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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長篇]/Dear my Darling

[DMD] 제 1장 [아스x시벨] 천적관계 下

 

 

하늘하늘 검은 꿈속의 공간을 부유하던 시벨은 순간 섬짓한 느낌에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싸늘하고 불길한 느낌이 막 잠에서 빠져나온 몸을 감쌌다. 좋지 않은 예감에 시벨은 잠들기 전보다 무거워진 몸을 일으켰다.

천막 밖은 아까보다 해가 져 있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7시쯤 된 것 같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지 이 스산한 느낌은 뭘까… 시벨은 하늘을 보던 시선을 내렸다.

정말이지 이놈의 마계는 정을 붙일 수가 없다고 중얼거리던 시벨이 갑자기 허리를 숙였다.

방금 전만 해도 그의 상반신이 있던 허공에 무언가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스쳐 지나갔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숙인 시벨은 벌떡 일어서 천막 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르르르… 나지막하게 성내는 소리가 들려온다. 놓쳐 버린 사냥감을 킁킁 소리와 함께 찾느라 밟은 땅에서 묵직한 진동이 나는 걸로 보아 숲에서 나온 마수인 듯 했다.

 

그것도 거대 마수.

상당히 흉폭한 살기에 시벨은 혀를 찼다. 저 커다란 덩치를 죽여야 하는데 당장 검도 없고 마법을 쓰자니 천막들을 홀랑 태워버릴 것 같고…….

 

“…난감하구만.”

 

이렇게 싸워본 게 얼마 만이더라… 시벨은 실없이 피식 미소를 걸쳤다.

 

 

 

 

노을이 지던 하늘은 이제 거의 산 너머로 사라진 태양 덕에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이제서야 사냥 팀이 복귀하는지 아까부터 시벨의 귀에 잡히던 소음이 완전히 가까워졌다.

시벨은 제 앞에 쓰러져 온몸의 피를 땅에 쏟아붙은 곰과 멧돼지의 혼합체 마수를 무심히 바라봤다.

 

이 돼지와 싸우느라 옷이며 장식이며 남아난 게 없다. 온 몸에 묻은 채로 굳어버린 돼지의 피 때문에 기분이 몹시 더러웠다.

돌아오던 마족들이 피냄새를 맡았는지 흥분한 채 천막 사이를 뛰어오는 소리에 시벨은 몸을 돌렸다.

 

“허! 이건…….”

 

뒤에서 뭐라 쑥덕거리며 소란이 일자, 긴장이 풀려 늘어지는 몸과 날카로운 신경이 얼른 쉬고 싶다고 재촉함에 그는 걸음을 빨리해 자신의 천막에 돌아왔다.

천근만근 몸이 무겁다.

 

“나 정말 늙었나…….”

 

“그다지 삐걱거리진 않으니까 괜찮아. 내심 신경 쓰고 있었나 보지?”

 

갑자기 천막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시벨은 침대에 누운 채 눈만 흘겼다.

방금 들어왔는지 어깨를 털어내며 뚱하니 말한 아스는 그런 시벨에게 터벅터벅 걸어와 침대에 앉았다.

풀썩 옆에 무언가가 얹어진 느낌에, 그리고 시각에 잡힌 모습에 시벨은 미간을 찌푸렸다.

피곤해서 쉬고 싶어 일부러 소란을 피해 빨리 천막으로 들어왔건만, 이 자식은 뭐 이리 당당하게 들어와 떡하니 앉는 거람.

 

“나가…….”

 

영 힘이 없는 목소리에 아스는 흐음, 시벨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손바닥의 서늘함에 시벨은 크게 도리질 쳐 그의 손을 떨어뜨렸다.

 

“엄청 뜨거워. 하긴 저 뚱땡이를 쓰러뜨렸으니 진이 빠졌겠지. 마족들이 수군거리고 있어. 나와 데르온을 제외하고 네가 일등이야. 상 줄까?”

 

옆에서 귀찮게 하면서 계속 헛소리를 하는 아스가 짜증나 시벨은 답답한 목소리를 냈다.

 

“야 너 좀 나가라, 응? 형이 좀 피곤하거든 꼬맹아, 저리 가.”

 

정말 지친 목소리로 제발 나가라, 한숨 쉬는 시벨을 아스는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조용해진 아스에, 시벨은 드디어 이 녀석이 말귀를 알아들었나 보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지친 몸에 힘을 풀고 이불을 끌어당겨 폭 덮은 채 시벨은 깜박 눈을 감았다.

 

아름 얇은 잠의 장막 너머로 아스가 천막을 나갔는지 천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어쩐지 주변이 조용해진 것 같다 느끼며 시벨은 어지러운 기류에 정신을 내맡겼다.

 

 

 

 

정말 아파 보이는 시벨의 모습에(열도 상당했다) 아스는 가만히 천막을 빠져나왔다. 시벨은 병든 닭처럼 까무룩히 잠든 듯 했다.

저렇게 힘없는, 아픈 시벨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다. 아스는 주변에서 피를 본 후 흥분해 시끄러운 마족들에 인상을 찌푸렸다.

시벨이 깰지도 모르겠다. 쉬어야 하는데… 그에 생각이 미치자 아스는 마족들에게 마왕의 권위를 내리눌렀다.

 

“다들 입 다물어라.”

 

그제서야 입을 닫은(덩달아 행동까지 굳어버린) 마족들의 모습에 만족하며 데르온을 찾았다.

아스의 지시대로 시벨이 죽인 마수를 시종들에게 던져 주고 온 데르온은 자신을 찾는 아스의 모습에 얼른 달려왔다.

 

“시벨이 아파. 뭐 먹일 만한 약 없어?”

 

시벨님이 말입니까… 아스의 진지해 보이는 모습에 데르온은 덧붙이는 말없이 환약 하나를 건넸다.

 

“물이랑 드시라고 하세요, 시벨님 자체 치유력만으로도 금방 나으실 테지만 효과가 있을 겁니다.”

 

데르온이 건네준 약을 조심히 쥐고 아스는 시벨의 천막으로 돌아갔다.

열 때문인지 누가 들어오건 말건 정신 못 차리고 잠들어 있는 시벨을 앞에 두고 아스는 잠시 고민했다.

어쩐다…….

 

 

 


몽롱한 정신 가운데 누군가가 들어왔는지 느껴지는 차가운 바깥바람에 살짝 한기가 든다.

따뜻한 내부를 서늘한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지긴 하지만 움직일 기운이 없어 시벨은 그냥 꼬물꼬물 이불 속만 파고들었다.

붕 뜬 정신에 누군가 자신의 고개를 올리는 것을 느끼며 시벨은 열이 보여주는 환상 속으로 빠졌다.

 

 

 


짧은 고민을 그만두고 아스는 시벨의 뺨에 손을 대고 고개를 숙였다.

찰랑이는 물과 씁쓸한 맛의 환약을 맞닿은 입안으로 살살 넘겨주자 다행히 잘 받아 삼킨다.

잠깐 입을 떼 미약히 흐른 물을 핥고 다시 입을 맞췄다.

가만히 그가 이끄는 대로 얌전한 그도, 역시 귀여워라 생각하며 아스는 몸을 뗐다.

아프지만 않으면 딴 짓까지 해보는 건데… 쉬게 해줘야겠지, 아스는 그의 머리만 쓰다듬었다.

 

시벨, 아프지 마.

 

 

 


“끄응…….”

 

한밤중에 눈을 뜬 시벨은 혼미한 정신에 머리를 붙잡았다. 새어 들어오는 빛 하나 없는 걸 보니 정말 밤인가 보다.

응? 이게 뭐지. 옆에 있는 덩치에 시벨은 의아함에 손을 내려 더듬었다.

 

“음… 아, 늙은이 깼어?”

 

익숙한 목소리… 아스모델은 돌연 잠에서 깬 시벨에게 손을 뻗어 품으로 끌어들였다.

 

“뭐하는… 거야.”

 

목이 잠겼어……. 아스는 시벨의 물음엔 아랑곳 않은 채 그의 등을 토닥였다.

 

“너 지금 환자야… 졸리다, 다시 자.”

 

할 말이 많았지만 푹 가라앉은 목상태와 아직 어지러운 정신, 그리고 힘이 쪽 빠진 몸에 시벨은 결국 얌전히 수긍했다.

금세 잠이 몰려옴에, 온기를 끌어안은 시벨은 잠을 청했다.

한밤중 천막 안에선, 서로를 껴안은 두 사람의 새근새근한 숨소리만 떠다녔다.

 

 

 


# 1 천적관계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