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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長篇]/Dear my Darling

[DMD] 제 3장 [카노스x엘] 가벼운 만남 上

                   

Written by Rine in Rine's Side

 

 

 

 

기승을 부리던 꽃샘추위도 점점 강해지는 햇빛과 진해지는 초록의 내음에 자리를 내주는 때였다.
엘이 고등학교에 입학한지 한 달여가 지난 때이기도 했다.

중학생 때와는 다른 선생님들의 강도 높은 앞날에 대한 잔소리도 이젠 슬슬 흘려들을 수 있는 경지에 오르고 있었다.

두발규정이 자유로운 학교 덕에 중학교 3학년 막바지부터 자르지 않은 엘의 푸른 빛 머리카락은 견갑골 께를 어른거렸다.

 

“엘!”

 

중학생 때부터 알아온 그의 친구들이 점심시간 종 치자마자 교실로 쳐들어와 엘을 불렀다.

엘은 짝인 미네에게 노트를 빌려 열심히 베끼던 손을 멈췄다.
뚱한 표정의 이프리트와 화사한 미소가 넘치는 트로웰이 둘의 앞자리로 와 앉는다.

 

“미네 안녕. 엘이 또 필기 베끼고 있었구나? 엘, 그러면 못 쓰지~”

 

장난스런 트로웰의 타박에 엘이 얼굴을 붉히고 변명한다. 열일곱, 한창 사랑스러운 나이.

 

 

 


시끌시끌 즐겁게 놀던 넷은 갑작스럽게 복도에서 여자애들의 호들갑스런 목소리가 들려오자 의아함을 표했다.
어쩐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음역의 비명소리였다.

마치 동경하는 연예인이나 잘 생긴 남자들 등의 보배로운 것(?)을 보았을 때 지르는 여자들만의 신호음 같은 그…….

착각이 아닌지 문가에 붙은 여학생이,

 

“카노스 선배다, 아 저 피부 좀 봐 오늘도 멋지다…….”

 

중얼중얼 거리는 게 들린다.

 

“카노스… 어딘가 익숙한 이름인데…”

 

엘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트로웰이 손을 탁 치며 말했다.

 

“전교회장 아니야? 인기도 제법이고 용모 수려, 성적 우수, 여자들이 딱 좋아할 만한 무뚝뚝이랄까… 시크하달까 그런 성격에. 우리 입학하기 전에 한 학생회장 선거에서 압도적인 몰표로 뽑힌 거라던데.”

 

은근 마당발에 특히 소문을 잘 아는 트로웰이 상당한 정보를 내놓았다. 그야말로 소설에나 나올 법한 프로필에 이프리트가 퉁명스레 말한다.

 

“인기스타구만? 난 그래도 엘뤼엔 선배가 좋아, 엘 너 빨리 다리 안 놔줄래? 오늘 당장 선배한테 말 해. 난 언제든 괜찮으니까 날짜를 잡으라고!”

 

“아니 그러니까 선배는 생각 없다고…….”

 

이프리트가 불을 내뿜듯 하는 말에 엘이 쩔쩔맸다.

중학교 3학년, 이프리트가 엘의 사촌 형인 엘뤼엔을 보곤 한눈에 반해 매일 그를 들볶았다는 것은 주변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난감해하는 엘 대신에 엘뤼엔이 직접 ‘어린애는 관심 없다’고 말한 후 한동안 잠잠했던 이프리트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엘을 볶아대기에 바빴다.

 

여태까진 어찌저찌 피해왔지만…….

이프리트의 반짝이는 눈을 보니 엘에게서 약속을 받아내기 전엔 절대 물러나지 않을 듯한 기백이…….

 

엘은 난감히 웃었다.

 

 

 

 

“엘뤼엔, 오늘 임원회의 있다. 모르는 척 혼자 가지 마.”

 

점심시간 짬을 이용해 학생회실에 올라온 두 남학생은 학생들의 건의서를 들춰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이 차분한 학생회장, 카노스가 하는 말에 다른 학생, 엘뤼엔은 쯧 혀를 찼다.

 

이 쓸데없는 녀석과 친구한 이후 여러 가지 귀찮은 일에 휘말린 게 이만저만이 아니다. 학생회도 그의 술수에 휘말려 정신 차려보니 속해 있었다고 할까…….

 

그 학생회인지 뭔지 생전 관심도 없던(엘뤼엔은 유유자적함을 즐겼다) 것에 끌려들어간 이후 그는 이런 식으로 노동력과 수명(엘뤼엔은 그렇게 표현했다)을 착취 당하고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거치적거리는 관심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관두려는 그를 슬며시 도발하는 저 회장이란 놈 덕에 그러면서도 엘뤼엔은 착실히 학생들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시간도 오래 끌고 인간들이 떠드는 임원회의 따위, 무시하고 가려 했건만 과연 폼으로 친구 해먹은 게 아니라는 듯이 미리 선수를 쳐오는 카노스 탓에 오늘 역시, 남아야 할 것 같았다.

 

 

 


하아…….

 

케이시는 학생회실 문 앞에 서서 한숨을 쉬며 우물쭈물 거리는 학생을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야? 누구 기다리니?”

 

들어가기를 망설이는 듯한 이는 케이시의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바로 엘이었다. 엘뤼엔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자 학생회실에 있다며 올라오라는 답문에 일단 오긴 했지만… 어쩐지 얘기 중인 듯한 내부의 상황에 문열기를 망설이는 중이었다.

그리 우물거리는 엘의 태도를 그저 사람 좋은 마음으로 포용한 케이시는 엘의 등을 두드려주며 먼저 문을 열었다.

 

“손님 왔어요~”

 

특유의 넉살 좋음으로 장난스럽게 외쳐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을 모은 케이시는 어깨를 끌어당겨 에엑… 당황하고 있는 엘을 앞으로 내세웠다.

 

“예쁜 후배가 찾아왔는데 누구 손님? 아무도 없으면 내가 데려가서…….”

 

“내 동생이야.”

 

엘뤼엔이 케이시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케이시의 눈이 둥그래진다. 그가 당황한 사이 엘은 ‘형’을 부르며 엘뤼엔에게 갔다.

 

“잠깐만 엘뤼엔, 아직 내 머리가 접수를 못 했거든? 너 동생 있었어? 머리색이 다른데… 뭣보다 너랑 성격이…….”

 

“사촌 동생이다, 불만? 응? 엘, 왜?”

 

케이시에게 쏘아 붙이던 엘뤼엔은 와이셔츠 소매를 당기며 고개를 젓는 엘로 인해 말을 멈췄다.

 

“저기 형, 싸우지 마.”

 

“이건 싸우는 게 아니… 후우, 알았다.”

 

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엘뤼엔은 엘 뒤의 케이시에게 냉큼 꺼지라는 무언의 눈짓을 했다.

 

“아하하하 아직 임원회의까지 한 시간이나 남아있고 배도 고프네… 간식 사올게!”

 

갑작스레 케이시가 뛰어나가자 엘이 어리둥절 함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엘뤼엔은 그런 엘에게 옆에 있던 의자를 권했다.

의자에 앉은 엘은 정면, 그러니까 엘뤼엔과 마주보는 곳에 푹신히 앉아 엘을 빤히 보고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숨길 것 없이 당당하게 맞대오는 시선에 엘 역시 눈을 돌리지 않았다.

 

“…….”

 

“…안녕, 엘뤼엔 동생? 굉장히 귀엽게 생겼네.”

 

팽팽했던 잠시간의 눈싸움은 먼저 인사를 건네오는 카노스의 말에 끊겼다.
사람 무안하게 빤히 쳐다보고 있었어! 엘은 부랴부랴 정신을 수습하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 전 엘이라고 해요. 1학년이고요.”

 

헤실 웃는 엘의 태도에 검은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카노스가 마주 미소 지어준다.

 

“학생회장 되는 사람… 이랄까, 엘뤼엔 친구 카노스야.”

 

“아! 회장 선배!”

 

아까 낮에 트로웰이 해준 말이 떠올라 엘은 눈앞의 선배를 다시 봤다. 샤프한 타입이라고 하나, 이런 사람을?

카노스는 벌컥 회장선배라 칭하는 엘이 귀여운지 엘뤼엔에게 입모양으로 말을 건넸다.

 

‘네 친척 맞아?’

 

그런 카노스에게 쿨하게 ‘닥쳐’라 대답해주며 엘뤼엔은 물었다.

 

“엘, 할 말 있다며?”

 

평소 절대 볼 수 없는 엘뤼엔의 부드러운 모습에 카노스는 흥미가 일어 둘을 바라봤다.

 

“아으… 그게 형…….”

 

목적이 떠오르자 엘은 말을 흐렸다. 말 하기 곤란한 건가 싶어 엘뤼엔은 다른 사람이었다면 했을 ‘꺼져’ 따위의 소린 전혀 없이 기다려주었다.

 

“형… 이프리트랑 한 번 만나주시면 안 돼요?”

 

이프리트? 누구지? 아……. 잠시 기억을 헤집던 엘뤼엔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성격 급한 꼬맹이?”

 

하하 그게 말이죠 형…….
엘은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후아…….”

 

당장 이프리트를 소멸 시킬 듯이 인상을 구긴 엘뤼엔을 겨우겨우 설득한 엘은 숨을 돌렸다.

마지못해 승낙한 엘뤼엔이 띠꺼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어쩐지 미안하지만 그래도 할 수 없다.

친한 친구인 이프리트와 이 사촌 형이 잘 됐으면… 하는 바람도 내심 있고…….

 

어쨌든 임무를 마치고 숨을 내쉬는 엘에게 아까부터 흥미진진한 눈으로 보고 있던 카노스가 말을 건넸다.

 

“음… 조금 있으면 케이시가 간식 사올 텐데, 천천히 가 엘.”

 

“엑, 아니, 괜찮아요 선배. 저 집에도 가봐야 하고… 선배들 일도 해야 하고…….”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엘에게 카노스는 별 거 못 된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오늘 별다른 안건도 없고, 케이시는 이미 네 몫까지 잔뜩 샀을 걸? 케이시의 나름대로 호의인 데 거절하려고?”

 

그 말에 엘이 절대 아니라는 듯 말한다.

 

“그, 그건 아니에요. 그치만 선배들…….”

 

“아아, 나나 엘뤼엔은 전혀 방해라고 생각 안 하는데. 뭔가 바쁜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약속이 있어도 취소해야 할 것 같은 선배님의 기백에 엘은 결국 어어… 하면서 다시 자리에 앉아 버렸다.

 

“괜찮다고 하면 그냥 앉을 것이지, 먹여 주겠다는 데 왜 거절 하는 거냐?”

 

엘뤼엔이 이해가 안간 다는 듯이 엘에게 물었다.

 

“그건 기본 예의라고 형!”

 

이런 철인간을 이프리트는 어떻게 이상형으로 볼 수 있는 걸까. 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쩐지 자꾸만 자신을 바라보는(오늘 처음 봤으니 보는 거겠지만 일도 안 하고) 카노스의 눈길에 엘은 공연히 열이 올라 시선을 돌렸다.

 

 

 

 

“나 왔어∼ 엘뤼엔 동생 아직도 있지∼?”

 

복도를 달려오는 소리가 난다 싶더니 아까 본 선배(케이시)를 선두로 한 일행이(학생회 임원들이겠지만) 문을 쾅 열고 우르르 들어온다.

한 네다섯 명이 들어온 거지만 학생회실 내의 분위기가 워낙 그랬기에(한 명은 무관심, 한 명은 눈빛 공격, 한 명은 당황하기) 그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붕붕 뜬다.

 

“엘뤼엔 동생∼ 케이시 선배 왔어! 심심했지?”

 

“우와 네가 엘뤼엔 사촌이라고?”

 

“어쩜 귀엽다∼ 볼 만져 봐도 돼?”

 

케이시 이하 남학생들의 호기심 어린 관심에 엘이 쩔쩔 매는 사이, 귀여운 엘에게 여자들 특유의 감정인지 한 여선배가 머리며 손을 꼭 잡고 쓰다듬었다.

 

“아… 으에… 그, 저기…….”

 

엘이 어쩔 줄 몰라 뒤로 물러서고,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가 학생들 사이를 파고 들었다.

 

“사온 거나 차리지? 셀마는 손 떼고.”

 

“뭐야 카노스.”

 

셀마라 불린 여학생이 아쉬워하며 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을 뗐다. 으아아… 뒤로 물러나 엘이 머리칼을 정리하자 엘뤼엔이 뒤의 엉킨 결을 손빗으로 풀어준다.

어찌 되었든 카노스 덕에 풀려난(?) 엘은 티는 내지 못하고 카노스에게 작게 미소로 대신 했다.

 

“오케, 알았어. 셀마 너도 궁시렁 대지 말고 물이라도 떠 와.”

 

카노스가 군기 잡는 게 하루이틀 일이 아닌 듯 태연자약 한 엘뤼엔은 예외로 치더라도, 모두 사사삭 그새 움직인다.

학생회실 가운데에 있는 테이블 위, 굴러다니던 볼펜 등은 모두 한구석으로 치워지고 간식들이 놓였다.

아예 저녁이라도 먹을 셈인지, 학교 앞 상가들을 다 쓸어온 듯 토스트며 김밥, 어묵들이 한 가득인 모습에 엘은 질려했다.

 

“자아, 오늘도 회의 지원금을 주는 학교 윗분들의 주머니에 감사하며 잘 먹겠습니다~”

 

식전 기도라도 하듯 거창하게 말을 꺼낸 케이시 이하 임원들은 이상한 감사인사를 꺼내자마자 이것저것 입에 넣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정말 배고픈 사람들이 밥을 퍼먹는 것처럼 보여 엘이 멈칫하고, 엘뤼엔은 나른한 감상을 더했다.

 

“운동장에서 내리 축구나 하다가 회의랍시고 처먹는 꼴을 보니 학생회도 갈 데까지 갔군 그래.”

 

“무슨… 소리야 엘뤼엔! 자고로 문무양도! 심신의 단련은 밸런스가 중요하다고!”

 

한 남학생이 볼을 빵빵해지도록 김밥을 넣고 외치자 엘뤼엔은 눈살을 찌푸렸다.

 

‘개, 개성 있는 건가…….’

 

다들 제멋대로인 성격에 엘은 감탄했다.

 

“배 안 고파?”

 

혼자 감탄하고 있는 데 누군가가 엘에게 물을 건네며 물었다. 감사합니다… 에, 선배? 받으며 돌아보니 카노스.

엘은 자신에게 젓가락을 놔주며 왜? 묻듯 바라보는 카노스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갯짓 했다.

 

“배가 안 고픈… 그만들 안 처먹어? 너희가 돼지 같이 먹으니까 애가 뭐 하나 먹지를 못 하잖아.”

 

카노스가 엘에게 물으려다 그 사이에도 열심히 음식을 줄이고 있는 애들에게 일갈 한다.

 

 

 

 

뭐랄까… 돌이켜보자면 온갖 관심을 다 받은 날이었다고나 할까.

 

엘은 주저앉아 긴 머리칼은 드라이기 바람에 말리며 생각에 잠겼다.

 

결국 카노스 선배의 일침에 선배들이 어설프게 웃으며 자신에게 온갖 음식을 밀어주었고… 당황해서 손을 내젓는 날보고 엘뤼엔 형은 한심하게 주는데 거절한다 그랬고…….

 

그리곤 끝끝내 카노스 선배가 주는 대로 다 먹고 나니까 배불러서 꾸벅꾸벅 졸다가… 회의 마친 형과 회장 선배가 데려다주…….

이제서야 잠이 깨 생각해 보니 어쩐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엘은 한숨을 쉬었다.

 

나랑은 다르게 되게 멋있었어…….

거울로 보는 여자애 같은 어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엘에게 그야말로 동경이라고나 할까.

한동안 방에서 혼자 베시시 웃던 엘은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헤에, 정말로 그런 사람? 엘, 재밌었겠다.”

 

“흥, 엘뤼엔이랑 신나라 놀았다 이거잖아? 다른 남자까지 끼고.”

 

흥미 있단 트로웰과는 달리 심기가 불편한 듯 이프리트의 말은 가시가 돋혀 있다. 엘은 어제 잡아온 약속을 들어 그녀를 달랬다.

 

“어쨌든 형하고 약속 잡아줬잖아, 그렇게 형이 좋아? 형… 욕은 아니지만, 절대 여자 애지중지 해 줄 사람은 아닌데 말이지…….”

 

엘이 갸웃, 고개를 끄덕이며 하는 말에 옆자리의 미네가 뭔가 어린 동생을 보는 눈으로 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프리트는 엘에게 한심하다는 듯 비웃음을 날린다.

 

“어린애가 뭘 알겠냐, 애들은 공부나 열심히 해. 이 누님은 오늘 거울 좀 봐야겠다.”

 

“너 지금 나보다 몇 개월 먼저 났다고 나 애 취급 하는 거지?”

 

엘이 파르르 소리치자 트로웰이 늘 그렇듯 중재에 나섰다.

 

“자아, 엘. 이프리트 싸우지 말고… 아, 그래 엘, 반납할 책 있지? 도서관 다녀오자.”

 

엘은 트로웰이 다독이는 것에 고개를 끄덕끄덕 하다가 흐음… 그래! 하며 서랍에서 얼마 전 빌린 책을 꺼내 일어섰다.

 

“근데 회장 어때? 내 정보 주머니에 넣어야지. 어디 이것저것 말해 봐. 정말 그렇게 칼 같아?”

 

트로웰이 하는 말은 카노스의 전반적인 이미지와 평이었다. 그러자 엘은 그게 아니라며 흥분해서 반론했다.

 

“아니야, 되게 부드럽게 대해 주시고 많이 웃고 그러셨는 걸. 이것저것 다 챙겨 먹여 주시고… 음, 하여튼 간에!”

 

기억을 더듬어 배시시 웃으며 엘이 하는 말에 트로웰은 묘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절대 그렇지 않다는데? 공명정대하긴 하지만 맺고 끊는 게 칼 같고, 뭔가 친하게 지내기엔 너무 무심하다고들 했어.”

 

트로웰이 하는 말에 엘은 계단을 오르던 걸음을 뚝 멈추고 소리쳤다.

 

“아니라니까! 오해야, 나한텐 안 그랬어!”

 

“그건 너니까 그렇지, 엘뤼엔 사촌씨.”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엘의 뒤에서 불쑥 나타난 사람이 트로웰 대신에 대꾸했다.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에 엘이 고개를 돌렸다.

 

“아… 그… 케이시 선배?”

 

어제 보았던 이를 기억해 낸 엘의 부름에 지나가던 사람, 케이시는 손을 살랑살랑 내저었다.

 

“그냥 형이라 불러 엘. 그리고 이전 얘기로 돌아가자면 카노스 무뚝뚝하고 정나미 없는 놈 맞는데? 아, 이건 그 녀석하고 2년간 친구 한 자격으로 증언하는 거야.”

 

 

 


“카노스 선배!”

 

이름을 부르며 뛰어간다. 저만치 매표소 근처에 서서 다른 사람들(특히 여자들)이 모두 한 번씩 시선을 주는 이가 내 선배다.

어쩐지 삐질 것처럼 심통이 나긴 하지만 그래도 그것보단 선배를 본 반가움이 더 커서 활짝 웃어버린다.

 

“다치게 왜 뛰어 와, 엘.”

 

자상한 목소리와 뛰어든 나를 품에 꼭 잡아주는 품이 너무 좋다.

나도 모르게 베싯 웃으며 선배를 껴안은 손에 힘을 주고, 어디선가 들리는 내 알람소리에…….

 

응? 알람소리?

 


삐비비빅- 삐비비빅-

 


행복한 기류 사이로 끼어들어온 소리에 엘은 눈을 반짝 떴다.

손에 감긴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고 시선을 돌린 침대 옆 협탁엔 알람시계가 열심히 울고 있었다.

 

“으음… 아…….”

 

벌떡

오늘 무슨 약속이 있는지 기억해 낸 엘은 늘어지던 몸을 긴장시켜 벌떡 일어나 침대 밑에 발을 내렸다.

혹시나 잊어버릴까(그럴 린 없다고 생각했지만) 달력 오늘 날짜엔 큼직하게 ‘놀이동산’이라 쓰여 있었다.

 

부산스레 일어나 긴 머리카락부터 감고 샤워를 마친 엘은 밥을 먹고 옷을 골라야 하는데… 악! 시간도 없고 어제 대충 가려놓을 걸…….

시간에 쫓겨 엘은 급하게 나왔다. 약속시간까지 1시간 남았는데 왜 이 지하철은 오지도 않는 거야!

 

발을 동동 구르는 작은 소년은 오전, 사람이 적은 역 안에서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