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et Enemy
Written by Rine in Rine's Side
엘이 떠난 지도 벌써 백 년이 넘었다.
그사이 이사나와 알리사의 죽음을 지켜본 트로웰과 시벨들의 마음은 착잡했다.
그들이 인간인 이상 빠른 이별은 예상하고, 각오한 일이었지만 죽기 전까지 엘을 찾던 이사나와 돌아와 이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 엘을 생각하면 끝없이 마음이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이사나가 명계로 떠난 이후 마계로 건너와 있는 시벨은 문득 든 생각에 깊은 숨만 내쉬었다.
엘은 언제 오는 걸까… 건강히 있을까… 하는 걱정에서부터 당장 오늘은 또 그 마족꼬맹이가 어떤 신종 살해법(?)을 고안해 낼까… 하는.
“밥이나 먹자…….”
언제 봐도 영 예쁘지 않은 꽃을 멍하니 보던 시벨은 아침산책을 멈추었다.
그만 발길을 돌려 성 안으로 들어간 이사카는 식당 문을 벌컥 열었다.
딱 입맛에 맞는 건 아니지만 간간히 마음에 드는 요리를 생각하며.
쓸데없이(자연을 벗 삼는 유니콘이란 그의 성향을 감안했을 때) 크고 음산한 이 성은 꼬맹이가 음산한 정치를(랄 것도 없지만) 펼치는 소굴이었다.
그 쓸데없이 큰 성의 거취인으로서 오늘 아침식사를 위해 식당에 들어온 그는 작은 테이블에 먼저 와서 신나게 먹고 있는 아스모델 마왕님을 보았다.
시종은 다 물리고 신나게 먹는 모습이 이럴 땐 영락없이 엘 옆에서의 아스모델이건만 남들 앞에선 새빨간 저 입술로 귀신도 숨 넘어갈 말을 끄떡없이 한다.
“어? 시퍼런 엘프 왔네.”
순진하게 눈을 깜박이며 아스가 하는 말에 시벨은 이젠 수월히 어른의 마인드로 넘겼다.
“시벨리우스랬다, 이 지져 먹게 징글징글한 꼬맹아.”
“응. 시벨은 징글징글하게 나이가 많고 말이야. 늙은 망아지.”
아스 역시 굴하지 않고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뭣… 내가 어딜 봐서 늙었다는 거냐!”
“몸도 마음도. 그래도 아직 기운은 팔팔하네?”
앞의 빵을 집어 우물거리며 아스가 키득거린다.
진정하자, 진정. 휘둘리지 말자 시벨리우스. 저 녀석에게 일일이 반응하지 말자. 시벨은 계속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뭐 해? 혼자 중얼중얼. 아, 야한 생각이라도 하는 거야? 그래, 내가 시퍼런 망아질 이해해 줘야지 뭐.”
아량을 베풀듯 자상히 말하며 생긋 웃는 아스의 말에 시벨은 마음 다잡기를 포기했다.
“이 꼬맹이……!”
“맨날 꼬맹이래, 아 잘 먹었다. 참.”
분노에 몸을 떠는 시벨을 본 척 만 척 아스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시벨을 지나쳐 가려던 아스는 무언가가 떠오른 듯 걸음을 멈췄다.
“내일 북쪽의 마수들을 사냥하러 갈 거야, 같이 갈 거지, 시벨? 예쁜 여마족들도 많이 갈거니 좋을 거야.”
장난치듯 시벨의 머리칼을 잡고 귓가에 소근소근 말한 아스는 시벨이 소리 지르기 전에 얼른 물러나 식당 문을 열고 나갔다.
아스의 묘한 태도에 깜빡 굳어 있던 시벨은 그가 나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뭐가 야한 생각이고 여마족이야, 이 빌어먹을 꼬맹이…!”
⁂
시벨은 어두컴컴한 숲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수사냥은 관례처럼 열리는 여흥거리로, 여태까지 있었던 마수사냥에서 저 꼬맹이 마왕은 항상 최고 성적을 내곤 했다.
며칠 간 머물기 위해 사냥터가 될 저 어두침침한 숲 근처에 다른 이들이 천막을 치는 동안 시벨은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꼭 피라도 머금은 것처럼 붉게 핀, 꽃잎에 가시가 난 꽃을 본 시벨은 그 앞에 털썩 앉았다.
“할 일도 없고… 야 무슨 꽃이 이렇게 살벌하게 생겼냐, 웃기네.”
시벨이 혼자 중얼거리며 꽃을 만지려 손을 내밀었을 때였다.
“시벨!”
누군가 다급하게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뒤에서 그를 끌어안아 꽃과 떼어놓은 이는 시벨이 꽃 앞에 있는 것을 보고 헐레벌떡 뛰어 온 아스였다.
“뭐 하는 거야! 이건 마수야!”
일단 시벨을 떨어뜨려 놓자마자 아스는 그렇게 소리치며 불덩이를 꽃 위에 투하했다. 그 순간 꽃이 기묘한 비명소리를 내며 몸체를 비틀다가 검붉은 피를 흘리고 사라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광경에 시벨은 입을 떡 벌렸다.
“후우…….”
당장 눈앞의 것을 처리하자 아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끌어안은 시벨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마수에 손 대려 한 시벨에 바짝 긴장했던 것이 탁 풀린 터였다.
“뭐 저렇게 끔찍한 게 다 있어 짜증나게…….”
시벨이 작게 웅얼거렸다. 날카로운 귀곡성과 함께 눈앞에서 피를 토하고 죽은 꽃, 아니 꽃이라 믿었던 것 때문에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마른 풀 위에는 마수가 쏟은 피가 아직 그대로 있었다. 어쩐지 굳은 시벨에 아스는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시벨?”
“…아 진짜 짜증나네, 이게 뭐야.”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인상을 찌푸리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긴다. 아스는 일어서 그를 잡았다.
“왜 그래?”
아스와 마주한 시벨은 공연히 짜증을 냈다. 아스에게 저게 어쩐지 무서워서 그런다, 라고 할 수는 없는 터였다.
“망아지, 왜 그러냐니까.”
“시벨이야.”
이 상황에서도 호칭을 지적해오는 시벨리우스에 아스는 허, 헛웃음을 냈다.
“그래, 시벨리우스. 갑자기 왜 그래? 안색이 안 좋아.”
어찌 되었건 시벨의 얼굴 색이 좋지 않아 걱정스러워진 아스가 재차 물었다.
“그냥, 공기가 너무 답답해서 그런다.”
애써 다른 무언가를 쥐어짜낸 시벨이 퉁명스레 대꾸하며 고개를 돌려버리자 아스는 돌연 생긴 심술에 그의 뺨을 감싸 눈을 마주쳤다.
“왜 시선은 피하고 그래? 나 봐. 나 보고 말 해.”
지금 너 보고 싶지 않다고! 난 내 천막 가서 쉴 거니까 당장 손 놔!
시벨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건 말건 알지 못하는 아스는 그저 왜 갑자기 화가 났을까- 시벨을 빤히 볼 뿐이었다.
결국 시벨은 작은 한숨과 함께 뺨을 감싸고 있는 아스의 손을 떼내려 붙잡았다.
“별 일 아…….”
“흐… 흐흠. 저어… 마왕 전하, 시벨님?”
그 때 옆에서 헛기침과 함께 당황한 탓인지 조금 떨리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옆엔 어쩐지 살짝 붉어진 얼굴의 데르온이 어쩔 줄 모르며 서 있었다.
“아, 데르온. 무슨 일이야?”
시벨은 아스와 이것저것 대화하는 내내 자꾸만 자신을 힐끔힐끔 보는 데르온의 눈이 이해되지 않아 그의 손을 잡고 있던(언제부턴지) 아스의 손을 떨궈냈다.
“시벨?”
갑자기 손을 뿌리치고 시벨이 천막들 쪽으로 가자 아스가 깜짝 놀라 그를 부른다.
시벨은 아스가 부르는 소리에 그냥 손만 들어주고 계속 걸음을 옮긴다. 그가 마족들 사이로 가자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처음 건너왔을 때 데르온을 두들겨 패서 우열을 가린 이후 이렇다 할 시비는 없어졌지만 그렇다고 마족들이 신수인 유니콘이 마계에 머무는 걸 좋아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물론 시벨도 그들을 싫어하긴 마찬가지여서, 그런 그들의 태도에 전혀 신경 안 쓰고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거기 너, 내가 머물 곳이 어딘지 좀 알려주겠어?”
아스보고 이중인격이니 뭐니 하지만 정작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인 것은 생각도 안 하는 시벨은 가까이 있던 마족을 붙잡아 물었다.
“자, 잘 모르겠…….”
입에 빵을 물고 있던 마족이 삼키지도 못하고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내가 안내하지. 예정대로 오후 사냥을 진행할 거니까 다들 10분 안에 준비해라.”
언제 쫓아 왔는지 아스모델이 주변 마족들에게 지시했다. 낮게 가라앉은 마왕의 눈에 마족들이 흩어져 부산을 떨자 아스는 시벨을 한 쪽으로 끌었다.
“왜 갑자기 가버리고 그래. 오후 사냥은 갈 거야?”
천막들 사이를 걷다 사람이 한적한 곳에 이르자 아스가 뒤돌아서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아까 소동의 주제(시벨에게 왜 안색이 안 좋냐고 보챈)는 다행히 잊어버린 것 같은 모습에 시벨은 안도했다.
말이 없는 시벨의 태도에 아스는 그의 귓가에 다가서 바람을 훅 불었다.
“으악! 무슨 짓이야!”
어쩐지 멍하던 시벨이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 하자 아스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재촉했다.
“안 가. 쉬고 싶어. 내 천막에서 잘 거야.”
동행을 거절하는 시벨의 대답에 바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한바탕 소란을 떨며 마족들이 차비를 하고 떠나고 나서야, 사냥 기간 동안 쓰일 숙소들 사이에는 고요함이 찾아왔다.
시종들까지도 전부 그들을 따라가 버려서 그런지 제 천막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있는 시벨의 귀엔 바람에 풀이 사락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문득 밀려오는 졸음에 크게 하품하며 시벨은 기지개를 폈다. 비록 마계지만 약간의 계절 별 바람 차이는 있어, 어느새 마계의 기후에 적응해버린 몸이 감기와 비슷한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달리 할 일도 없어 시벨은 잠시 멍한 눈으로 침대 시트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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