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ium sine dignitate
Written by Rine in Rine's Side
할 일도 없고 날씨도 좋고 늦게까지 영화도 봤겠다 간만에 잠 좀 자려고 했는데.
아무리 무시하려고 해도 지나치게 예민한 감각이 쉴 생각을 안 한다.
“…야아.”
두어 톤은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부르자 소음의 주범이 쪼르르 다가왔다.
아침부터 할 게 뭐가 있다고 새벽 같이 일어나 돌아다니는지 대체 알 수가 없다.
저 쥐방울만큼 작은 머리통은 남의 집에 와서도 제 집처럼 돌아다니는 기능을 탑재하고 있는 모양이다.
“지금 시간이 몇 시… 큼.”
평소보다 느슨하게 풀린 채 잤더니 그새 목이 가라앉았다.
나오려는 기침을 가다듬느라 말을 멈추자 녀석이 앞에서 답했다.
“7시.”
“아 그냐…. 일도 없는데 와 아침부터 싸부작대는데? 내 잠 다 깼다.”
그 말에는 답하지 않고 녀석이 통통 가벼운 발걸음으로 멀어졌다.
주방으로 갔나 보다.
더 자기도 그른 것 같아 침대 옆에 두었던 안경을 집어 들고 등을 벽에 기대앉았다.
여름이 다 되어서 그런지 고작 7시인데도 볕이 짠하게 들어온다.
그 덕에 공기 중의 먼지가 지나치게 잘 보였다.
“유시 밥 먹을 거야?”
나갔던 놈이 쏘옥 머리를 들이밀었다.
잠도 잘 잤는지 피부도 뽀얗고 눈도 초롱초롱하다. 여기가 니 집이냐 내 집이냐.
“어.”
대답 듣자마자 다시 사라지는 게, 어지간히 배고픈가 싶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몇 시에 일어난 거야?
버터 달구는 냄새와 냉장고 여는 소리가 동시에 감각을 자극했다.
주섬주섬 이불을 치우고 일어나자니 머리가 흘러내린다.
머리를 뒤로 넘기며 방을 나오니 거실 TV에서 아침 뉴스를 쏟아내는 소리가 확 꽂혔다.
어린이 TV나 보고 있을 것 같이 생겨선 뉴스?
“계란이랑 빵이랑 야채 쪼가리 밖에 없어서 그냥 프렌치토스트 했어. 마실 것도 원두커피뿐이야.”
종알종알 떠들면서 능숙하게 빵을 뒤집어 접시에 얹는다. 그 옆을 지나쳐 하품을 하며 다 내려진 커피를 따랐다.
“과일도 없냐. 버터도 꽝꽝 얼어있는 조그만 것뿐이고. 샐러드 할 만큼의 채소도 없어.”
식탁 유리 위로 접시 두 개와 컵 두 잔이 놓였다.
손을 씻은 녀석이 마른 행주에 대충 물기를 문지르고 의자를 빼 앉았다.
오른손으로 따른 커피를 홀짝이며 녀석 앞으로 머그컵을 밀었다.
“무슨 커피가 한사발이야… 아 맞아, 우유도 없더라.”
“가시나같이 말은 많아갖고. 니 몇 시에 일어났나?”
“6시 반.”
“그럼 진즉 해 먹지 뭘 여태 굶다가 종알종알.”
기분도 별로에, 집 안에 누가 있자니 거슬리기까지 해서 말이 차갑게 나갔다.
아니. 그보다는…,
귀찮다.
눈치 보면서도 빨빨대고 돌아다니는 저놈이. 본질적으로
“혼자 밥 먹는거 싫단 말이야.”
그 큰 눈으로 잠깐 쳐다보고 휙 돌리는 시선이 어쩌면 저렇게 티 날까 싶을 정도다.
저게 프로라고, 저게?
아무리 생각해도 속은 것 같다는 느낌인데.
자랄 때부터 이 바닥이었는데 어떻게 저런 눈과 저런 철딱서니를… 참 나이에 맞게 갖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
「그 앤 사람을 죽일 때 망설이지. 적이라도. 쫓길까봐? 신고? 복수 당할까봐? 아니. 그 사람을 다시는 못 볼까봐. 그게 적이건 초면이건, 자기가 그 사람을 이 세상에서 지울까봐. 그래서 그 주변인들이 무너져 내리는 구멍이 생길까봐. 그 앤 너무 상냥했어. 그래서 자네에게 맡긴 거야.」
아주 잠깐 기가 죽나 했던 녀석이 토스트를 두 개째 해치우며 다시 입을 열었다.
계란 푼데 채소를 썰어 넣고 남은 식빵을 전부 부쳐버린 토스트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뭐 애초에 음식이라고는 나가서 사 먹는 일이 다반사라 집에 있는 재료도 없고.
“오늘 일 있어?”
“아니.”
있다고 대답하고 싶지만 없다. 없는 걸 저 녀석도 눈치껏 알고.
귀찮을 것 같은 직감이 드는데…….
“그럼 나랑 돌아다녀줘.”
“집이 제일 좋다.”
“아 왜!”
“집구석이 최고 아인가, 집구석.”
“아 게을러! 냄새 나!”
체구는 작달만한게 먹는 건 제법 먹네.
제 접시 위에 놓인 토스트 다섯 장을 다 먹어치우고 커피도 반절 마셔버린 놈이 소리쳤다.
쨍알쨍알 뭘 어딜 그렇게 가고 싶어서 난리야….
“뭐, 뭐, 어디 가고 싶은데?”
“여어기 다아아.”
생긋 웃으면서 태블릿 꺼내들더니 앱 하나를 터치한다.
근방 지도 사진 위에 표시된 빨간 동그라미만 몇 개야.
“…여길 다 가자고 오늘?”
대충 돌아다녀줄 요량이었던 너그러운 마음은 도로 숨어들고 입에 댄 커피잔을 내려놓는 눈이 확 뜨였다.
“체력도 좋으면서.”
“안 좋다. 낸 게으르고 냄새나니까 집에서 잠이나 잘란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세탁소에 옷 맡기고 장 좀 보고 오려고 했다고.
이렇게 일찍 일어난 것부터가 잘못 됐어.
“여기부터!”
“알았으니까 일단 치아라.”
이른 아침을 해치우고, 설거지와 청소를 끝내고 거실 바닥에 앉았다.
방석 위에 앉은 녀석이 방금 보였던 제 나름의 ‘관광 목적지’ 지도를 확대했다.
“여기 들려서, 여기 갔다가 요기서 밥 먹으면 되지 않을까?”
“수족관은 다음에 가고, 해안 공원 먼저 가자.”
해안 공원, 오사카 성, 공중정원, 이 정도면 오늘 하루 다 가겠다.
아침을 일찍 시작하긴 했지만 돌아다니다보면 어영부영 시간이 많이 가니까.
수족관은 오며가며 시간 버리고 무엇보다 나가기 귀찮으니 적당히 가깝게 가야지.
나가서 해안 공원 도착해 어슬렁어슬렁 하면 점심 먹을 시간 다 된다.
점심 먹고, 마저 구경하고 성으로 이동해 풀어놓으면 잘 돌아다니겠지.
“그래? 그럼 나가자.”
망설임 없이 화면을 끄고 일어선 녀석이 재빠르게 방으로 사라졌다.
밤톨만한 게 잽싸가지고는.
대강 씻고 옷 입고 나오니 거실에 배 깔고 누워 게임하고 있는 녀석이 보였다.
태블릿으로는 게임하고 중간중간 폰으로 메신저도 들여다보는 모습이 잠시라도 쉬질 않는 모양을 다 드러냈다.
“나가자며.”
“응.”
눈으로는 화면을 들여다보며 일어선 녀석이 그대로 옷을 들어 걸쳤다.
안감에 흰 털이 보송보송한 회색 가디건.
부상열차를 타고도 얼마간 게임을 하던 녀석은 맞은편 창으로 햇볕이 들어오자 태블릿 화면을 껐다.
“얼마나 남았어?”
“세 정거장.”
정류장에 정차하고 출발하는 동안 거슬리는 흔들림이 없다.
내 기준으로, 대중교통 시장에 부상열차가 뛰어들고 나서 좋아진 점이다.
“와, 바다 냄새나.”
“그럼 괜히 해상공원이겠나. 저 난간 둘러서 전부니까 걷고 싶은 대로 걸어라.”
날씨는 매우 쾌청했다.
햇볕은 적당히 따끈따끈한데, 아무래도 바닷물 옆이라 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온도가 적당했다. 다만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머리카락이 귀찮아 문제지.
평범한 호수인 척 가장하고 있는 바닷물 옆으로 가서 난간에 달라붙은 녀석이 한껏 물 위를 들여다봤다.
섬나라 살면서 바다 처음 본 놈처럼 구는 것도 나름대로 신기한 구석이다.
“좀 탁한데?”
“쓰레기 몰려서 그런 기다.”
벽돌에 와서 찰랑찰랑 부딪히는 검푸른 물 위로 나뭇가지며 흰 거품이며 자질구레한 게 넘실거렸다.
그런가. 하고 중얼거린 녀석이 고개를 들어 난간에 올린 팔에 힘을 주어 몸을 위로 살짝 들었다.
조금만 더 했다간 팔짝 뛰어오르겠다.
“물 냄새나.”
“아무렴 초코 냄새라도 나겠나.”
비리다고 물러선 녀석은 하릴없이 돌아다녔다.
짙은 붉은 색이 바람 따라 이리저리 방향을 바꿨다.
…진짜, 아침부터 체력도 좋지.
“으으.”
둘러둘러 돌다가 한 바퀴 거의 다 돈 시점에서 난 벤치에 주저앉았다.
그새 주변 주민들이 많이들 나타났다.
하나같이 은퇴한 노령으로 보이는, 대개 여성들은 셋씩은 몰려있고 남자들은 개 한 마리 끌고 와 걷고 있다.
점심을 넘겼으니 아마 다들 점심 먹고 차 한 잔 하고 하나둘 나온 것일 터다.
“…내도 배고픈데.”
학생 같이 조그마한 체구와 강렬한 머리색 덕택에, 한눈 좀 팔아도 금방 녀석을 찾을 수 있었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복슬복슬한 애완견 한 마리와 눈을 맞추고 있는 걸 보고 슬그머니 일어섰다.
샌드위치. 목표는 샌드위치에 라떼다.
“유시!”
그래 내가 잘못했다. 니도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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