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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長篇]/Music Hall Series

[오시가쿠] 그대를 위한 광시곡 【3】

You are my First love            

Written by Rine in Rine's Side

 

 

 

고요한 교정. 신이 내린 선물이라는 클래식의 선율만이 떠도는. 웅장한 문화재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대학교 교정에는 현재, 유럽에서는 드물게도 동양인의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가 단정한 걸음걸이로 뜻 모를 우아한 문양이 새겨진 도보를 걷고 있었다.

 

보편적인 체구가 작은 동양인에 속하지 않는 우월한 키에, 은발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순식간에 호감을 갖게 하는 첫인상의 순한 눈동자.

성격을 짐작하게 해주듯 유하고 바른 몸가짐으로, 베를린 음악대학교 기악과 바이올린 전공 학생인 오오토리 쵸타로는 지나가다가 안녕, 오오토리!’ 하고 인사하는 학교 학생들에게 화답해주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쇼팽을 좋아하는 제 취향을 어김없이 드러내듯 팔엔 한가득 쇼팽 팜플렛이 안겨 있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표현력으로 까다로운 교수들에게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바른 생활 남자가 향하는 곳은, 이 대학교에서 손꼽히는 인재들이자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이들이 있는 곳.

 

현악 4중주(String Quartet) 모임 탄호이저(Tannhouser).

음악 좀 배웠다는, 아니, 클래식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금세 어디서 들어봤는데?’ 싶을 고전의 이름을 그대로 갖다 박은 이름.

 

초기만 해도 신랄하게 유치하다고 까였던 이름이고, 지금도 그들을 싫어하는 이들은 비아냥을 담아 부르는 이름이지만 정작 그 이름을 정한 안하무인께서 마음에 들어 하다 못해 나오는 족족 다른 이름 후보들을 기각 놓는 탓에 구성원들에겐 반항의 기미도 사라진 채였다.

 

각 전공 교수들이 입을 모아 우수하다고 칭찬하는 이들이건만, 구성원들의 성격은 전형적인 편견-예술가는 괴짜-를 넘어서서 바로 그 괴짜들인 예술가가 모인 이 대학교 안에서도 또라이로 불리는 이들로, 차분히 빈 연습실(이제는 탄호이저 전용인 격)의 문을 여는 오오토리가 개중 가장 정상으로 불리는 이다.

 

오시타리 선배, 먼저 와 계셨네요.”

 

연습실 안에 홀로 앉아 있는 선객의 모습에 오오토리가 부드럽게 눈가를 휘며 인사를 건넸다. 혼자 앉아서 뭘 하는지 연신 핸드폰 액정만 불태울 것처럼 쳐다보고 있던 오시타리가 눈을 돌렸다.

 

어야. 그기 다 뭐꼬?”

 

. 쇼팽이에요. 빌렸어요.”

 

메고 있던 바이올린 케이스를 조심스럽게 그랜드 피아노 위에 내려놓은 뒤, 오오토리가 팜플렛들을 들고 옆의 의자로 와 앉았다.

 

어두운 색으로 칠해진 팜플렛들을 내보이며 오오토리가 빙긋 웃는다.

 

연습곡은 베토벤이지만, 전 피아노도 치니까요. 합주는 아니지만 간단히 선율을 따보려고요.”

 

바이올린이 더 좋지 않았다면 분명 피아노를 전공했을 거라 말하는 오오토리의 바이올린 외의 특기는 피아노.

그것도 꽤 수준급이다. 도대체 연습하는 때도 없는 것 같은데 실력이 녹슬기는커녕 풍미가 더해 가는 연주에 시시도가 의아함을 표한 적도 있었다.

 

누구한테 빌렸는데?”

 

, 야나기 선배요.”

 

야나기? 오시타리의 표정이 잠시 떨떠름해 진다.

베를린 음대에서 발에 치이는 게 천재라지만, 야나기는 그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기로 유명한 피아노 전공의 톱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아토베와 라이벌 구도인 유키무라의 친우였다.

 

용케도 잘 지내는구마.”

 

야나기 선배랑은 딱히 부딪힐 일도 없는 걸요. 오히려 굉장히 예의 바르고 정중하신 선배라서 잘 통해요.”

 

그렇게 말하는 오오토리를 보며 오시타리는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기야, 주변 사람들만 아니면 저 녀석은 매우 바르고 성실하게 대학 생활을 하고 있었겠지.

그러나 이 탄호이저인지 탄홀랑가인지 하는 모임에 속한 이상 학교 생활에서의 평화라는 건 일찌감치 포기해야 하는 단어다.

 

그런데 오시타리 선배.”

 

혼자 암만, 오오토리가 착하긴 하제하고 딴생각에 빠져 있던 오시타리를 오오토리가 차분하게 불렀다. ? 오시타리가 돌아보는 얼굴을 말을 않은 채 유심히 살피며 오오토리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표정이 많이 안 좋아요.”

 

저의 표정을 살피는 오오토리의 물음에 오시타리가 눈을 끔벅였다.

내가 그렇게 표정이 잘 드러나는 편인가?

 

한편, 오오토리는 제 말에 더욱더 멍청한 표정을 짓는 선배의 모습에 더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어 물었다.

 

혹시 어디 아프세요? 아니면 교수님한테 불려가기라도…….”

 

아이, 그런 기 아이다.”

 

생각보다 니 눈치가 빨라서 내 잠시 놀란 거데이. 오시타리가 웃으며, 그러나 평소의 자신감 있는 미소가 아닌 풀죽은 미소로 대답했다.

그런 거 아니면 왜 기분 안 좋으신데요? 오오토리가 그렇게 묻고 싶은 듯한 표정으로 오시타리를 쳐다봤다.

 

, 지난주에 교포 파티 갔었제?”

 

? , 프랑스요? 네에, 시시도 선배랑 갔었는데요.”

 

잠깐 그가 묻는 말에 대해 생각하느라 텀을 두고, 오오토리가 대답했다.

어라, 그때 오시타리 선배도 가시지 않았나요?

혹시 거기서 뭐 하든? 이런 걸 물으려는 건가 싶어 묻자, 오시타리가 순간 굉장히 밝아진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그래! 내가 살다살다 시시도한테 그리 고마운 날이 없었다 아이가!”

 

뭘 보신 거예요, 선배.”

 

흡사 이대로 승천할 듯이 과격한 기세로 돌변한 모습에 오오토리가 얼떨떨하게 말했다. 방금 전까지 한숨 푹푹 쉬면서 다 죽어가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화색이 돌아서는 싱글싱글 웃는다.

 

뭘 봤기에 저렇게 좋아하는 건가 싶어 오오토리가 고개를 갸웃 움직이고, 그 말에 데미지라도 입은 듯 오시타리는 으윽,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선배?”

 

또다시 심란해진 모습에 오오토리가 당황한 목소리를 낸다. 몇 초 간격으로, 그야말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사람의 표정변화를 보여주는 오시타리의 모습에 항상 침착하고 유한 이 후배는 드물게도 매우 당황해 있었다.

 

선배 그, 누구더라, ! 무카히 씨 만나지 못 했어요? 그래서 그래요?”

 

얼마 전, 시시도가 오시타리를 약 올리며 언급했던 이의 이름을 거론하자 오시타리가 침울한 어깨를 움찔 거렸다. 진짜 그런 거라면 안 됐다고 생각하며 위로하려고 입을 여는 오오토리의 말을 자르고, 오시타리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은 오오토리를 멍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차였다 아이가.”

 

……?”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에휴, 한숨 쉬는 오시타리를 앞에 두고, 오오토리는 말을 잇지도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차여요? 뭘 차여? 원래 사귀던 사이는 아니었으니 설마 만나자마자 고백하고 차인 거예요?

 

 

 

뭐야. 네놈들 왜 연습은 안 하고 앉아서 수다나 떨고 있는 거냐.”

 

기세 좋게 연습실 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오는 이로 인해 오오토리의 속내는 말이 되어 나오진 못 했다. 순식간에 침울한 분위기를 박살내며 화려하게 등장한 이는 아토베 케이고로, 의아한 건 그의 옆에 있는 사람이었다.

 

유키무라 세이이치?”

 

탄호이저 네 명 중 아토베의 취향은 바그너. 데즈카의 취향은 베토벤. 오오토리의 취향은 쇼팽. 이게 갑자기 왜 나오느냐면, 아토베 케이고와 함께 이 음대에서 주목 받는 나머지 두 사람 중에 하나인, 음악대학에서 매일같이 아토베와 부딪히게 되는 다른 앙상블의 누구씨가 바로 브람스 취향이기 때문이다.

 

묵묵히 자기 할 일 하는 나머지 한 사람(데즈카 쿠니미츠)과는 다르게 이번 대학 연주회에서도 쌀쌀맞은 기류를 풍기는 두 사람을 두고, 대학교 내에선 우스갯소리로 바그너와 브람스가 재림했다(그리고 또 싸운다?)’ 라는 말이 돌았다.

 

현악동엔 어쩐 일이세요, 유키무라 선배?”

 

안에 있던 두 사람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오오토리였다. 애써 방금 들은 오시타리의 번갯불 콩 볶아 먹는 고백 사건을 지우려 노력하며 유키무라를 쳐다본다.

오늘도 보랏빛 머리칼을 새하얀 이마에 드리운 유키무라는 오오토리를 보고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토베가 관악기 파트 악보도 가져가 버렸거든. 받으려고.”

 

음대 내 또라이그룹 일원 중 하나이자 천재 중 하나인 유키무라 세이이치(베를린 음대 기악과 오보에 전공). 관악전공 이들 중에서는 이미 옛날 옛적에 서열 1.

그나마 누구와도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오오토리가 유키무라와 짧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거만하게(오시타리 시점에서) 들어온 아토베가 보면대에 올려 진 악보들을 뒤적이다가 한 뭉치를 손에 쥐었다.

 

, 이거 맞아. 아토베, 다음번엔 이런 실수 하지 않길 바라.”

 

.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어이구야 분위기 보소오시타리는 틈만 나면 으르렁 대는 두 사람을 응시하다가 눈을 돌렸다. 그의 손이 꼭 쥐고 있는 것은 본인의 핸드폰.

 

아까 오오토리가 들어와서 처음 봤던 그의 모습이 핸드폰 쳐다보는 모습이었던 이유가 액정에 있었다.

 

나 어린애 아니거든? 스물 하나거든!!!!!!!!

 

흔히들 이르는 운명의 그대를 만난 지 하루.

정신이 멍한 와중에도 숙련된 자세로 상대방에게 연락처를 받고(연락처만 받고 끝난 건 아니었다) 열렬한 문자 대시.

 

공연 끝나고 피곤하다고 만 하루는 되어서야 답문이 왔고, 문자를 주고받은 지 얼마 안 돼서 받은 문자가 저거였다.

순식간에 화나게 해버리고 그대로 연락 두절.

 

가쿠토는 여기에 머무는 기간도 짧은데. 이런 식으로 화나게 하고.

아아, 근데 정말 스물 하나란 말이야? 그렇게 어린데? 피부도 뭔가 어린아이처럼 매끈하고, 눈동자도 아이 같은 데. 물론 인터뷰에서 대학에 갈 생각은 없어요라고 했지만 아직이라고 해서, 3이라거나 그 정도로 생각했지. 어딜 봐서 성인이냔 말이다!

 

.”

 

문자 왔다.

진동이 울리는 손의 느낌에 액정을 내려다보자, 이름 뒤에 하트를 붙인 발신자 명이 떴다.

오늘 오전에 화가 난 듯한 문자를 보낸 뒤로 어떤 문자에도 답이 오지 않아 전화를 할까 말까 하던 판인데 다행히도 화가 풀렸는지. 설마, 연락하지 말라는 건 아니겠지?

 

화 안 났으니까 저녁에 봐

 

세상은 아름다워!!!”

 

무뚝뚝하지만 핑크빛(오시타리의 눈에만) 문자.

갑자기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 벌떡 일어서서 소리 지르는 오시타리의 모습에, 아직 남아 설전을 벌이고 있던 유키무라와 아토베, 둘을 말리던 오오토리가 동시에 그를 돌아봤다.

 

오시타리 왜 저래?”

 

……하하.”

 

차마 좀 맛이 갔어요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오오토리는 미소를 택했다.

 

 

 

 

 

# 3,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