠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고개를 조금 뒤로 젖히고 몸을 이완시키며 허공을 응시하자, 은은한 불빛마저도 아프게 눈을 찔렀다. 정말 피로가 쌓이긴 쌓였나보군, 가볍게 생각하며 방 안의 조명을 낮추고, 이대로 퇴근해버릴지 처리하지 못한 다른 일들을 좀 더 볼지 생각하려던 찰나, 천사 하나가 그에게 고했다.

 

엘뤼엔님. 마신께서 찾아오셨습니다.”

 

?”

 

얼굴을 비친 크라제와는 다르게 뜻대로 하라며 아무 기별도 없던 마신이 이 밤중에 갑자기 왜 찾아온단 말인가. 일 처리 때문이라면 이미 너무 늦은 시각인데?

 

제멋대로에 속을 알 수가 없다며, 근데 또 거절하지는 못할 타이밍이라 엘뤼엔은 조금이나마 진정되어 가던 속이 뒤집히는 걸 느꼈다.

 

이리로.”

 

방금 전까지 찾아온 신들을 상대하고 있던 곳이 바로 여기 응접실인지라, 엘뤼엔이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신계에 들어오고 나서 단 한 번도 신전에 다른 이를 들인 적이 없었는데, 오늘 일 때문에 본의 아니게 신들의 면면을 보았다.

아마 당분간은 그들의 화제가 자신일 것임을 뻔히 알아 또다시 귀찮아졌다.

한숨을 깊게 내뱉자 갑자기 나타난 방정맞은 목소리가 말했다.

 

하핫. 엘뤼엔 많이 힘들었나봐.”

 

본의 아니게 매일 보다시피 한 남자의 목소리에 엘뤼엔은 미간을 찌푸렸다.

온다던 마신은 안 오고 저놈은 또 언제 온 거야.

그래도 가장 익숙하다고, 엘뤼엔은 굳이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말했다.

 

알면 꺼져.”

 

나름대로 권유한 것이지만, 엘뤼엔도 남자가 순순히 사라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 말을 끝으로 자세를 바로 할 뿐이었다.

남자는 엘뤼엔의 바로 옆 의자로 와 앉고는 생글생글한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인사하게 돼서 기분이 좋지 않네. 잘 부탁해 엘뤼엔. 나는 마족의 태초부터 그들을 담당하고 있는 마신 카노스야.”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본 엘뤼엔은, 순간적으로 욕을 뱉을 뻔했다.

 

 

 

 

하잉.”

 

엘뤼엔이 침묵하고 있자, 그 분위기를 만든 장본인은 미안함 때문인지 애써 평소 같이 경박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엘뤼엔은 그 소릴 듣자마자 냉정하게 쳐냈다.

 

집어쳐.”

 

.”

 

입을 다물고 눈치를 보는 남자는 그러니까, 주신이 빚은 최초의 정령왕 중 하나이자 마족을 창조한 이, 마신 카노스다.

신계의 시작부터 존재해온 신이자 두문불출과 기행의 대명사. 바로 그 마신.

 

네가 마신이라고?”

 

하하. 그렇다네. 잘 부탁해.”

 

이제와서 나타난 저의가 뭐지?”

 

음 그야……. 그럴 일이었잖아.”

 

카노스의 장난스럽기만 하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생글생글 웃고 있던 기색이 착 가라앉고, 검은 눈동자가 엘뤼엔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렇게 갑자기 인사하고 싶진 않았어. 아니 뭐놀래키려곤 했지만 이런 상황은 정말 예상치 못했지. 더군다나 네가 담당하고 있던 차원에 입힌 피해는 정말 할 말이 없어. 미안하다.”

 

마신이란 놈도 뇌가 있다면 큰소리는 못 치겠지, 라고 중얼거리긴 했지만 이렇게 순순한 태도는 생각지 못했던 터라 엘뤼엔은 잠시 당황했다. 굳은 표정 덕에 티 나진 않았지만.

카노스는 제 나름대로 생각을 준비해온 듯 엘뤼엔의 침묵에도 말을 이었다.

 

내 안일함으로 수많은 생명이 죽었지. 사실 명계에도 이미 다녀온 길이야. 그래서 더욱 할 말이 없어.”

 

카노스는 몇날며칠을 누구보다 어린애처럼 굴던 사람과 같은 얼굴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고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죄책감 어린 얼굴로 말했다.

그의 앞에 앉아 표정 변화 없이 바라보던 엘뤼엔이 입을 열었다.

 

어째서 죽이지 않았지?”

 

그 마족은 이미 너무 위험한 잔학성으로 인해 일을 친 적이 있었다. 아무리 마족이 잔혹하고 도덕의 룰이 없는 종족이라 하지만 종의 보존을 위한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선은 있는 법이다. 오늘 아침 사건에 대한 최초 보고를 받을 때 같이 받은 사건 주범의 정보에서도 이미 이 마족은 이전에 한 번 제재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

카노스는 이 질문을 예상했는지 곧바로 대답했다.

 

미운 자식이라도 내 자식이라 너그러웠지.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엘뤼엔은 그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해 잠시 눈썹을 치켰다.

그러나 카노스는 더 이상의 부연설명 없이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알면서 왜 화근을 남겨두었지?”

 

그래도 기대했던 거지 나는.”

 

그런 해이한 온정주의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쓴웃음을 지은 채로 탄식하며 답한 카노스는 차갑기까지 한 단호한 말에 아픈 얼굴을 해보였다. 그것 또한 의외의 모습이라 엘뤼엔은 드러내지 않은 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고작 이만 년의 세월을 보낸 엘뤼엔조차 무료함에 지겨워하며 감정이 마모된 채 사는데,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세월을 보냈을 이가 드러내는 회한과 진심이 진솔하고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카노스는 그런 엘뤼엔을 보는 둥 마는 둥 말했다.

 

고쳐야 할 텐데 고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자신도 아는 문제인 듯, 카노스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엘뤼엔은 그 말에는 더 이상 답하지 않은 채, 잠시 뒤 일의 경과와 처벌을 알려주었다. 카노스는 별다른 덧붙임 없이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내심, 마신이란 작자가 제멋대로 난동을 치면 그건 또 얼마나 귀찮을지 걱정했던 몇 초가 무색하게도 카노스는 이해도 빠르고 납득도 빨랐다.

물론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이 경박하고 시끄러운 무대포가 바로 그 마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지만.

요점만 정리한 사건 개요 전달이 끝나자, 엘뤼엔은 주제를 바꿨다.

 

마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하핫. 내가 주신님하고 좀 친해. 부탁 좀 했지.”

 

그래. 그간 재밌었나 마신? 신참 신을 놀려먹느라 생의 낙이 생겼었겠군.”

 

에이 내가 뭘 놀렸다고 그래. 내가 진짜 놀릴 거면 이렇게 안 했지. 학문의 신 도망가던 거 못 봤어?”

 

학문의 신?”

 

생각해보니 오늘 낮 찾아왔던 학문의 신이 그를 보자마자 허둥지둥 도망갔던 게 떠올랐다. 그때는 크라제와 얘기하느라 이상한 놈으로 치부한 채 잊어버렸는데 생각해보니 엘뤼엔의 옆에 있던 이 남자를 보고 그랬던 것이로군.

 

평판이 왜 그 모양이야?”

 

내가 뭘.”

 

내가 뭘~ 말끝을 끌면서 싱긋 웃는 얼굴이 그래도 조금 괜찮아보였다.

엘뤼엔은 그 꼴이 마음 편하면서도 거슬려서 옛적의 일을 끄집어냈다.

 

그런데. 그럼 이제라도 해명해주지 그래.”

 

?”

 

왜 내게 키스했던 거지?”

 

이건 생각지 못했는지 카노스가 입을 떡하니 벌리고 정지했다.

엘뤼엔은 별다른 기색 없이 심상하게 재차 물었다.

 

마신임을 밝힌 김에 다른 것도 정리하고 넘어가지. 무슨 이유였나?”

 

……그동안 한 마디도 안 하다가 갑자기 왜!!”

 

물어봤자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았고그간 네놈이 너무 정신 사납게 굴어서 잊기도 했고…….”

 

왜 그랬었는지 되짚어본 엘뤼엔이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혀를 찼다.

분명 언제나 냉철하고 당황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생각해왔는데, 되돌아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평소라면(정령왕 시절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을 그냥 넘어가거나 보류할 만큼, 새로운 신분과 환경이 정신없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이게 다 일 안 하는 신계 농땡이 상급신들 때문이라며 엘뤼엔이 짜증을 쌓았다.

엘뤼엔의 생각이 다른 곳으로 샌 것을 알 리가 없는 카노스는 당황한 그대로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낯짝으로 키스한 장본인 치고는 너무 순진한 반응이었다.

 

까먹은 줄 알았는데…….”

 

그걸 까먹을 리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하냐며 엘뤼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방금 전까지는 그래도 제법 의젓하고 똑똑하게 굴던 마신은 다시금 푼수 같고 멍청한 모습으로 돌아간 채 혼자 파닥파닥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엘뤼엔은 딱히 더 물을 것도 없어 마지막으로 물었다.

 

더 남길 말은?”

 

날 죽이려고?! 기다려봐! 이유, 이유가 있어!”

 

생각해보니 이유가 있어도 죽일 놈인 건 변하지 않는군.”

 

여태 아량 있게 굴었던 모습은 집어치운 채 변모한 엘뤼엔이 신력을 응축시켰다.

그의 옆으로 귀기 어린 듯 새파란 힘이 파직거리는 모양이 굉장히 위협적이라, 카노스는 도망가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엘뤼엔 어쨌든! 넌 내꺼야!!”

 

그만 뒤져라.”

 

한심한 소리 다 듣는 다는 듯 가차없이 날아간 신력은 허공을 통과했고, 이미 카노스가 사라질 걸 분하게도 예측하고 있던 엘뤼엔은 애꿎은 신전 벽을 맞추기 전에 힘을 소멸시켰다.

 

그간 어떻게 평온히 넘어가줄 수 있었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분한 기운이 올라왔다.

그간 내가 힘들기는 했었나보지? 이제야 제대로 감정을 느끼다니.

희로애락이 적은 것과 없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엘뤼엔은 그에게 생명체의 감정을 되찾아준 카노스를 향해 이를 갈며 몸을 편히 젖혔다.

저놈 다시 만나기만 하면 지옥으로 던져버리겠다며 다짐하는 얼굴이 그래도 생기가 어려 있었다.

 

바야흐로, 엘뤼엔과 카노스의 지긋지긋하고도 열화와 같은 로맨스의 시작이었다.

 

 

 

# 15 너란 남자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