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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長篇]/Dear my Darling

[DMD] 제 3장 [카노스x엘] 가벼운 만남 下

 

 

시계탑 종치는 소리에 시선을 올려 시간을 확인한 소년, 아니 청년에 가까운 이가 무언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카노스… 선배!”

 

그 때 저만치서 종종걸음으로 거의 뛰어오는 소년이 외치는 말에 남자의 입가엔 미소가 떠오른다.

숨차게 달려온 소년, 엘이 카노스 앞에 와선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으아… 선배, 죄송해요, 열차… 가 안, 와서… 조금 늦게 나오기도… 했고… 후아…….”

 

“진정해, 많이 늦은 거 아니니까.”

 

 

 

 

“엘, 뭘 그렇게 봐?”

 

“선, 아니 형. 저거 봐요! 풍선!”

 

뭘 그렇게 보고 있나 궁금해진 카노스가 엘에게 묻자 정신없이 곰의 탈을 쓴 사람이 들고 있는 하트 모양 풍선을 보고 있던 엘이 화들짝 대답했다.

요전에 카노스가 꽤 강력히 주장한 호칭이 떠올라 얼른 선배 소리를 넣고 ‘형’이라 고쳐 부르는 귀여운 짓에 카노스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엘은 그런 카노스의 모습을 보고 저도 기분이 좋아져 같이 미소 지었다. 사흘 전 갑자기 주말에 어디 갈까? 다정하게 묻는 말에 ‘놀이공원이요!’라 하고는,

 

혹시 싫어하면 어쩌지… 우물 거렸는데 어쨌든 형도 즐거워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놀이공원의 인파들 사이에서도 한 눈에 띄는 카노스에, 엘은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엘? 왜 그래? 다리 아파?”

 

길가에 서선 볼을 붉히는 엘의 모습에 카노스는 고개를 내려 엘을 마주 봤다. 걱정스런 말에, 그리고 갑자기 다가온 얼굴에 엘은 깜짝 놀라 버둥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엑! 아뇨! 전혀요!”

 

기겁해 도리질 치자 카노스는 그래, 하고 물러서면서도 걱정스런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혀, 형 와플 먹을래요?”

 

엘은 그런 카노스의 팔을 붙잡고 와플 가게로 뛰어갔다.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이것저것 구경하다보니 시간은 금방 갔다. 곧 한여름 인지라 어둡진 않았지만 공원 안의 가로등은 일찌감치 불이 들어왔다.

다리가 아프다는 엘을 벤치에 앉히려다, 차가운 바닥에 카노스는 제 가디건을 깔고 앉혔다. 다른 지인들이 봤으면 기가 차서 넘어갈 이중모습이지만 엘은 고맙습니다 하며 넘어갔다.

 

처음엔 이런 배려들에 놀라고 사양했지만 고집스레 묵묵히 행하는 카노스의 태도에 조금은 편해진 탓이다.

엘은 그것과는 관계없이 초조해 하고 있었다. 오늘은 답을 주려고 했는데… 정확하게 말하려고… 타들어가는 엘이 긴장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노스는 따뜻한 핫초코를 사와 엘에게 건넸다.

 

엘은 따끈한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며 쿵쿵 거리는 가슴을 달랬다.

이거 다 마시고 나면… 확실하게 말해야지.

아 정말 어떡해… 누가 혼내는 것도,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닌데 심장이 마구 뛴다.

 

다 마시면 말해야지… 다짐했던 핫초코가 한가득 담겨있던 컵은 온기를 잃고 있었다. 타는 속을 달래려 홀짝홀짝 마시던 것이 어느새 한 두어 모금 밖에 남아있지 않다.

어떡해… 엘은 울상을 지었다. 선배가 먼저 고백하고 답을 기다리겠다 했으니 혹시나, 거절 당할까봐 걱정하는 건 아니다.

 

선배가 싫은 것도 아니다. 단지 이렇게 심장이 떨리는 것은 그저 겁쟁이라서. 입 밖에 내는 게 어쩐지 겁이 나서.

아까부터 핫초코가 있던 컵을 꽉 쥔 채, 안절부절 못하는 엘을 카노스는 옆에서 지켜보다 쓴웃음을 지었다.

 

“부담 줄 생각은 아니었어, 엘.”

 

화들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뜬 엘의 어깨를 카노스는 감싸 안았다. 그리 추운 날씨도 아니건만 긴장해 있는 엘이 안쓰럽다.

 

“나랑 같지 않아도 돼, 그냥 옆에 있는 걸로 만족하니까.”

 

혹여나 엘에게 강요라도 하는 것처럼 들릴 까봐 카노스는 말을 가려 속삭였다.

그 다정한 목소리에 이 순간까지 신경 써 주는가 싶어 엘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더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등 쪽을 쓸어주는 손길에 손을 꼭 쥐고 입을 연다.

 

“그런 거 아니에요.”

 

선배, 아니 형. 작지만 애써 떨림을 누르고 또렷이 뱉은 말에 카노스는 멀거니 분수를 바라보고 있던 눈을 돌렸다.

그보다 키가 작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엘과는 시선을 맞출 수 없어 카노스는 표정을 보지 못한 채 쓰다듬던 손만 멈추었다.

 

“부담 주는 거나,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 거 아니에요. 오히려 난, 그 반대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을 기다려주던 카노스는 문득 숙이고 있던 머리를 들어 눈을 마주치며 엘이 하는 말에 그저 눈만 깜박였다.

아무 말 없이 보기만 하는 카노스의 반응에 엘은 괜히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져 아무 말이나 덧붙였다.

 

“그러니까… 형이 오해한 거라고요. 저 형, 그… 좋아, 해요. 그러니까… 그니까 제 말은…….”

 

가만히 눈만 깜박이던 카노스는 엘의 어깨에 올려놓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래서… 그러니까… 에, 우왓, 형!”

 

갑작스런 고통에 엘이 작게 소리를 내질렀다. 그 소리에 멍하던 정신을 되찾은 카노스는 황급히 손을 뗐다.

 

“엘, 괜찮아? 미안해.”

 

“괜찮아요.”

 

미안함이 가득 담긴 얼굴로 저도 모르게 꽉 쥔 엘의 어깨를 쓸어주는 카노스를 엘은 우울하게 보았다.

큰 맘 먹고… 는 아니지만 그 비슷하게 말하려 했는데, 바보 형.

엘은 갑자기 치밀어 오는 답답함에 그를 꽉 껴안았다.

 

“엘? 왜 그래?”

 

갑작스런 엘의 행동에 카노스는 당황한 채 손을 들었다. 푸우, 숨을 크게 내쉬는 엘을 일단 마주 토닥여 준다.

 

“기껏 말하려고 했는데 이상한 짓이나 하고…….”

 

엘의 말에 카노스는 눈을 반짝였다. 카노스를 꼭 잡은 채인 엘은 알지 못 했지만.

 

“그거 말인데 엘, 다시 말해 봐.”

 

뭐에요! 그걸 어떻게 다시 말하라고! 생각만 해도 열이 오르는데!

그러나 카노스는 전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시 말해 줘, 제대로 못 들었다.”

 

남들 눈에 그다지 부자연스럽지 않게 고개를 내려 엘에게 속삭이자 엘은 새빨개진 얼굴을 감추려 웅얼거리듯 머리를 숙인 채 말했다.

그 역시 잘 들리지 않는 터라, 카노스는 엘을 재촉했다. 어찌 보면 뻔히 알면서 심술 부린다 할 지 몰라도, 카노스는 나름대로 절박한 심정이었다.

 

꿈이 아니길, 혹여나 착각이 아니길 확신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한참 동안 후아아 숨을 고르고,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려 마음을 달랜 엘은 초여름 밤 더운 공기를 식히는 분수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형이 저번에… 정말로 진지하게… 저를… 그… 생각하신다고 했잖아요.”

 

조금 떨리는 목소리지만, 엘은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카노스를 똑바로 봤다. 이 사람이 고민하다 했을 진심 어린 고백이기에,

 

“그래.”

 

더 소중하다.

카노스는 짧게 대답했다.

 

“그 대답… 지금 할게요. 저… 형에 비해서 그리 잘나지도 않았고 둔하기도 해서 힘드실 테지만… 저도요, 형…….”

 

이 상황에도 엘이 너무나 저다운 걱정을 하고 있음에 카노스는 작게 미소를 걸쳤다.

그런 것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데, 그 점까지 먼저 사랑하게 된 카노스가 주책이라면 모를까.

 

“저요… 저 형이랑 같은 마음 같아요.”

 

엘이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말을 뱉었다.
엘의 그 한 문장에 카노스는 말이 없었다.

한참(실상은 잠깐인데도) 말이 없는 카노스에 엘의 눈동자에 불안이 스며들었다. 뭔가 잘못한 걸까, 갑자기 왜 이러시지…….

 

“엘…….”

 

카노스는 약간은 담담한 목소리로 엘을 불렀다. 그러나 목소리만으로 감정을 가리기엔 이미 몸이 먼저 나선 뒤였다.

별안간 손이 꼭 붙잡힌 엘이 눈을 크게 떴다. 카노스는 그 손을 꽉 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이런 소심한 상태의 카노스를 처음 보는 엘이 그를 부르려 할 때, 카노스가 기쁜 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 3 가벼운 만남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